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끄아아, 아깝다.
너무 아깝다.
맨유에 이어 첼시를 상대로 골을 터뜨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머리로 줬다고는 믿을 수 없는 정교한 패스.
설리 문타리의 쇄도 타이밍.
내 머리로 날아오는 크로스의 정확도와 세기.
왼쪽 상단 야신 사각지대로 빨려 들어가는 헤더 슈팅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와! 미친! 저걸 막아?”
바로 앞에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지켜본 은완코 카누가 절망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늘도 트레이드 마크인 헤드기어를 쓰고 출전한 첼시의 수문장, 페트르 체흐가 존 테리와 여유롭게 하이파이브.
점수를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 선방이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코너킥이 남아 있으니까.
주제 무리뉴 감독이 그렇게 벌벌 떨었던 세트피스다 이 말이야.
키커는 당연히 문타리.
그리고 예상대로 존 테리가 나에게 붙었다.
네마냐 비디치에 이어서 이번엔 테리라...
어지간하면 살살 하겠는데, 테리 너는 좀 그래.
어떻게 동료의 여자를...
문타리의 코너킥이 먼 포스트 쪽으로 엄청나게 휘어져 들어왔다.
서로의 유니폼을 꼭 붙잡은 채 맞점프하는 테리와 나.
누가 축구를 발로 하는 스포츠라 했던가.
손과 머리로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작용한 ‘부도덕 분노 게이지’ 덕분인지, 안 그래도 높은 나의 타점이 10cm는 더 늘어난 듯했다.
공에 머리를 맞추는 순간, 경악에 찬 테리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 녀석아, 네놈의 축구 인생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
이게 점프고, 이게 헤더라는 거야.
침묵에 휩싸이는 스탬포드 브리지.
정백강은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치는 남자가 아니다.
나 덕분에 어시스트 스탯을 쭉쭉 쌓아나가고 있는 문타리가 후다닥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이것이 바로 상부상조 아니겠는가.
근데 타리야.
너무 좋아서 안는 것까진 좋은데 너무 비비진 마.
관중들이 이상하게 보잖아.
* * *
[코리아에서 온 자이언트 킬러(Giant Killer)!]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정백강... 그는 대체 누구?]
[포츠머스는 지금 ‘백강앓이’ 중]
더, 더욱 더 크게 칭찬해다오.
요즘 정말 축구할 맛 난다.
결과적으로 첼시와의 경기는 1-2로 패하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그 3경기 연속 골.
게다가 그 중 두 팀은 유력한 우승 후보인 맨유와 첼시.
센터백 주제에 팀 내 득점 단독 선두다.
입단식에서 리프팅 실수할 때만 해도, 이번 생도 글렀나 싶었는데.
회귀를 통해 얻은 능력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나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들.
데뷔와 동시에 팀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으니 모든 관심이 내게 집중되는 것도 당연했다.
내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오우! 췅붹광! 췅붹광이야!”
“정말 붹쾅이네!”
“사진 한 방 찍어줘!”
“요즘 정말 끝내 준다고!”
“다음 경기에도 헤더골 기대할게!”
역시 숙소 근처에 위치한 마트다.
생필품 사러 갈 때마다 어디서 한 잔 걸치고 오신 듯한 영국 신사(?)분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내주신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건 캠벨 형님의 발음이 그나마 훌륭한 편이라는 사실.
“사인해주실 수 있어요?”
“정말 너무 멋있어요!”
“다음에 아빠 엄마랑 직접 응원 갈게요!”
이건 귀여운 꼬마팬들.
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합리적 의문이 생긴다.
왜 여성팬은 붙질 않는 것인가.
우리 엄마는 내가 인물로 어디 가서 안 빠진다고 하셨었는데...
포지션이 수비수라서 그런가?
그래, 그럴 거야.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 * *
아이고, 잘 좀 해봐 얘들아.
그걸 쏘냐! 거기선 패스를 돌렸어야지.
네가 그러니까 주전으로 못 뛰는 거야.
나이스 수비! 우리 디스탱... 고생이 많아.
근데 어쩌나? 어차피 주전은 난데 말이지.
나는 지금 벤치에 앉아 있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다.
오늘은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리그컵 경기가 있는 날.
한때 ‘리즈 시절’이라는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잘나갔던 리즈지만 다 옛이야기.
지금은 그냥 3부리그 팀일 따름이다.
그것도 부채를 못 갚아서 부도가 난.
해리 레드냅 감독은 마음 편히 핵심 주전 선수들을 선발 명단에서 빼버렸고 나도 당연히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전략적 로테이션이라는 것이군요, 감독님.
내 옆에는 양옆으로는 캠벨 형님과 문타리가 앉아 있다.
사실상 포츠머스를 이끌어가는 3인방 아닌가.
리즈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뛰고는 있지만 여실한 전력 차는 극복하기 어려운 듯, 우리 팀이 일찌감치 3-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경기 상황에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잡담이 시작되었다.
“붹강,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캠벨.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력한 헤더를 할 수 있는 거야?”
허참,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일단 트럭에 치이면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에라 모르겠다.
되는대로 지껄여 보자.
“가장 중요한 건 체중 이동이야. 발목에서부터 힘을 끌어다가 척추를 뱀처럼 휘면서 머리를 슉 내미는 거지.”
“오오...”
오오는 무슨.
캠벨 형, 지금 나 약 팔고 있어.
양심의 가책은 느끼지만 입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임팩트 순간이 또 중요한데, 이게 결국 이마가 얼마나 단단한지가 중요한 요소거든. 그렇다고 무식하게 때려서 단련하면 뇌세포가 파괴되니까 나는...”
완전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캠벨이 침까지 꿀꺽 삼켰다.
“아주 무거운 헬멧을 쓰고 지냈어. 그 압력을 견디다 보면 머리도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거든. 모래주머니 차고 다니는 거랑 비슷한 원리랄까?”
나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그나저나 캠벨 형, 그렇게 눈을 빛내며 듣지 말아요.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관심 없는 척하던 문타리까지 몰래몰래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사람들 대체 상식이라는 게 없나?
이렇게 순진해가지고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두 사람 덕분에 앞으로 거짓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캠벨과 문타리가 내게 영업당하는 사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후반전에 슬렁슬렁 하다가 한 골을 먹히긴 했지만 3-1 승리는 불변이었다.
리즈도 이만하면 잘 싸운 거지 뭐.
나도 한 사람의 축구인으로서 리즈의 부도 사태가 잘 해결되길 바란다.
따지고 보면 다 동업자 아니겠는가.
이제는 다시 리그 경기를 준비해야 할 때.
우리 팀의 초반 일정은 한 글자로 ‘헬(Hell)’.
앞으로의 2연전 상대가 아스널, 리버풀이다.
일정 대체 누가 짰냐?
우리 팀의 초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누군가의 계략이 분명하다.
뭐, 대신 후반기 들어가면 좀 편해지겠지만 말이다.
* * *
아스널과의 경기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또 미드필더로 쓰지 않을까 궁금해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책(奇策)은 어디까지나 기책일 뿐.
결국에는 정공법이 답인 경우가 많다.
첼시전을 회상해 보면, 까놓고 말해서 골 넣은 거 말고 경기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발재간이 좋은 선수는 아니지 않은가.
패스 미스도 많았고 공도 많이 뺏겼다.
대신 내가 생각해도 수비 가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지만.
역시 나는 수비할 때 가장 행복한 남자다.
우리의 쫄보 레드냅 감독님은 오늘도 비기기 전략을 준비하셨다.
기본 포메이션은 4-5-1인데 미드필더진에서 문타리랑 우타카를 빼면 다 수비적인 성향의 선수들.
그리고 원톱에는 카누.
하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정상적인 힘싸움을 하는 건 무리긴 하지.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팀의 에이스 겸 한국에서 온 슈퍼루키인 정백강의 머리 한 방에 기대를 거는 전술이 아닐까 싶다.
이에 맞서는 아스널은 3-5-2 전형.
전형적인 ‘빅 앤 스몰’의 투톱을 들고 나왔다.
바로 로빈 반 페르시와 엠마누엘 아데바요르.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웃음이 절로 터지는 조합이다.
수많은 구너(Gooner)들이 아스널 영광의 시대를 만들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투톱.
그러나 반 페르시는 아스널에서 주장까지 달더니 바로 다음 시즌에 맨유로 이적해서 팬들의 공분을 샀고, 맨시티로 떠난 아데바요르는 아스널 전에서 골을 넣은 뒤에 화려한 세리머니를 펼치며 희대의 ‘명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 쟤네를 막아야 하는 수비수 입장에서는 매우 까다로운 조합인 건 분명하다.
개인기와 결정력이 발군인 반 페르시와, 깡패 피지컬로 공간 창출에 능한 아데바요르는 이론적으로 아주 궁합이 잘 맞았다.
게다가 반 페르시는 이미 리그에서 2골을 넣으며 왼발에 예열을 마친 상태.
더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뒤에서 이 투톱에게 패스를 배달하는 선수가 세스크 파브레가스라는 사실이다.
파브레가스도 아스널에서 주장까지 하고 바르샤...
더 말을 해서 무엇하랴.
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온갖 굴욕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아스널을 응원해 온 팬들에게 존경심까지 생길 정도다.
킥오프.
아르센 벵거 감독이 좋아라 하는 ‘아름다운 축구’가 그라운드에서 구현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미드필더들이 유려하게 공을 돌리며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짜식들, 볼 좀 차네.
우리의 콘셉트는 명확 그 자체.
상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수비진에서 웅크린 채 자리를 지키다가 공 빼앗으면 카누에게 뻥 차서 롱볼 역습.
단순해 보이지만 약팀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특히 아스널 같은 점유율 축구를 펼치는 팀은 필연적으로 수비라인을 올리기 때문에 더 위력적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경기 첫 유효 슈팅은 아스널이 아닌 우리 팀에서 나왔다.
간만에 선발로 나온 글렌 존슨이 내지른 장거리 패스를 카누가 받아서 그대로 왼발 슈팅.
알무니아가 몸을 날려 잡아내긴 했지만 굉장히 위협적인 장면이었다.
“좋아, 분위기 좋아! 지금처럼만 하자!”
복식호흡으로 소리치며 기세를 끌어올리는 주장 캠벨.
그런데 그런 말하면 꼭 위기가 찾아오던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파브레가스의 날카로운 스루 패스가 아데바요르에게 전달, 앞서 좋은 패스를 해서 흥이 났는지 의욕적으로 발을 뻗는 존슨.
삑-----
“노우! 노우! 절대 아니에요. 얘 쇼한 거라니까요?”
“아, 쫌! 제발요. 이게 무슨 페널티야?”
우리 존슨이가 어떻게 얻은 선발 기회인데 이리도 가혹한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러나 VAR이 있는 시절도 아니고, 판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제로.
아데바요르가 본인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호쾌하게 꽂아 넣으며 경기 시작 8분 만에 본인의 시즌 1호 골을 신고했다.
잔디 위를 미끄러지며 기쁨의 세리머니를 펼치는 아데바요르.
아스널 관중들이 ‘갓데발’에게 온갖 찬사를 보냈다.
풀 죽지 말고 우뚝 서라, 존슨.
이 백강 형님이 기필코 넣어줄게.
이 황금의 머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