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와, 무슨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냐.
존 우타카가 스피드를 살린 측면 돌파로 얻어낸 코너킥 기회.
골 넣을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올라왔는데...
필리페 센데로스와 엠마누엘 아데바요르가 나를 앞뒤에서 포위했다.
아니, 나한테 둘이나 붙는 건 반칙이잖아.
그것도 아스널 최고의 피지컬 괴물들이!
둘 다 190cm이 넘는 장신에 체중도 만만치 않게 나간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강백호를 상대하는 정성구처럼, 이 녀석들의 목적은 나와 헤더 경합을 해서 이기는 게 아니라, 아예 점프를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거구들 틈바구니에 끼인 나는 문타리가 올린 코너킥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치사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1:1로 붙으면 내가 다 처바를 수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프리킥 골까지 폭발하며 전반전은 0-2로 마무리되었다.
맨유전이나 첼시전에 비해 경기 내용은 오히려 좋은 편이었는데.
정말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역시 경기력과 승부는 별개라는 건 축구의 진리.
라커룸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데 솔 캠벨이 뒤에서 나를 불렀다.
“붹강!”
내가 걸음을 멈추자 바짝 붙어서서 속삭이는 캠벨.
“우리 ‘그거’ 하자.”
전혀 생각도 못한 발언에 내 몸이 딱 굳었다.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그것도 이 타이밍에.
“저기...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나 여자 좋아해... 미안...”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절의 뜻을 표했다.
그러자 나를 벌레 보듯 하는 캠벨.
“뭔 개소리야? 지난번에 연습했던 세트피스, 후반전에 해보자고.”
아... 미친...
아까 센데로스하고 아데바요르한테 앞뒤에서 쌍으로 당했더니 내 멘탈이 파괴된 모양이다.
“하... 하... 하...”
내가 어색하게 웃는 사이 캠벨이 혀를 차며 휙 지나가 버렸다.
아이고 쪽팔려.
* * *
후반전이 시작되었지만 경기의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아스널은 두 골 차로 넉넉하게 앞서고 있음에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고, 거기에 맞춰 우리는 자연스럽게 웅크리면서 역습을 노리는 전개.
골을 기록하며 기세가 한껏 오른 파브레가스의 현란한 패스 때문에 몇 차례 추가 실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수문장 데이비드 제임스의 선방과 몸을 날린 수비진의 활약으로 근근이 버텨냈다.
그리고 후반 25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PK 헌납의 피해자인 글렌 존슨이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코너킥을 얻어낸 것.
얼마나 기다렸던 세트피스던가.
포츠머스가 자랑하는 떡대 군단이 우르르 아스널 진영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나는...
페널티박스 바깥쪽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센데로스-아데바요르 콤비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녀석들, 이게 바로 ‘그거’다.
이래도 더블팀 붙으려면 붙어 봐라.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덩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버려둔 채 골문 사수에 나섰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
제아무리 정백강의 헤더가 개쩐다고 해도 그렇게 멀리까지 따라 나가서 마크하는 건 오버액션이 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대신 나에게 붙은 수비수는 로빈 반 페르시.
센-아에게 당하다가 페르시랑 붙으니까 이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이코노미석과 퍼스트 클래스의 차이랄까?
사실 퍼스트 클래스를 타본 적은 없지만...
돈 많이 벌어서 신혼여행은 꼭 퍼스트 클래스로 갈 거다.
일단 그 전에 여자친구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쓸데없는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설리 문타리가 왼팔을 쫙 펼치며 멋진 폼으로 코너킥을 올려 주었다.
문타리 녀석, 요즘 인지도 좀 올랐다고 카메라 신경 쓰는 것 좀 봐라.
코너킥의 행선지는 바로 이 몸.
맑은 윗 공기를 만끽하며 힘껏 점프.
반 페르시가 함께 뛰어 올랐지만 나의 압도적인 높이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팡-----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은 센데로스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친 캠벨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지구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노 단위 정밀도의 헤더 패스.
화들짝 놀란 마누엘 알무니아 골키퍼가 공을 쫓아 뛰쳐나왔는데...
툭-----
캠벨도 슈팅을 할 생각이 없었다.
노련하게 방향만 살짝 돌려놓는 헤더.
아스널 수비진의 신경이 온통 나와 캠벨에게 쏠린 사이 어디선가 등장한 은완코 카누가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카누의 오른발에 한 번, 머리에 한 번 맞고 텅 빈 골대로 굴러 들어가는 공.
뭔가 많이 엉성했지만 어쨌든 골은 골이었다.
이것이 바로 포츠머스의 필살기 ‘죽음의 트라이앵글’.
세트피스 상황에서 나에 대한 견제가 강화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짜놓은 패턴이었다.
“좋았어!”
카누가 가슴팍의 엠블럼을 두드리며 질주했다.
골의 예술성에 비해 세리머니가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번 시즌 첫 골이니 이해해줘야지.
나는 이미 3골이나 넣고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기쁘진 않던데...
‘죽음의 트라이앵글’ 작전의 성과는 좋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건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건 바로 골을 넣는 선수가 내가 아니라는 것.
다음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작전을 구상해봐야겠어.
* * *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아스널의 벽은 역시 높았다.
최종 스코어 1-2, 첼시전에 이은 리그 2연패.
볼 점유율은 크게 뒤졌지만 슈팅 개수는 엇비슷했다.
레드냅 감독이 들고 나온 선수비 후역습 전략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의미.
팀의 네임밸류로만 따졌을 때는 질 만한 상대였지만, 충분히 이길 기회도 있던 경기였기에 아쉬움은 컸다.
이제 다음 경기는 약 2주 후.
상대는 리버풀.
무지막지한 압박과 공격력으로 상대를 박살내고 다니는 위르겐 클롭 감독 버전만큼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리버풀 역시 상당한 강팀이었다.
많은 콥들에게 전설로 남은 남자의 로망 ‘제토 라인’이 처음으로 가동된 때가 바로 이번 시즌이다.
산 넘어 산 넘어 산.
그나마 위안인 것은 A매치 일정 때문에 2주 후에나 경기가 열린다는 사실.
연패의 아픔을 추스르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국대 차출 선수를 제외하고 진행되는 팀 훈련.
레드냅 감독이 나를 호출했다.
나와 함께 불려온 선수는 벤자니.
센터백과 스트라이커라.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자, 이제부터 너희 두 사람 훈련은 내가 직접 지도한다.”
어지간한 훈련은 코치들에게 맡겨놓는 편인 레드냅 감독이 직접 지휘를 하겠다니.
뭔가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걸까?
“내가 하프라인 부근에서 롱 패스를 띄워줄 테니까, 백강이 쇄도하는 벤자니한테 머리로 연결하면 된다. 어때, 간단하지?”
“네... 근데 이게 무슨 훈련인가요?”
“곧 알게 될 거다.”
더 대꾸해줄 마음이 없다는 듯 하프라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레드냅 감독.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오래 전 얘기지만 선수 시절 미드필더로 뛰었던 레드냅 감독의 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멋진 궤적을 그리며 정확하게 내 머리로 날아오는 공.
좌우로 움직일 필요 없이 제자리에서 뛰어도 될 정도였다.
내가 머리로 떨궈준 공을 받아 빈 골문에 차넣는 벤자니.
“자, 하나 더!”
대체 무슨 삽질을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쉴 틈 없이 공이 날아오는 통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벤자니가 10번째로 골(?)을 기록하는 순간.
“힘들어서 안 되겠다. 니코! 니코!”
벌써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지, 레드냅 감독이 얼마 전 부상에서 복귀한 니코 크란차르를 불러서 키커 역할을 맡겼다.
감독님, 운동 좀 하셔야겠네요.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거냐.
“오늘 훈련은 이게 다야. 이것만 하다가 집에 가면 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잔디 위에 주저앉은 레드냅 감독이 소리를 빽 질렀다.
깜짝이야.
독심술 쓰는 줄 알았네.
이 듣도 보도 못한 기묘한 훈련은 형태만 조금씩 바꿔서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벤자니 대신 다른 스트라이커인 카누나 데이비드 누젠트가 짝이 되기도 했고, 주전 윙어인 문타리와 우타카를 불러서 측면으로 공을 뿌리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훈련의 최종 진화 형태는 포백 수비진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워놓고 그 사이로 헤더 패스를 보내는 것.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커트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익숙해지자 성공 빈도가 점점 높아졌다.
동료들은 이렇게 정확한 헤더는 처음 본다며 감탄 연발.
후훗, 너희도 할 수 있어.
죽을 용기만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뿌듯함도 잠시, 열흘 넘게 이 짓만 반복하고 있자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설마하니 리버풀 전에서 나를 또 미드필더로 쓰려는 걸까.
그냥 수비만 하면 안 될까요, 감독님.
저 잘할 수 있습니다.
세트피스 때 골도 넣을 수 있구요.
벌써 리그 3골 아니겠습니까.
리버풀전을 앞둔 마지막 훈련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레드냅 감독이 또 나를 불렀다.
나 이제는 감독님이 좀 무서워지려고 해요.
무슨 일입니까?
“백강, 내가 왜 긴 시간 동안 같은 훈련만 반복시켰는지 궁금하지 않나?”
“하하. 다 깊으신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팀의 승리를 위해선 어떤 역할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감독님. 그게 바로 팀 플레이어죠.”
회귀하기 전 40년 가까이 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인간관계에서 말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것.
특히나 상대가 우리 팀 감독이라면 말이지.
나의 화려한 언변에 레드냅 감독의 얼굴이 활짝 폈다.
순진한 양반 같으니라구.
“그렇다니 다행이군. 내일 있을 리버풀전 말인데...”
“네, 감독님. 분부만 내려주세요.”
“백강. 네가 주전 스트라이커로 출전할 거야. 그렇게 알아둬.”
“가... 감독님? 지금 그게 무슨...”
“아이구, 오늘 아들 부부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벌써 시간이 다 됐네. 그럼 나는 이만.”
너무 놀라서 굳어버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린 후 떠나가는 레드냅 감독.
아직 젊은데 노망이라도 든 거야?
대체 나한테 왜 저러는데?
* * *
“굿 이브닝, 백강.”
굿 이브닝 같은 소리 하고 앉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도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의 심기를 건드린 인간은 실뱅 디스탱.
오늘 캠밸과 함께 주전 센터백으로 출전하게 되어 아주 입이 째졌다.
그래, 디스탱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저 망할 붉은 면상의 감독이 문제지.
난적 리버풀을 상대로, 레드냅 감독은 4-4-2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나의 투톱 파트너는 벤자니.
카누나 누젠트와 비교하면 그 ‘이상한 훈련’에서 공간을 잘라먹는 움직임이 가장 좋았으며, 덕분에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미드필더진에는 드디어 복귀한 플레이메이커 크란차르가 무게감을 더했고 양쪽 윙은 진리의 문타리-우타카 라인으로 구성되었다.
선수 입장 시작.
이 당시에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정백강-벤자니-크란차르-문타리-우타카 5인방이 잉글랜드 축구판을 발칵 뒤집어놓는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