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4화 (5/176)

4화

그렇게도 꿈꿔 왔던 나의 EPL 데뷔전은, 음….

별로 좋지 않은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후반전 내내 정신없는 난타전을 벌이다가 83분 존 우타카가 천금 같은 역전골을 성공, 그대로 승점 3점을 챙기는가 했는데….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더비 선수들은 수비 한 명만 놓아둔 채 페널티 라인 안으로 밀고 들어와 총공세를 펼쳤고, 혼전 상황에서 앤드류 토드가 극장골을 넣었다.

승격팀 상대로 무승부, 게다가 2실점.

나는 아직 확고한 주전이라고 볼 순 없는 처지.

이런 내용은 다메다.

아니, 근데, 진짜, 남 탓이 아니라….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첫 번째 골은 우리 미드필더들이 백업을 안 들어와 줘서 먹힌 거고, 두 번째 골도 그냥 우당퉁탕하다가 억지로 넣은 건데.

후… 그래, 다 핑계다.

그래도 다행히 스카이스포츠에서는 나에게 평점 7점을 줬다.

‘공중 장악 능력이 인상적이었다’라는 평가와 함께.

하긴, 헤더 경합을 19번 해서 19번 다 따냈으니 개쩔긴 했다.

후후훗.

오늘 경기를 반드시 이겨야 했던 이유는 2라운드 상대가 좀 무서운 팀이어서였다.

사실은 많이 무섭다.

내가 죽을 무렵에야 ‘맹9’로 불리며 엄청나게 몰락했지만, 2007년에는 잉글랜드를 넘어 전 유럽을 호령하던 강팀.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 * *

“밥은 잘 먹고?”

“네, 걱정 마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하나뿐인 아들이 어디 중국, 일본, 동남아도 아니고 영국까지 혼자 가 있는데.”

“괜찮아요. 저 영어도 잘해요.”

“니가 무슨 영어를 잘해. 학교 다닐 때 30점 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아… 엄마는 내가 언어 천재가 된 걸 모르시지.

그나저나 팩트로 때리시기 있습니까?

축구에 전념하느라 그랬다구요.

“하여간 잘 지내니까 걱정일랑 내려놓으세요. 또 전화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밥 잘 챙겨 먹어라. 축구도 결국 밥심 아니겠니.”

“네네, 이제 진짜 끊어요. 엄마.”

겨우겨우 통화를 끝냈다.

우리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때 내 나이 고작 3살, 엄마는 27살.

외가에서는 당연히 재혼하라고 난리를 쳤지만 엄마는 꿋꿋하게 혼자서 나를 키우셨다.

꽃다운 나이에 식당에서, 또 시장에서.

하루라도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머리가 크고 나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했냐고.

그때 엄마의 대답이 걸작이었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어.”

바보 같은 사람.

그래서 꼭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사람.

그게 우리 엄마다.

통화의 여운을 좀 느끼려고 했는데 전화벨이 다시 득달같이 울린다.

누구지? 나한테 전화할 사람이 엄마 말고 또 있었나?

발신자 표시가 뜨는데 모르는 번호다.

“헬로우?”

“아,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네?

“저는 BMC―ESPN의 이민철 기잡니다. 맨유전을 앞두고 인터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포츠머스 대 맨유.

예전 같았으면 그냥 평범한 경기였겠지만 지금은 ‘코리안 더비’가 되지 않았던가.

국내 언론에서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인터뷰라, 거절할 이유는 없지.

엄마한테 경기장 밖 얼굴도 보여 드리고 말이야.

* * *

[EPL 형제 대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웅장한 인트로와 함께 방송 시작.

크어억.

야, 백강아.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인터뷰 당시에는 스타다운 품격과 여유를 보여 줬다고 생각했는데, 카메라에 담긴 모습을 보니 입이 귀에 걸려 있다.

하긴, 죽기 전 근 10년 동안 단독으로 방송에 나온 적이 없었으니 얼마나 설렜겠는가.

“안녕하세요. 하하. 정, 하하. 백강입니다.”

어유, 인사부터 꼴 보기 싫다.

왜 저렇게 실실 웃는 거야?

거의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는데 실제로 방송에 나간 건 15분 남짓이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잉글랜드 생활 적응에 대한 이야기, 데뷔전 치른 소감, 맨유전에 임하는 각오 등등.

얼굴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답변 자체는 무난무난하게 잘한 것 같다.

내 차례가 끝나고 이 방송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승 선배가 등장했다.

비록 포지션은 다르지만 나의 롤모델.

국가대표팀에 처음 합류했을 때, 선발된 것 자체보다도 지승 선배와 함께 발을 맞춰 볼 수 있다는 게 더 기뻤었다.

―정백강 선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도 귀를 쫑긋 세웠다.

지승 선배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음… 후배긴 하지만 오히려 제가 배울 게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피지컬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오히려 정신력을 더 칭찬해 주고 싶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축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저도 그랬기 때문에… 잉글랜드 진출한 것도 대단하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런지 감수성이 예민해졌나 보다.

더비와 경기할 때 태극기 보고도 울컥하더니 지승 선배 이야기를 들으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오늘은 자기 전에 <이프 온리>나 보고 자야겠다.

흑흑.

* * *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 번의 기회를 더 얻게 되었다.

사실 좋은 일은 아닌데, 우리의 주장 캠벨 형님이 독감에 걸렸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를….

덕분에 경쟁자인 실뱅 디스탱과 호흡을 맞추게 됐다.

후, 떨린다.

오늘 디스탱보다 우월한 플레이를 보여 줘야 쐐기를 박을 수 있다.

그런데 경기는 경기고 할 건 해야지.

“선배님!”

지승 선배를 발견하자마자 쫄래쫄래 달려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잉글랜드에서 뵈니 또 감회가 새롭다.

“오, 백강아. 오늘 컨디션 어때?”

“아주 좋습니다, 선배님.”

“좋으면 안 되는데. 살살하자.”

지승 선배의 살인적인 눈웃음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다.

이건 사랑일까?

“저도 제 코가 석 자라… 조금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이따 보자.”

“넵! 들어가십쇼!”

오늘 경기를 생중계하는 BMC―ESPN은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나와 지승 선배가 둘 다 선발로 나서게 된 것이다.

멀리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얼굴도 보인다.

여우 같은 영감.

나의 높이를 의식했는지 카를로스 테베즈를 톱으로 쓰는 4―3―3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겨우 한 경기 뛰었는데 내가 중요 체크 대상이 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수비에서 나의 존재감을 뽐내긴 쉽지 않다.

높은 크로스 공격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역시… 그건가.

세트피스에서의 멋진 헤더골.

우리도 더비 카운티하고 비겼지만 맨유 역시 1라운드에서 레딩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서로 승점 3점이 간절한 상황.

비록 너희가 맨유지만 만만치 않을 거야.

우리 홈이니까 말이야.

킥오프 직전.

테베즈 옆에 오늘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한 라이언 긱스가 서 있다.

흥, 아무리 엄숙한 표정을 지어 봐야 나는 너의 추악한 생활을 다 알고 있어요.

어떻게 동생의 아내와… 쯧쯧.

만인의 존경을 받는 전설 노릇 하는 것도 몇 년 안 남았다 이 말이야.

그러고 보니 오른쪽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는 날강두의 얼굴도 보인다.

축구를 너무 잘하면 인성에 문제가 생기는 걸까?

휘슬이 울리고 맨유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 가는 우리 선수들.

그래, 기술이 안 되면 몸으로 풀어 갈 수 있는 게 축구라는 스포츠다.

피지컬 면에서는 우리 팀이 절대 밀리지 않았다.

우리 오른쪽 풀백인 노에 파마로와 충돌한 긱스가 나가떨어지며 공을 놓쳤다.

나이스 플레이, 파마로!

* * *

우리 팀의 기세가 좋았던 건 딱 처음 5분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을 찾아가는 맨유 선수들.

인정하긴 싫지만 긱스의 역할이 컸다.

절대 무리하지 않으면서 노련하게 공 소유권을 유지하는 긱스.

게다가 긱스와 함께하는 중미 파트너는 또 다른 축구 도사 폴 스콜스였다.

그 두 명을 받치는 수비형 미드필더는 마이클 캐릭이었고.

이 삼각 편대에 맞서는 우리 미드필더진은 션 데이비스와 페드로 멘데스!

사랑하는 동료들이지만 클래스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전반 15분.

왼쪽 측면에서 긱스의 패스를 건네받은 지승 선배가 오른발로 한 번 접은 뒤 낮고 빠른 크로스를 올렸다.

나를 등진 상태에서 공 받을 준비를 하는 테베즈.

그렇게 쉽게는 안 될걸?

나도 지지 않고 몸싸움을 걸어 갔는데….

뭐야?

얘 힘이 왜 이렇게 좋아?

아니, 힘이 좋다기보다 몸을 잘 쓰고 기술이 뛰어나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단신이라 그런지 무게 중심이 워낙 낮은 데다가, 내가 발을 갖다 댈 공간을 도통 허용하지 않는다.

그때 타이밍 맞춰 오버래핑을 시도하는 스콜스.

테베즈가 공을 받자마자 스콜스의 오른발 앞으로 땅볼 패스를 깔아 주었다.

야!

더비전에도 이렇게 먹히더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콜스한테 노마크 중거리 찬스를 주면 어떡해!

우리 미들진 진짜 이따위로 할….

짜증을 낼 새도 없이 미친 스피드로 날아간 공이 보기 좋게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최악의 스타트다.

테베즈 이 녀석!

축구 잘하네… 부럽다.

* * *

하프타임.

라커룸 분위기가 어둡다.

선제골을 허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기 내용도 처참했다.

볼 점유율 29% 대 71%

슈팅 횟수 1 대 11.

완벽한 반코트 게임을 했다.

0―1로 마친 게 기적일 정도.

“홈 개막전인데 이렇게 할 거야?”

해리 레드냅 감독의 얼굴은 오늘도 붉게 달아올랐다.

“상대가 강한 건 맞아. 근데 그러면 한 발 더 뛰어서 차이를 메울 생각을 해야지.”

백번 옳으신 말씀.

너 말이야, 데이비스.

그리고 멘데스… 는 결국 지미 트라오레와 교체되었다.

원래 수비수인 트라오레는 레드냅 감독의 특명을 받아 포백 라인 바로 앞에 위치하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잘 부탁해, 트라오레야.

나한테까지 공 오게 하지 마.

후반전 재개.

맨유는 교체 없이 그대로 갔다.

경기 내용이 워낙 좋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

처참한 팀의 모습에 실망했을 텐데도 홈팬들의 성원은 여전했다.

선수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축구로 보답하는 것뿐.

나 좀 멋있는 것 같다.

동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반전보단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니코 크란차르가 없는 상황에서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해 줘야 할 설리 문타리.

왼쪽 윙 자리에서 날카로운 패스를 전방으로 계속 공급하며 팀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원래 왼발잡이지만 오른발 킥력도 수준급이어서 상대 수비 입장에서 막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퍼거슨 감독의 지시가 있었는지, 맨유 오른쪽 풀백인 웨스 브라운이 문타리에게 1:1로 찰싹 붙어 봉쇄 작전에 나섰다.

최대 강점인 장거리 패스가 막혔지만 문타리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돌파를 시도했다.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많이 느끼는 모습이었다.

삑――

맨유에서만 10년 넘게 프로 생활을 하고 있는 베테랑 브라운이었지만 저돌적으로 들이미는 문타리를 막는 방법은 파울뿐이었다.

코너킥보다 훨씬 좋은 위치에서 얻어 낸 천금 같은 프리킥 찬스.

그래, 이거지.

내가 주인공이 될 때가 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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