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화 (6/176)

5화

대체 전력 분석이 어디까지 되어 있는 것일까.

설리 문타리가 프리킥을 준비하는데, 나의 마크맨으로 붙은 사나이.

네마냐 비디치였다.

한국 팬들이 ‘벽디치’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바로 그 선수.

맨유에서 공중볼 장악 능력 1등을 꼽으라면 누구나 비디치를 선정할 것이다.

그런 녀석이 내게 붙었다는 건?

나를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비디치라.

만만찮은 상대인 건 분명하지만, 과연 나를 막아낼 수 있을까?

이 정백강님의 헤더는 상대 수비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키커가 정확하게 보내주기만 하면 무조건 경합에선 이긴다.

그런데 1라운드 더비 전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문타리야, 오늘은 좀 더 힘을 내줘.

나의 텔레파시가 전해졌는지 문타리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수신호를 보냈다.

가까운 포스트 쪽을 노린다, 오케이.

파앙-----

소리부터 뭔가 느낌이 좋다.

코스도 강도도 기가 막힌다.

5252, 문타리! 믿고 있었다구.

비디치가 내 유니폼을 잡아챘지만 나도 즉각 손을 써서 뿌리쳐 버렸다.

반칙엔 반칙으로 대응해주는 게 인지상정.

낙하지점으로 내가 먼저 달려간 순간 이미 게임 오버였다.

천하의 반 데 사르도 골문 근처에서 말도 안 되는 스피드와 파워로 날아오는 나의 헤더슛을 막을 순 없었고, 쭉 뻗은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아간 공에 그물이 출렁였다.

수비 실수(사실 미드필더들 때문이지만)를 스스로 만회하는 호쾌한 헤더 동점골.

상대 팀은 당대 최강 맨유.

수비수는 비디치.

올해 나이 만 20세, 한국에서 온 슈퍼루키.

완벽한 스토리 라인을 완성하는 득점이었다.

그리고 나의 EPL 데뷔골은 오늘 경기의 마지막 득점으로 기록되었다.

2연속 무 재배.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휘슬이 울리자마자 나는 득달같이 지승 선배에게 달려갔다.

유니폼 교환을 위해서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너, 살살 하라고 했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예의 살인적인 눈웃음은 여전했다.

후배의 맹활약에 내심 기뻤으리라.

‘J. S. PARK’에 배번 13번.

게다가 실착 유니폼.

이건 평생 가보다.

선배도 제 유니폼 잘 갖고 계세요.

언젠가 가치가 엄청나게 뛰어오를 테니까요.

* * *

언젠가 말했던 것 같은데 축구선수한테 일신(一身)의 실력만큼 중요한 게 바로 임팩트다.

맨유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린 사나이.

딱 ‘짜세 나오는’ 워딩 아닌가.

포츠머스 지역 언론은 물론이고 전국 단위 방송에서도 정백강이라는 이름이 적지 않게 오르내렸다.

여기에는 상대 수문장인 반 데 사르의 인터뷰가 큰 역할을 했다.

“내 평생 그렇게 빠른 헤더슛은 처음 봤다.”

역시 네덜란드와 맨유의 전설답게 안목이 있으시네, 사르 형님.

형님이 못한 게 아닙니다.

제가 잘한 거죠.

사실 헤더를 맞힌 순간 골이라 직감했는데, 거의 막을 뻔한 반 데 사르의 반사신경에 더 놀랐었다.

역시 월드클래스 골리는 뭔가 달랐다.

그러니까 그걸 뚫은 나도 월클이라고 볼 수 있단 얘기다.

맨유와의 경기를 통해 자신감을 찾은 우리 팀은, 이틀 후 홈에서 볼턴 원더러스를 3-1로 꺾고 리그 첫 승을 신고했다.

1-1로 팽팽히 맞서던 후반 30분 터진 나의 헤더골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두 경기 연속 골.

“백강! 나이스!”

해리 레드냅 감독의 칭찬은 짧고 굵었다.

원래 피부가 붉은색이 아니었구나.

그냥 화가 많아서 달아오른 거였어.

앞으로도 얼굴 붉힐 일 없게 해드릴게요, 감독님.

하필 다음 경기가 첼시 원정이긴 하지만요.

정말 초반 일정 거지 같다.

하...

* * *

“올~~~ 붹강~~~”

“이제 완전 스타 다 됐네.”

“그러게나 말이야. 천하의 ‘스페셜 원’이 무섭다잖아?”

“하하.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그냥 한 소리겠지.”

팀원들이 놀리는 말에 손사래를 쳤지만 사실 기분은 무지하게 좋았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첼시의 주제 무리뉴 감독이 내 이름을 대놓고 언급한 것이다.

- 포츠머스에서 가장 경계하는 선수가 누구인가?

기자의 질문에 잠깐 생각하더니 곧장 답변하는 무리뉴.

“역시 정백강이다. 그의 머리는 언제 어떻게든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최근 두 경기를 통해 여러분도 보지 않았는가. 맨유도 경기를 지배했지만 정백강을 막지 못해 무승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수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세트피스의 중요성을 강조할 생각이다.”

크하하하.

이게 나다.

설리 문타리도 아니고, 은완코 카누도 아니고, 존 우타카도 아니라 정백강이란 말씀이다.

하지만 무리뉴도 나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한 모양이다.

‘강조’한다고 해서 날 제어할 순 없다.

나를 막는 방법은...

음? 없네?

* * *

생전에 1군 경기는 못 뛰었지만 그래도 잉글랜드에서 1년 넘게 활동했었는데, 스탬포드 브리지의 잔디를 밟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런 감촉이구나.

편견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포츠머스 홈하고는 잔디의 질부터 다른 느낌이다.

나중에야 만수르 형님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많이 바뀌긴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첼시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EPL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역시 뭐든지 돈을 펑펑 써야 잘 돌아가는 법이다.

회귀해서 경기도 뛰고 골도 넣고 지승 선배도 만나고 잘나가는 건 좋은데...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더러운 꼴을 자주 본다는 거다.

존 테리와 웨인 브리지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정답게 몸을 풀고 있는 투샷이란.

으...

누군가 한국 아이돌들의 세계를 ‘동물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는데 EPL이 훨씬 심하면 심했지 못하진 않은 것 같다.

브리지 형, 형은 몇 년 후에 지금 옆에 있는 테리를 증오하게 될 거야.

아직은 모르니까 오늘은 내가 대신 정의구현 해줄게.

걱정하지 마.

킥오프.

우리 레드냅 감독님이 상대를 많이 의식했는지 평소와 달리 5백을 들고 나왔다.

아무리 상대가 첼시라지만 5백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라는 의문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눈 녹듯 사라졌다.

휘슬과 동시에 스탬포드 브리지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파란 애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인 선수는 마이클 에시앙이었다.

수비 가담해서 카누한테 태클 들어가다가 순식간에 공격 진영까지 올라와 침투를 시도하더니, 이번엔 측면에서 문타리를 압박했다.

축구장에 야생마를 풀어놓으면 저런 모습일까.

정말 경이적인 체력과 활동량이다.

감탄하고 있을 시간도 없이 지독하게 몰아붙이는 첼시 선수들.

우리는 대인마크 대신 지역방어를 사용하는데, 디디에 드록바가 자꾸 나한테 붙는다.

아니, 캠벨 형한테 좀 가세요.

내가 만만한가?

퍼억-----

와...

드록바가 날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이게 사람이야? 돌덩이야?

진짜 ‘만근추’ 쓴 것처럼 아무리 밀어도 꿈쩍을 안 한다.

이래서 드록신, 드록신 하는구나.

EPL의 전력분석팀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공중볼로는 정백강을 이길 수 없다는 소문이 다 나버린 듯했다.

하늘에선 무적이지만 지상에서는 인간적인 나.

그 와중에 드록바보다 더 거슬리는 존재가 하나 있었으니 프랭크 램파드다.

가뜩이나 미드필더들의 수비 참여가 저조한 우리 팀에서 세계적인 ‘미들라이커’ 램파드는 눈엣가시 그 자체.

방심했다간 언제 침투해서 슈팅을 날릴지 모른다.

게다가 드록바는 연계 플레이 귀신 아니던가.

“좀 같이 내려와서 막아줘!”

참다못한 캠벨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와 동시에 드록바를 향해 스루 패스를 찔러주는 램파드.

왼발로 공을 키핑한 드록바가 바로 뛰어 들어오는 램파드에게 리턴 패스를 내주었다.

뻐엉-----

램파드가 맘먹고 때린 중거리포가 골문 좌측 하단에 보기 좋게 꽂혔다.

아니 진짜 대체 이 패턴으로만 몇 골을 먹히는 거야.

슬쩍 옆을 보니 캠벨이 완전 빡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참아줘야 되는 거냐.

단디 하자 좀.

* * *

하프타임.

레드냅 감독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

“후반전에는... 오닐이 빠지고... 파마로가 들어간다.”

넋 놓고 램파드를 내버려 둬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던 미드필더 게리 오닐의 교체는 예상됐던 결말.

근데 왜 교체선수가 파마로?

파마로는 수비수인데?

“그리고, 백강?”

“네? 네! 감독님.”

갑자기 부르고 그래.

사람 놀라게.

“네가 미드필더로 올라가.”

“네? 제가요?”

감독님 왜 이러세요.

이런 전략가 스타일 아니시잖아요.

“후반전 우리 공격 전술은 매우 심플하다. 공을 잡으면 무조건 백강 머리를 노리고 패스해.”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속 타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드냅 감독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오늘 에시앙, 램파드, 그리고 존 오비 미켈까지 3미들 컨디션이 너무 좋다. 게다가 원정 경기 아니냐. 중원에서 맞불을 놓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롱패스로 활로를 뚫어야 하는데, 전반전에 봤다시피 우리 타겟맨인 카누도 존 테리가 집중 마크하고 있어서 볼 투입이 쉽지 않아. 그러니까 백강을 올린다. 문타리, 그리고 우타카는 백강 머리만 보고 있다가 즉각 측면으로 침투해서 크로스를 노린다. 백강은 헤더로 볼 배급해준 뒤에 적극적으로 골문까지 침투하고 말야. 자, 다들 이해했지?”

“네! 감독님!”

다들 우렁차게도 대답하는데 나는 입만 뻐끔거렸다.

갑자기 미드필더로 뛰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선수의 숙명.

에이, 까짓거 해보자.

* * *

후반전 시작.

국가대표 선수들이 흔히 그렇듯 나도 중학생 때까지는 공격수로 뛰었다.

이후 축구 명문고로 진학하면서 서열 정리에 들어가 빠르게 센터백으로 정착...

앗, 그러고 보니 선수 생활 시작한 이래 미드필더 역할을 소화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미친.

무슨 새 포지션 데뷔전을 EPL에서, 그것도 첼시 원정 경기에서 한단 말인가.

속으로 레드냅 감독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는데 우리 골키퍼 데이비드 제임스가 길게 골킥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저 공, 아무래도 나한테 오는 것 같은데?

‘공중볼을 따내서 측면으로 보낸다.’

이론상으론 간단한데, 실제로 이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센터백으로 뛸 때는 앞의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 헤더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보고 있는 방향이 패스를 줘야 할 방향과 반대다.

상황 판단을 미리 한 후 옆쪽이나 뒤쪽으로 공을 전달해야 한다.

이런 어려운 미션을 주다니.

아무래도 레드냅 감독이 내 머리에 대해 아무래도 엄청난 신뢰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경합 상대는 미켈.

좋은 선수지만 점프력이 특출난 녀석은 아니다.

주변 상황은?

우타카의 매치업은 애슐리 콜.

날강두가 가장 어려워하는 상대로 잘 알려진 월드클래스 왼쪽 풀백이다.

우타카가 우리 팀 최고의 준족이긴 하지만 콜을 뚫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다면 반대쪽은?

이스라엘 출신의 수비수 탈 벤 하임.

문타리가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다.

압도적인 높이로 미켈을 제압한 후에 머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왼쪽 측면 방향으로 공을 보냈다.

좋은 타이밍에 쇄도하며 공을 잡는 문타리.

헤더로 이 정도로 정확한 패스가 들어갈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벤 하임의 반응이 늦었다.

문타리의 완벽한 크로스 찬스.

‘골문으로 침투해.’

레드냅 감독의 지시를 떠올리며 나도 스피드를 한껏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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