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1화 (12/176)

11화

[포츠머스, 올드 트래포드 원정서 맨유 3-2로 격파]

[정백강, 2골과 결정적인 헤더 패스로 승리 일등공신 돼]

[“정백강이 경기를 지배했다”, 패장 퍼거슨의 한탄]

말 그대로 짜릿한 승리.

존 우타카의 버저비터에 힘입어, 기어이 대어를 낚는 데 성공했다.

아쉽게도 공식 어시스트로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최후의 순간에 터진 나의 헤더 패스는 경기 최고의 장면으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이 경기의 결과는 엉뚱하게도 나비효과처럼, 3일 후 열린 첼시전에 영향을 미쳤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수비 전술에 영감을 받은 아브람 그랜트 감독이, 똑같이 니코 크란차르와 설리 문타리에 대한 강한 압박을 준비해 온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첼시의 미드필더 라인이 미하엘 발락-마이클 에시앙-클로드 마켈렐레였다는 것.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히는 이 굵직굵직한 선수들의 정신 나간 압박에 우리 중원은 영혼까지 털리고 말았다.

결국 0-2로 2008년 들어 첫 패배를 기록.

바로 이 시점부터 EPL의 상위권 순위 경쟁은 아주 볼 만하게 흘러갔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뱀처럼 요동치는 순위.

우리 팀도 첼시전 이후 마지막 라운드까지 무패행진을 달리며 충분히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으나, 에버튼과 토트넘, 맨시티를 상대로 무승부에 그치며 아깝게도 3위에 머물렀다.

포츠머스의 리그 최종 성적은 25승 9무 4패, 승점 84점.

2위 첼시가 25승 10무 3패로 승점 85점,

4위 아스널은 24승 11무 3패로 승점 83점이었다.

EPL 역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레이스였다.

대망의 우승컵은 결국 맨유의 손에 돌아갔다.

지난 시즌에 이은 리그 2연패.

27승 6무 5패로 ‘빅 4’ 중에 패점은 오히려 가장 많이 안았지만, 이겨야 할 경기를 확실하게 이긴 게 컸다.

‘양학 잘하는 팀이 리그 우승한다’는 말이 예나 지금이나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팀 성적과 별개로, 득점왕 타이틀은 무난히 내 손에 들어왔다.

막바지로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고작(?) 31골에 그치는 사이, 집중력을 유지하며 35골을 쓸어 담았다.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이었다.

어시스트 역시 18개를 기록하며 세스크 파브레가스에 이은 전체 2위.

잉글랜드를 넘어 전 유럽을 요동치게 한 활약이었다.

유럽의 축구 리그를 통틀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에게 주는 ‘유러피언 골든 슈’도 나의 품에 들어오게 되었다.

적어도 포츠머스 내에서 나의 인기는 거의 신드롬 급.

잉글랜드 사람들이 태극기를 챙겨서 응원을 올 정도였으니 게임 오버였다.

타지에 묶인 몸이라 인터넷이나 방송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반응은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한국의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제한포(제발 한국인이면 포츠머스 좀 응원합시다)’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였다.

내가 이적하면 다 빠질 팬들로 보이긴 했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한 해를 보낸 나와 포츠머스였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경기가 하나 남아 있었다.

내가 입단 기자회견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말했던 바로 그 대회, FA컵 결승전이었다.

* * *

2008년 5월 17일 오후 3시.

런던답지 않게 화창한 날씨.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이자 훗날 BTS가 공연을 펼치게 되는 웸블리 스타디움에 9만 명 가까운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올해 FA컵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변이 속출하며 축구팬들의 관심을 한몸에 모은 대회였다.

긴 말 필요 없이 결승 대진만 봐도 어느 정도 느낌이 오지 않는가.

무려 포츠머스 VS 카디프시티.

통계 자료를 보니 맨유, 첼시, 아스널, 리버풀 네 팀이 결승 무대를 밟지 못한 게 1990-1991 시즌 이후 처음이었으니 말 다했다.

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해먹은 거냐, 이놈들아.

물론 너희들의 시대도 곧 끝나긴 한다만, 크크큭.

그나마 EPL에서 엄청난 시즌을 보낸 우리야 그렇다 쳐도, 2부리그 팀인 카디프시티가 결승에 진출한 건 정말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대회답게, 까마득한 FA컵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승팀 명단에 두 팀의 이름도 있기는 했다.

우리 포츠머스가 1939년, 그리고 카디프시티가 1927년...

후... 그만 알아보자.

나에게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승부사 기질이 있었던 것일까?

리그에서도 장난 아니었지만, 토너먼트에서 오히려 더욱 강한 면모를 보였다.

결승까지 5경기를 치르며 11득점 3어시스트.

이 11골 중에는 8강에서 맨유를 상대로 1-0 승리를 이끈 결승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맨유 킬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우리에게 떨어지고 초라하게 짐을 싼 맨유는, 리그 우승 후 지금쯤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준비...

아... 개부럽다...

내년엔 나도 무조건 간다, 챔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당연히 우리 팀의 우세.

하지만 카디프시티의 기세도 절대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해리 레드냅 감독은 리그에서 즐겨 쓰던 4-4-2 대신 4-1-4-1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라사나 디아라를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붙박아 둠으로써 수비력을 강화하고, 양쪽 윙에 위치한 문타리와 우타카는 경우에 따라 최전방까지 올라가 4-3-3으로 전환하는 유동적인 전술.

아무래도 단판 승부라는 점을 감안해서 수비 쪽에 포커스를 둔 모양새였다.

깜짝골만 안 먹힌다면 절대 안 진다는 마인드도 엿보였고.

반면 적장인 데이브 존스 감독은 전통적인 4-4-2로 대응.

상대가 상대인 만큼 선수비 후역습 전략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거 없었다.

결승전까지 온 팀답게 대단한 자신감.

킥오프.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데뷔 이후 이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를 하는 건 처음이다.

EPL 빅매치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음압(音壓).

그리고...

“골! 골! 하셀바잉크의 득점!”

신이 나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장내 아나운서.

카디프시티의 스트라이커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가 냅다 때린 중거리포가 시원스럽게 골문 우측 상단을 갈랐다.

경기 시작 3분 만에 터진 카디프시티의 선제골.

뭐냐, 이게 대체 뭐시당가.

* * *

이게 아닌데...

경기가 영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내가 입단 기자회견에서 FA컵 이야기를 꺼낸 건 괜한 허세가 아니었다.

실제로 2008년 바로 이날, 바로 이 장소에서 포츠머스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었단 말이다.

결승전 상대는 똑같이 카디프시티였고.

당시 은완코 카누 형님이 결승골을 넣어서 1-0으로 겨우 잡았었다.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기억하냐고?

그때 벤치에 앉아 있었거든.

물론 뛰진 못했지만...

이제껏 어지간한 역사는 다 그대로 흘러 왔는데, 아무래도 뭔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올해 포츠머스 리그 성적도 실제랑은 안 맞지.

득점왕도 원래 호날두 거였으니까.

그나저나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카디프시티 애들이 무슨 스팀팩 맞은 것처럼 뛰어다니는데 경기력이 후덜덜하다.

이거 도핑테스트 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명색이 EPL 3위인데 2부리그 팀한테 점유율도 밀리고 슈팅 개수도 밀리는 건 좀...

그나마 정신 차린 수비진의 활약 덕분에 추가 실점 없이 전반을 끝냈다.

레드냅 감독이 개빡친 건 불 보듯 뻔한 이야기.

“장난해? 지금 장난하냐고?”

장난은 아니고 축구했는데요.

쟤네가 너무 잘하네요.

어지간하면 무서울 게 없는 나지만, 이런 양상으로 경기가 흘러갈 때는 무력감을 좀 느낀다.

리오넬 메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온더볼만 되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뛸 텐데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트럭...

에이, 아니다.

EPL 득점왕이면 감지덕지지.

더 이상의 모험은 원치 않는다.

레드냅 감독은 결국 미드필더인 페드로 멘데스를 빼 버리고 저메인 데포를 투입했다.

역시 포츠머스하면 4-4-2 아니겠습니까, 감독님.

데포의 대포알 같은 슈팅과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지요.

후반전 재개.

데포를 넣은 건 확실히 좋은 판단이었다.

내가 원톱으로 뛸 때는 자신감 넘치던 상대가 확 움츠러들었다.

아무래도 발 빠른 수비수가 별로 없는 카디프시티이다 보니, 뒷공간 파기에 능한 데포의 스피드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우이쒸.

생각하니 뭔가 기분 나쁜데?

나는 안 무섭고 데포는 무섭다는 거야?

누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카디프시티가 수비라인을 끌어내리자 미드필더진과의 간격이 벌어졌고, 그 공간을 통해 우리 팀도 유의미한 공격 찬스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반 20분.

돌격대장 크란차르가 화려한 드리블링을 선보이며 전진, 우측 측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데포를 향해 기가 막힌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다.

데포는 공 받자마자 지체 없이 크로스.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찬스가 왔다.

헙? 으아악!

삑-----

페널티 박스 안에서 ‘정백강의 프리 헤더=실점’.

이건 잉글랜드에서 뛰는 축구선수들이 필히 외워야 할 공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경기 내내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센터백 글렌 루벤스가 다급한 나머지 내 유니폼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정확하게 상황을 확인한 마이크 딘 주심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을 찍었다.

천금 같은 페널티킥.

우우우-----

아니, 열정적인 응원은 좋은데 야유 좀 하지 마세요.

방금 건 명백했다구요.

물론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어쩌겠어요, 제가 너무 잘나서 그런 것을.

데포가 과감하게 한가운데로 때려 넣은 페널티킥이 성공하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승부는 지금부터다.

* * *

처절함, 간절함, 허슬 플레이, 열정, 땀, 팀워크, 염원...

2007-2008 FA컵 결승전을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기술적 수준이 높은 경기는 절대 아니었으나, 그 치열함만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할 정도였다.

양 팀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던진 결과, 90분 내로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

연장전 돌입.

이미 양 팀의 교체 카드는 모두 소진한 상태.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제부터는 정신력 싸움이었다.

그리고 연장에서 경기의 주도권을 잡은 건 우리 팀이었다.

전력도 전력이었지만 태도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상대는 갈 때까지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식이었으니.

2부리그가 아니라 20부리그 팀하고 붙어도 자신할 수 없는 게 승부차기 아니던가.

우리 팀의 파상공세도 대단했지만, 지독하게 버텨내는 카디프시티의 수비력은 경탄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나에게는 기본 2명에 최대 3명까지 붙어대는 통에 뭘 할 수가 없었다.

헛심만 쓴 채 연장 전반 종료.

눈앞에 ‘승’이라는 글자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사랑하는 골키퍼 제임스 형, 자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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