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삑-----
휘슬과 함께 전반전 종료.
스코어는 3-0.
그리고 세 골의 주인공은 리버풀이 아닌 우리 포츠머스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세 골 중 세트피스 득점이 ‘0’이라는 것.
대체 45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시계를 되돌려 보면, 이 놀라운 사태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발생했다.
킥오프 후 니코 크란차르의 로빙 패스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벤자니가 타이밍 맞춰 골문으로 쇄도.
나는 훌쩍 뛰어올라 벤자니의 발 앞으로 공을 떨궈주었다.
리버풀의 오프사이드 라인은 이 헤더 패스 한 방에 완전히 붕괴.
1:1 찬스에서 침착하게 깔아 찬 슈팅이 그물을 갈랐다.
크란차르의 패스부터 벤자니의 득점까지 걸린 시간은 5초가 될까 말까.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리버풀이 자랑하는 제이미 캐러거-다니엘 아게르 센터백 듀오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허탈함에 양손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프래턴 파크의 홈팬들은 얼싸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골 넣은 벤자니도, 도움을 기록한 나도 세리머니할 생각도 잊은 채 서로를 멀뚱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이게 정말 되네?”
“그러게, 이게 왜 되지?”
“엉터리 훈련 아니었어?”
“우리 감독님, 사실은 명장이었나봐.”
“얘네가 호구인 건 아닐까?”
“쉿, 듣겠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선제골로부터 불과 5분 후.
이번에는 크란차르가 왼쪽 측면에 위치한 설리 문타리에게 공을 전달했다.
문타리는 내 머리를 겨냥하며 수비가 붙기 전에 얼리 크로스 시도.
골맛을 본 벤자니가 빈 공간으로 파고 들어갔는데...
아까 실점을 허용한 잔상이 머리에 남아 있었던지, 캐러거와 아게르 둘 모두 벤자니에게 어그로가 끌려 버렸다.
어부지리로 얻은 프리 헤더 찬스.
콰앙-----
골키퍼 페페 레이나가 몸을 날렸지만 슈팅이 너무 강력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는 레이나.
그치? 화면으로 보는 거랑은 좀 다르지?
내 헤더는 특별하단 말씀이야.
이 대목에서 리버풀 선수들의 멘탈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전반 종료 직전 터진 세 번째 골은 그 좋은 증거.
첫 번째 골과 똑같이 크란차르-정백강-벤자니로 이어지는 연계 플레이에 캐러거는 급히 따라가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아게르는 벤자니의 유니폼을 잡고 늘어졌다.
주심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당연히 페널티킥이 선언되었고, 키커로 나선 크란차르가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부상에서 복귀하자마자 시즌 첫 골을 신고했다.
“판타스틱! 판타스틱!”
포츠머스에 합류한 이후 이렇게 기뻐하는 레드냅 감독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하프타임 라커룸 분위기는 당연히 최고.
“이게 바로 전술이라는 거야.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 잘했어, 백강.”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평소에 마음에 없는 말을 잘하는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회귀를 통해 얻게 된 나의 미친 뚝배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포지션.
그건 바로 타겟형 스트라이커였던 것이다.
축구 인생 대부분을 수비수로 살아왔기에, 당연히 이번 생도 수비나 하다 가야지 생각했었는데 그건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으며, 누가 뭐래도 축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포지션이 바로 스트라이커 아니던가.
처음에는 EPL에 주전으로 데뷔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는데, 이렇게 되면 목표를 좀 상향 조정해야 되겠다.
화끈하게 주급 1억.
가보자 한번!
* * *
후반 20분 스티븐 제라드-페르난도 토레스 공식에 의해 한 골을 만회하며 영패는 면했지만, 거기까지가 리버풀의 한계였다.
경기 막판 승부가 거의 결정되자 레드냅 감독은 나를 불러들이고 은완코 카누를 투입했다.
이게 바로 ‘관리 차원’의 교체라는 거군.
지난 생을 떠올려 보면, 수비에서 삽질하다가 질책성 교체나 잔뜩 당했었지.
격세지감이다.
그나저나 카누 형, 주전 자리 빼앗아서 미안해요.
그런데 어떡해, 나도 먹고 살아야지.
‘정백강 피해자 목록’에서 실뱅 디스탱의 이름이 지워지고 대신 카누가 추가된 모양새였다.
최종 스코어 3-1.
리버풀을 연패 탈출의 제물로 삼으며 대어 낚시에 성공했다.
MOM(Man Of the Macth)은 볼 것도 없이 나.
1골 1어시스트로 환상적인 스트라이커 데뷔전을 치렀다.
“이 모든 영광을 레드냅 감독님께 돌립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쐐기를 박았다.
이것이 바로 처세술이라는 겁니다, 다들 배워두세요.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축구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이변 정도로 받아들였지.
그러나...
[포츠머스 3-0 블랙번, 시즌 첫 연승, 정백강 1골 2어시스트 맹활약]
[‘골폭풍’ 경기, 포츠머스 7-3 레딩, 정백강 데뷔 후 첫 해트트릭]
[풀햄도 무너졌다... 포츠머스 4-1 승리, 정백강 2골 1어시스트]
[포츠머스, 위건 2-0으로 꺾고 리그 5연승 달성, 정백강 1골 1어시스트]
10월의 마지막 리그 경기에서 웨스트햄까지 5-2로 꺾고 기어이 6연승 고지에 오르자, 사람들도 이게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1라운드까지 진행된 현재 7승 2무 2패를 기록하며 리그 4위에 안착.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포츠머스 돌풍의 중심에는 역시 바로 나, 정백강님이 위치했다.
6연승 기간 동안 무려 10골에 어시스트 6개.
수치만으로도 억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더 재밌는 기록은 따로 있었다.
16개의 공격 포인트를 죄다 머리로만 달성한 것이다.
크란차르, 문타리, 우타카가 나를 향해 높게 공을 띄워주는 순간 시작되는 이지선다.
슈팅이냐, 투톱 파트너에게 패스냐.
이 단순해 보이는 공격에 상대가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긴 왜야, 나 때문이지.
“태어나서 그런 헤더는 처음 봤다.”
내게 해트트릭을 선물한 레딩의 감독, 스티브 코펠 아저씨의 인터뷰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높이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경합이나 방해 자체가 의미가 없었고, 헤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서 그냥 발만 갖다 대면 유효 슈팅이 나왔다.
그렇다고 너무 놓아두면 바로 골망을 꿰뚫을 기세로 캐논 헤더슛을 꽂아버리니 수비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알고도 못 막는’ 공격 전술이라는 것.
유망주 센터백에서 팀의 핵심 공격수로 변신한 나의 위상은...
“어머어머! 저 사람 그 사람 맞지? 축구선수.”
“사진 찍어달라고 해볼까?”
“어떡해! 나 오늘 꼴 엉망인데...”
“아름다우신데요, 뭘. 이리 오세요. 사진 찍어드릴게요.”
“꺄야악!!!”
엄청나게 늘어난 여성팬과,
“정백강! 포지션 변경이 신의 한 수였어!”
“올 시즌 자네 덕분에 축구 볼 맛이 나네, 백강.”
“정! 내일 경기도 잘 부탁해!”
중년 신사 팬들의 정확한 발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이것이 인기라는 것이구나.
수비? 알 게 뭐야.
역시 축구는 공격이지.
* * *
따르릉-----
간만에 맞는 완전한 휴일.
경기도 훈련도 없는 날이다.
감히 누가 나의 단잠을 방해하는가.
“헬... 켁! 음음... 헬로우?”
자다 깨서 받다 보니 목이 많이 잠겨 있었나 보다.
슈퍼스타 체면이 말이 아니군.
전화 건 사람이 여자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절 아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미노 라이올라라고 합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잠이 확 깨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알지요.
모를 수가 없지요.
야구에 스캇 보라스가 있다면 축구엔 미노 라이올라가 있다.
‘슈퍼 에이전트’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인물 아니던가.
“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시고...”
“하는 일이 일인지라. 하하. 불쾌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말하는 품새가 시원시원하다.
“뭐 사과까지 하실 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요즘 프리미어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계시더군요. 인상 깊게 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일이 있어서 포츠머스에 와 있거든요. 혹시 시간 되시면 식사나 같이 하실 수 있을까 하고요.”
푸훗.
네가 포츠머스에 볼일이 뭐가 있어?
딱 보니 나 만나러 왔구먼.
잠깐 고민했으나 딱히 피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얘기나 들어보지 뭐.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식당 예약은 제가 해놓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지, 그럼 내가 하리?
* * *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포츠머스에 이런 곳이 있었나.
엄청나게 고급져 보이는 이탈리안 식당.
“라이올라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소문이다.
그래서 모자에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했다.
이렇게 해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겠지만...
라이올라는 아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룸을 예약해 놓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내가 들어서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악수를 청하는 라이올라.
“백강 씨! 반갑습니다.”
회귀하기 전만 해도 130kg가 넘는 거구로 유명했는데, 이 당시에는 꽤나 슬림했었군.
돈 많이 벌더니 살도 같이 찐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렸는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평소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전채로 연어 요리가 나왔다.
입에 넣고 씹는 순간 폭발할 듯한 풍미가 혀를 사로잡았다.
아니, 무슨 전채가 이렇게 맛있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시시 나오려는 순간, 인상을 팍 구기는 라이올라.
“역시... 본고장 맛은 따라갈 수 없군요. 그래도 포츠머스에서는 꽤 하는 집이라고 들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귀한 손님을 모셔 놓고...”
“커흠... 흠... 아닙니다.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네요.”
하마터면 체면을 구길 뻔했다.
라이올라 이 자식, 평소에 대체 뭘 먹고 사는 거냐?
“나중에 이탈리아로 오실 일 있으면 제대로 한 번 모시겠습니다. 특히 밀라노 쪽에 괜찮은 집들이 많지요.”
오호, 이놈 봐라?
굉장히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보통 사람들에게야 밀라노가 관광 명소겠지만, 우리 축구인들에게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명문 AC 밀란과 인터 밀란이 위치한 도시 아니던가.
특히 라이올라는 이탈리아 팀들과의 커넥션이 상당한 에이전트.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와인이 몇 순배 돌고 나자 라이올라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에이전트와의 계약이 얼마 안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정보력이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6개월 정도면 계약 기간 종료입니다.”
“재계약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요?”
“서두를 이유는 없지요. 천천히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백강 씨, 혹시...”
라이올라가 냅킨을 들어 입을 싹 닦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함께 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