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올드 트래포드 관중석 여기저기에 적지 않은 수의 태극기가 보였다.
한국에서 맨유가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팀이란 걸 생각해 보면, 그 중 상당수는 맨유와 박지승 선배를 응원하러 왔으리라.
지승 선배가 못 나와서 아쉬우시죠?
꿩 대신 닭이라고, 저도 많이 예뻐해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악역이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큭큭.
맨유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와아아아아아-----
빅매치답게 엄청난 열기.
홈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등에 업은 맨유가 기선제압에 나섰다.
왼쪽 측면에서 나니가 올린 크로스를 어느새 침투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하프발리 슈팅으로 연결.
데이비드 제임스 골키퍼가 가까스로 쳐내며 실점 위기를 모면했다.
‘포르투갈 커넥션’의 콤비 플레이가 빛났던 장면.
질 수 없잖아?
우리도 뭔가 보여줘야지.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전방에 패스 공급이 뚝 끊겼다.
이놈들이?
퍼거슨, 이 여우 같은 영감이 또...
축구로 기사 작위를 받은 인물은 역시 달라도 달랐다.
별 것 아니지만 의미 있는 발상의 전환.
오늘 맨유의 수비 콘셉트는 나를 막는 게 아니라 우리 팀 볼 순환의 핵인 니코 크란차르와 설리 문타리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정백강이라는 선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기본적으로 공이 적재적소에 투입되어야 힘을 쓰는 타겟맨 스타일.
온더볼 능력은 EPL 주전 스트라이커 중 최하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헤더로 공을 뿌려주는 것 외에는 연계 플레이도 수준 이하였고.
마이클 캐릭이 크란차르를, 웨스 브라운이 문타리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철저하게 마크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라사나 디아라가 전진 패스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크란차르만큼의 날카로움은 부족했다.
리오 퍼디난드와 네마냐 비디치가 한발 앞서 공을 끊어내며 철벽방어.
짜식들... 수비 좀 하는구나?
우리 팀이 공격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는 사이 결국 맨유의 선제골이 터졌다.
오늘 발끝 감각이 살아 있는 나니가 글렌 존슨의 수비를 완전히 벗겨낸 뒤 낮고 빠른 크로스를 올렸고, 쇄도하던 호날두가 발만 툭 갖다 대며 골망을 흔들었다.
전광판의 시계는 고작 전반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 좋지 않은 흐름이다.
“으악!”
이어지는 공격에서 캐릭의 강력한 차징을 당한 크란차르가 비명을 지르며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카드 줘야죠! 옐로! 옐로!”
바로 옆에서 상황을 목격한 디아라가 심판에게 따졌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이게 경고가 아니라고? 너무하잖아!”
자꾸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이 불안하다 싶었는데 결국 최악의 결과가 일어나고 말았다.
오히려 디아라를 향해 옐로카드를 꺼내 드는 심판.
잔뜩 흥분해서 심판에게 달려들려는 디아라를 주장 솔 캠벨이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디아라 형, 적당히 해.
그러다가 퇴장당하면 어쩌려고.
형 없으면 우리 중원 궤멸이야, 궤멸.
이 사건 이후로 과열되는 경기 양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과 5분 만에 호날두의 추가골이 터졌다.
이번에는 웨인 루니와의 2 대 1 패스를 통해 공간을 창출한 뒤, 각을 좁히러 뛰쳐나오는 제임스의 가랑이 사이로 여유 있게 슈팅을 성공시켰다.
리그 21호 골.
EPL 득점 순위 공동 1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호날두가 잔디 위를 미끄러지며 기쁨을 표출했다.
그래도 그 거지 같은 ‘호우’ 세리머니는 안 할 때라 다행이야.
전반 종료.
기대를 모았던 리그 1위팀과 3위팀의 대결은 0-2의 다소 싱거운 스코어로 홈팀 맨유가 앞서 나갔다.
거참.
내가 센터백 볼 때도 미들진이 말썽이더니, 스트라이커일 때도 마찬가지구만.
이 슈퍼스타 정백강님을 제대로 보좌하란 말이야!
젠장...
라이올라 말 듣지 말고 그냥 빅클럽 갈 걸...
* * *
“지금 우리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 지고 있죠, 감독님.
숫자 읽을 줄 모르시나요.
또 무슨 약을 팔려고 밑밥을 까십니까.
“상대가 백강에 대한 볼 투입 차단에 이렇게까지 목숨을 건다는 건 무엇이냐? 반대로 말하면 일단 패스가 전달만 되면 막지 못한다는 걸 인정한 거나 다름없다.”
칭찬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근데 너무 행복회로 아닙니까?
팩트는 제가 제대로 공 한 번 못 만져봤다는 건데요.
“자, 그래서... 후반전 전형은 이렇게 간다.”
해리 레드냅 감독이 작전판에 써서 보여준 전술은 4-3-3 포메이션이었다.
선수 교체 없이 왼쪽 윙에 있던 문타리가 중앙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는 톱에 있던 저메인 데포가 메우는 방식.
“그리고 니코는, ‘피를로 롤’을 수행하게 될 거다.”
오오, 감독님.
무슨 생각이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느낌 있는데요?
‘피를로 롤’이라는 게 있어 보이지만 별 건 아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역대급 미드필더인 안드레아 피를로를 명장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써먹은 방식에 대한 이야기.
젊은 시절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던 피를로는 최고 수준의 패싱 능력을 갖췄지만 피지컬적으로 훌륭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안첼로티 감독은 피를로를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로 내리고 ‘후방 플레이 메이커’라는 독특한 역할을 부여했다.
압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서 공을 뿌려 줄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공격적인 선수는 올리고, 수비적인 선수는 내려서 쓴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전술이었다.
원조인 AC 밀란의 3미들과 비교하면, 피를로-크란차르, 젠나로 가투소-디아라, 클라렌스 세도르프-문타리라고 볼 수 있는 셈.
음...
나란히 세우니까 좀 그렇다...
클래스 차이가 영...
동료들아 미안해, 사랑한다.
어쨌든 평소엔 어딘지 좀 맹해 보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전술가적 면모를 보여주는 레드냅 감독이었다.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다니까.
* * *
후반전 시작.
미드필더 숫자를 셋으로 늘린 선택은 탁월했다.
전반전에 크란차르를 완전히 지워버렸던 캐릭이 어찌할 줄을 몰라 허둥대는 꼴이 참 볼 만했다.
맨유 역시 4-3-3 포메이션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인 캐릭의 전진이 제한되는 측면이 있었다.
드디어 해방된 크란차르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최대 수혜자는 존 우타카.
오른쪽 측면으로 날카로운 스루패스가 날아가는 빈도가 늘어났고, 파트리스 에브라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우타카의 주력을 활용한 돌파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친인 지승 선배가 안 나와서 의욕이 없는 걸까?
그리고 후반 10분.
우타카가 기어이 한 건 했다.
에브라의 슬라이딩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오픈 찬스.
퍼디난드의 백업이 가기 전에 지체 없이 칼날 크로스 시도.
이런 건 결정지어주는 게 원톱의 미덕 아니겠는가.
퍼엉-----
올드 트래포드를 침묵에 빠트리는 통쾌한 헤더골.
누가 그랬어?
맨유 수비진이 철벽이라고.
이번 시즌 맨유 상대로만 2골째를 달성했다.
관중석에서 펄럭이는 태극기.
국뽕이 차오른다.
감사합니다, 이게 저예요.
땀 냄새 나는 동료들에게 껴안긴 채 힐끗 보니, 호날두 녀석의 표정이 좋지 않다.
다시 내가 1등이다, 껄껄껄.
득점왕 넘볼 생각 하지 마.
나중에 스페인 가서 하든가.
물론 거기서도 쉽진 않을 거야.
키는 작은데 축구는 좀 하는 아르헨티나 녀석이 한 명 있거든.
여전히 한 골 앞서는 상태였지만, 나의 골을 기점으로 맨유 선수들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턴오버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루니와 호날두는 찬스 때마다 홈런 아니면 소녀슛으로 일관.
심리적으로 쫓기는 듯한 인상이었다.
이럴 때 움직이는 게 바로 퍼거슨이라는 남자.
생각도 못 한 전술을 들고 나왔다.
루니를 크란차르에게 붙여버린 것이다.
수비 스킬은 좀 투박하지만 피지컬과 투지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선수가 바로 루니다.
현란한 드리블로 한 번 벗겨내도 계속 들이대고, 또 제쳐도 어느새 따라오는 루니를 상대로 크란차르가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물론 축구는 그렇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서, 맨유 입장에서도 루니가 수비적 롤을 맡는 만큼 공격력이 약화되는 부작용은 있었다.
2-1이든 3-1이든 똑같은 승점 3점이라는 겁니까, 퍼거슨 영감님.
양 팀 모두 별다른 공격 장면 없이 시간만 흐르자 관중석에서 슬슬 야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한테 뭐라 그러지 마요.
당신네 영감님이 잠그려고 하는 거니까.
답답함을 느낀 데포가 거의 수비진영까지 내려가서 공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드리블을 시작.
1차 저지선으로 나선 호날두를 가볍게 요리했다.
2라운드 폴 스콜스도 통과.
어... 어?
왜 이렇게 빨라?
데포가 이 정도였나?
내가 당황할 정도였으니 맨유 선수들은 어땠겠는가.
동시에 덮친 캐릭과 브라운마저도 가볍게 지나치는 데포.
그대로 골문 우측 상단을 노리고 감아찼다.
뻐엉-----
잘 맞은 공은 소리부터 다른 법.
완벽한 임팩트였다.
데포의 대포알 같은 슈팅.
라임 지렸다.
천하의 에드윈 반 데 사르가 손 한 번 뻗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깡-----
골대가 흔들릴 정도의 위력.
크로스바를 강타한 공이 높이 떠서 튕겨 나왔다.
깜짝 놀라 뛰쳐나오는 반 데 사르.
하지만 오매불망 공만 쳐다보고 있던 나의 반응이 한발 빨랐다.
정점에서 내려찍은 공이 바닥에 한 번 맞고 골문 안쪽으로 직행.
퍼디난드가 몸을 날려 공을 걷어냈지만 심판 판정은 정확했다.
라인을 완전히 넘어간 이후에 공을 차낸 것이다.
고생했어, 퍼디 형.
나도 센터백 출신이라 형 마음 이해해.
근데 골은 골이야.
후반 38분에 터진 짜릿한 동점골.
맨유 원정에서 승점을 획득한다면 개이득인 부분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퍼거슨 감독이 총공세로 전환.
왼쪽 풀백 에브라를 빼고 공격수인 카를로스 테베즈를 투입하면서 승부를 걸어왔다.
그러나 캠벨 주장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 수비진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한때 나의 라이벌이었던 실뱅 디스탱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호날두의 슈팅만 3개를 몸으로 막아냈다.
녀석... 그래, 너 같은 애가 수비수 해야지.
나는 그냥 전방에서 골이나 넣을게.
추가시간 3분도 거의 다 끝나가는 후반 47분, 맨유가 정말로 마지막이 될 코너킥 기회를 맞았다.
키커는 오늘 도움 1개를 기록한 나니.
맨유는 후방에 골키퍼와 브라운만 배치해 놓고 모든 선수가 페널티 박스 근처로 올라왔고, 반대로 우리 팀은 우타카만 전방에 포진한 상태.
나도 수비 가담을 위해 내려왔다.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오는 나니의 코너킥.
그러나 정백강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원정 무승부를 자축하듯 호쾌하게 작렬한 헤더.
필사의 힘을 다한 덕분에 공이 중앙선 부근까지 날아갈 정도로 강력... 어라?
나와 경합했던 비디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원정 응원석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미친 머리 덕분에 아무도 예상 못 한 찬스가 발생했다.
풀타임을 뛰어서 지칠 법도 한데, 골 냄새를 맡은 우타카의 진격에는 거침이 없었다.
기를 쓰고 따라가는 브라운.
하지만 우타카가 너무나도 빨랐다.
반 데 사르 나온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로빙슛.
우타카의 발을 떠난 공이 높고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