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9화 (10/176)

9화

거물 에이전트의 귀가 솔깃한 제안.

하지만 여기서 덥석 무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행동이다.

대답하기에 앞서 뜸을 들이며 우아하게 와인 한 모금을 들이켰다.

으... 시고 떫어.

역시 와인은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모르겠다.

“라이올라 씨는 최고의 스타들만 상대하는 에이전트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호오, 말발 봐라?

이 양반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스타라,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단어야.

됐다 싶었는지 멈추지 않고 입을 터는 라이올라.

“현재 제 고객 중 넘버원을 꼽자면 아마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백강 씨가 즐라탄 못지않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르지요.”

이 시기 즐라탄은 명실상부한 ‘세리에의 왕’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였다.

물론 립 서비스가 좀 섞여 있는 말이겠지만 기분은 좋군.

“정말 그렇게 보시나요?”

“제 눈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백강 씨.”

어머, 자신감 뭐람.

이 남자 매력 있다.

나를 원하는 너의 마음은 잘 알겠어, 라이올라야.

그렇다면...

“제가 다른 에이전트 대신 라이올라 씨와 계약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라이올라의 눈에 일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약관의 외국인이 이렇게 고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지 이놈아?

‘어이구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을 줄 알았다면 경기도 오산이야.

나도 닳고 닳은 녀석이라구.

네가 트럭에 치여 봤어?

하지만 라이올라는 역시 노련했다.

금방 표정을 수습하더니 역공을 취해왔다.

“축구선수로서 백강 씨의 목표는 뭡니까?”

선수끼리 감출 게 뭐 있겠는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첫 번째는 돈, 두 번째는 명성입니다. 저는 프로니까요.”

순도 100%의 진실을 말하자 라이올라가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너랑 나랑 같은 걸 원하고 있겠지?

“좋습니다, 백강 씨. 저와 계약하신다면 다음 시즌 연봉 1000만 달러를 약속드리죠.”

* * *

“요즘 무슨 좋은 일 있어?”

“그러게.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네.”

“끝내주는 여자라도 만난 거야?”

“맞아, 그거네. 여자가 틀림없어.”

아직 수련이 부족한가 보다.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는지, 팀 동료들이 나를 보고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팀이 잘 나가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렇지.”

순진한 척 연기하며 넘어갔다.

사실은 ‘몸값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서’ 그런 거지만.

1000만 달러란 말이지.

환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화로 하면 최소 100억 원에 이르는 거금.

주급으로 하면 거의 2억 원에 육박한다.

주급 1억만 해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는데, 라이올라는 화끈하게 그 두 배를 불렀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회귀 전에 워낙 별 볼 일 없는 선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스스로의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라이올라와의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도 기존 에이전트와의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장 어떤 액션을 취하진 않았지만, ‘함께 역사를 써보자’며 구두 계약 비슷한 분위기로 마무리.

당분간 조언자 역할을 해주기로 한 건 덤이었다.

그리고 라이올라의 첫 번째 조언은 바로...

“이번 시즌에는 포츠머스에 남으세요.”

의외라면 의외인 발언이었다.

주가가 최고치를 달리고 있을 때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더 좋은 구단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라이올라의 태도는 단호했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진짜’ 이적시장은 어디까지나 여름입니다. 최고의 이벤트는 항상 여름에 일어나죠. 이번 시즌에 리그 20골만 넘기면 겨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조건으로 빅클럽에 갈 수 있습니다. 백강 씨.”

쐐기를 박는 라이올라.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지금의 라이올라와 미래의 라이올라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면?

그쪽이 더 큰 돈이 된다고 판단한 것일 터.

인성 논란이 있지만 구단들에게 마지막 한 푼까지 뜯어내는 능력만큼은 탁월한 인물 아닌가.

까짓거, 믿어보자.

* * *

12월 30일 열린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4-1로 완승을 거두면서 포츠머스의 2007년 일정이 모두 끝났다.

나를 포함 주전들이 대거 빠진 리그컵 4라운드에서 블랙번에게 패한 게 옥에 티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한 해였다.

20라운드까지 치르면서 11승 6무 3패, 승점 39점으로 리그 4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우리 위에 있는 팀들의 면면은 맨유, 첼시, 그리고 아스널.

이번 시즌 ‘빅 4’로 꼽혔던 리버풀은 5위에 안착했다.

잉글랜드를 발칵 뒤집어 놓은 포츠머스 돌풍의 핵심은 누가 뭐라 해도 나, 정백강이었다.

20경기에서 무려 19골과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득점과 어시스트 양 부문에서 모두 리그 선두를 질주.

이런 상황이니 나를 둘러싼 루머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맨유, 정백강 영입한다... ‘한국인 듀오’ 성사 직전]

[베니테즈 리버풀 감독, “정백강 원한다”]

[정백강, 이적료 400억에 에버튼 유니폼 입는다]

[인터 밀란, 포츠머스에 정백강 몸값 문의]

보도된 것 중 80% 정도는 기레기가 쓴 소설이있지만, 실제로 진지하게 접촉을 해온 팀도 있었다.

그러나 몽땅 거절했다.

진짜 이벤트는 여름에 일어나는 법이니까.

내가 잔류 의지를 밝히자 구단에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나 싶었건만... 정작 이적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투톱 파트너로 활약한 벤자니가 맨시티로 떠난 것이다.

나의 꿀패스 덕분에 리그에서 12골이나 넣으며 주가가 오른 덕을 톡톡히 봤다.

“정말 고마웠어.”

은혜를 아는 남자 벤자니는 나에게 명품 시계 하나를 선물해주고 떠났다.

짜식, 누구 덕분에 성공했는지 아는구나.

근데 그거 아니.

너의 영광은 이제 끝났다는 걸 말이야.

선물까지 준 친구에게 너무 야박하긴 하지만, 역사가 증명해 줄 거란다.

어쨌든 굿바이, 벤자니.

시계는 잘 차고 다닐게.

짭은 아닐 거라고 믿어.

진지하게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노리고 있던 구단에서는 벤자니를 떠나보낸 것을 신호탄으로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전력 보강에 들어갔다.

토트넘에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 로비 킨에게 밀려 후보로 전락한 저메인 데포를 데려오면서 벤자니의 공백을 즉각 메웠으며, 체코 대표팀 공격수인 밀란 바로시를 임대로 영입해 로스터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미드필더진에는 아스널의 주전 경쟁 때문에 불만을 호소하던 라사나 디아라를 합류시켰다.

크... 디아라...

훗날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게 될 남자라.

친해져서 나쁠 건 없겠지?

* * *

큰맘 먹고 이적시장에 돈을 푼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리그 3연승, FA컵 두 경기까지 포함하면 파죽의 5연승.

데포는 토트넘에서 당한 울분을 풀듯이 이적 후 첫 5경기에서 모두 선발로 출장하며 4골을 폭발시켰다.

적응기 따위는 개나 줘버린 듯한 활약이었다.

확실히 클래스는 있는 선수였다.

데포 역시 빠른 발을 활용한 공격에 능한 만큼, 나와의 궁합이 아주 좋았다.

디아라는 우리 팀의 고질적인 약점이던 미드필더진의 수비력과 기동성 부족을 한방에 해결해주었다.

디아라의 존재 덕분에 니코 크란차르나 설리 문타리 같은 창의적인 선수들은 공격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팀 공격력도 수직 상승.

반면 벤자니는 같은 기간 동안 무득점에 그쳤고, 경기력도 영 별로였다.

맨시티 팬들은 정백강 때문에 속아서 샀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른 선수들 얘기는 됐고 나는 어땠냐고?

뭐 별 거 있겠는가.

그냥 해트트릭 2번 포함 8골에 5어시스트 정도로 가볍게 몸 좀 풀었다.

두 번의 해트트릭은 모두 FA컵에서 기록한 것이었는데, 빅클럽에서도 쩔쩔 매는 나의 헤더를 입스위치나 플리머스 같은 하부리그 팀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연승 가도를 달리는 동안 아스널은 버밍엄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미들즈브러에게 덜미를 잡히는 등 헤맸고, 그 결과 순위표에도 변동이 생겼다.

EPL 3위, 포츠머스.

이쯤 되자 드디어 기자들이 우리 팀 앞에 ‘우승 후보’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6연승 도전 길목에서 ‘그 팀’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 * *

- 오늘 파이팅 하고... 나도 중계 보면서 열심히 응원할게. 물론 우리 팀 응원하겠지만 ㅎㅎ... 너도 잘해라, 백강아.

문자메시지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박지승 선배의 문자라니.

번호 교환은 진작에 했지만 먼저 연락이 온 건 처음이다.

만약 ‘정백강 박물관’이 건립된다면 제1호 유물로 남기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오늘은 맨유와의 시즌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이 있는 날.

지승 선배가 하필이면 어제 무릎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한국 선수들 간의 조우는 무산되었다.

포지션 변경 후 완전히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빅뱅(Big Bang)’.

잉글랜드 언론들이 오늘 경기에 붙인 수식어였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강팀 대 약팀의 대결로 치부됐지만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엿한 우승 후보들 간의 경기란 말씀이다.

흔히 말하는 ‘승점 3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승부다.

여기에 기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하나 더 붙었으니...

바로 양 팀 모두 유력한 득점왕 후보를 보유했다는 사실이다.

그 주인공은 나와 크리스티아누 날강... 아니 호날두다.

현재 리그 득점은 내가 21골, 호날두가 19골.

공동 3위인 엠마누엘 아데바요르와 페르난도 토레스는 15골에 그친 상태라, 사실상 나와 호날두의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콩의 기운을 넘치게 가진 모 프로게이머는 ‘2등도 잘한 거’라며 강변하곤 했지만, 스포츠의 세계에서 1등과 2등의 차이는 넘사벽인 게 현실.

‘1000만 달러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내 이력서에 득점왕 타이틀 하나 정도는 기재할 필요가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경기장이 올드 트래포드라는 것.

맨유가 쌓아 올린 수많은 영광의 역사가 완성된 맨체스터 축구팬들의 성지.

원정팀 입장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구장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장 전 표정을 보니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장 경험이 많고 심지가 굳은 주장 솔 캠벨마저도 분위기가 어두웠다.

“괜찮아, 괜찮아, 얼지 마! 충분히 할 수 있어!”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 높여 동료들을 독려했다.

이렇게 멘탈이 약해서 어쩌자는 거야?

나만 믿고 따라오라구!

“그런데 백강, 너 손 떨고 있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디아라가 일침을 가했다.

짜식이... 제법 예리하잖아?

역시 레알에 갈 사나이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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