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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12화 (13/176)

12화

연장 후반, 우리 팀은 솔 캠벨-실뱅 디스탱 센터백 콤비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서 총공세를 펼쳤다.

이에 맞서는 카디프시티는 10백으로 대응하며 철벽 방어태세를 갖췄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신이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훈련 때 승부차기 훈련이라도 빡세게 한 걸까.

“더 빨리 움직여! 압박! 압박하란 말이야!”

리그에서의 호성적 덕분에 잘 보여주지 않던 해리 레드냅 감독의 ‘붉은 얼굴’이 간만에 부활했다.

카디프시티의 수비도 좋았지만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설리 문타리가 수비수 2명 벗겨내며 감아 찬 공이 크로스바에 맞았고, 내가 간만에 발을 써서 날린 땅볼슛도 골포스트를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성과 없이 무심히 흘러가는 초침.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이 5분 안쪽으로 떨어지자, 다급해진 레드냅 감독은 캠벨까지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그러다 역습 한 방에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승부차기는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 포츠머스의 주장은 기습적인 중거리슛을 통해 가슴 속 깊이 감춰져 있던 공격 본능을 뽐냈다.

페널티 박스 안에 수비수가 워낙 많다 보니, 공이 어딘가에 맞고 굴절.

절묘한 각도를 그리며 골대 오른쪽 구석으로 날아갔다.

가까스로 몸을 날려 공을 쳐내는 마이클 오크스 골키퍼.

연장 후반 13분, 천금 같은 코너킥을 만들어낸 캠벨이었다.

나이스 플레이, 주장.

내가 보답할게요.

우리 팀의 코너킥 키커는 니코 크란차르.

동점골 장면에서 보여준 것처럼 날카로운 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뻐엉-----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공이 하늘을 날았고, 웸블리 스타디움이 일순 조용해졌다.

9만 명 가까운 관중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초집중 관람 모드에 들어갔다.

아아, 뭔가 보여줬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글렀다.

덩치 두 명이 붙은 것도 빡센데, 쌍으로 내 유니폼을 꽉 붙잡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거의 찢어질 기세.

하지만 휘슬을 불기에는 상황이 너무...

지금 페널티킥으로 경기를 끝냈다가는 성난 카디프시티 팬들에 의해 심판의 목숨이 위협받을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동료들아, 나 대신 뭔가 보여주지 않을래?

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한 사람은 역시 믿음직한 캠벨 형님이었다.

이 정백강 님에게 가려서 그렇지, 캠벨 형님의 공중 장악력은 원래 EPL에서도 알아주는 수준.

카디프시티에서 ‘머리 좀 쓴다’ 하는 수비수들은 다 나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편한 자세에서 헤더슛 시도.

코스도 좋고 파워도 실려 충분히 득점을 노려볼 수 있는 슈팅.

그러나 오크스 골키퍼의 집중력은 아직 살아 있었다.

용수철처럼 몸을 솟구치며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선방을 해내는 오크스.

우리 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물고 늘어져야 했다.

다음 타자인 저메인 데포가 루즈볼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골키퍼는 아직 넘어진 상태, 나를 밀착마크 하고 있던 센터백 로저 존슨이 황급히 골대 안으로 백업을 들어갔다.

빽빽한 선수들 사이에 딱 한 군데의 빈틈을 찔러 시도한 데포의 왼발 슈팅을 머리로 걷어내는 존슨.

이번에도 공은 멀리 가지 못하고 높이 떴다.

“안돼!!!”

존슨의 처절한 절규, 그리고 이미 훌쩍 날아오른 나.

잘 싸웠어, 얘들아.

너희들의 분전은 절대 잊지 않을게.

* * *

삑-----

휘슬이 길게 울렸고, 우리 팀 벤치 멤버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그라운드 위로 뛰쳐나왔다.

카디프시티 선수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누워 버렸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많았다.

승패가 나뉘는 현장엔, 이렇듯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법이다.

최종 스코어 2-1.

장장 120분 간의 혈투 끝에 우승 트로피를 손에 거머쥔 건 우리 포츠머스였다.

“위~ 아 더 챔피언~ 마이 프렌즈~”

경기 막판 승리에 엄청난 공헌을 한 캠벨이 흥에 겨워서 퀸의 을 열창했다.

캠벨 형!

축구는 잘하지만 노래는 영 아니구나?

곧바로 거행되는 시상식.

캠벨 주장부터 한 사람씩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입을 맞췄고,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차가운 금속성의 트로피를 손에 잡는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차 올라왔다.

잉글랜드 땅에서, 내 손으로 직접 일궈낸 첫 우승이 아닌가.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런던까지 와서 열띤 응원전을 펼쳤던 팬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그 짜릿한 감동이란... 크...

스타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결승전에서까지 1골 1어시스트.

FA컵 도합 12골 4어시스트.

내가 세운 기록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경이적’이다.

이 정도면 최고의 이별 선물이 아닐까.

물론 지금 이 순간 포츠머스 팬들은 나를 떠나보낸다는 걸 상상조차 못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아, 비정한 자본주의여.

하지만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다.

저는 곧 갑니다, 여러분.

한 시즌 동안 행복했어요.

트로피를 손에 꽉 쥔 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다시 천지가 울릴 듯한 열띤 환호성이 터졌다.

* * *

[포츠머스 공격수 정백강, 미노 라이올라와 전속 에이전트 계약 체결]

[‘EPL 득점왕’과 ‘슈퍼 에이전트’의 만남, 올 여름 대형 이적 암시?]

[알렉상드르 가이다막 포츠머스 구단주, “정백강은 우리 선수, 무조건 지킬 것” 못박아]

[집중 탐구! 정백강을 노리는 ‘큰손’들, 그의 행선지는 어디?]

FA컵 우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라이올라와 함께 가기로 도장을 쾅 찍었다.

여기저기서 욕 많이 먹는,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난받을 사람인 건 알았지만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돈이었으니.

그쪽 방면에서 라이올라만한 파트너 찾기도 쉽지 않다.

이 소식에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축구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적의 냄새를 맡고 들이닥치는 기자들 때문에 매우 피곤해질 뻔했으나...

껄껄껄.

기자 놈들아, 나는 잉글랜드에 없지롱.

더러운 꼴 당하지 말라는 신의 가호일까.

때마침 2010 월드컵 3차 예선 일정이 떡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

이 몸은 모든 걸 계산하고 있단 말이다.

“혀엉!!!!!”

인천공항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취재진들의 플래시 세례 속에서 간헐적으로 남성팬들의 괴성이 들려 왔다.

나 외아들이야, 임마.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그런데 왜 오빠라고 불러주는 목소리는 들리질 않는 거냐.

조금은 울적한 심정으로 미니 기자회견에 응했다.

- 잉글랜드 이적 첫해에 엄청난 성과를 이뤘다. 소감이 어떤지?

“환상적이었다. 리그 우승을 놓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만족한다. 점수를 주자면 100점 만점에 95점을 주고 싶다.”

- 최근 활발하게 이적설이 돌고 있는데?

“추측성 보도일 뿐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지금은 이적이냐 잔류냐 하는 문제보단 눈앞에 닥친 경기에만 집중할 생각이다.”

- 정백강 선수에게 거는 축구팬들의 기대가 엄청나다.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린다.

“2006년에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긴 했지만, 월드컵 예선은 또 전혀 다른 무대라고 생각한다. 이번 시즌 잉글랜드에서 큰 경기 경험을 많이 쌓은 게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우리 대표팀이 본 실력만 발휘할 수 있다면 아시아에서 못 이길 상대는 없다고 자부한다. 아무쪼록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

깔끔했다.

이게 어딜 봐서 만 21세의 마이크웍이냐.

“혀엉!!! 사랑해요!!!”

오랜 시간 기다린 팬들을 위해 사인까지 마치고 멋있게 떠나려는데 뒤에서 또 굵직한 중저음의 함성이 들려온다.

아... 인생...

* * *

{동대문구의 자랑! 영국 축구 리그 득점왕 정백강!}

좁은 골목 여기저기에 현수막이 내걸렸다.

엄밀히 말하면 영국이 아니라 잉글랜드긴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오히려 정감 가고 좋구만.

설마 스코틀랜드 관광객이 이 동네까지 오진 않겠지?

“꺄악!”

길 가던 몇몇 여학생이 날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래, 이거지, 이 반응이지.

귀여운 꼬마 아가씨들, 안녕?

나는 슈퍼스타 정백강이라고 해.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고, 축구도 많이 사랑해주렴.

선물과 팬레터는 언제든 환영이야.

“아들!”

언제 들어도 반가운 목소리.

엄마다.

“나 온 줄 어떻게 알고 나와 있었어요?”

“온 동네가 난리법석인데 모를 수가 있나. 밥은 먹었어?”

대한민국 모든 엄마의 공통 관심사.

우리 모자(母子)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이요.”

“그래, 얼른 들어와. 밥부터 먹자.”

작년 초에 오픈한 10평 남짓한 분식집 <백강분식>.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을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남들이 보면 작고 초라한 식당일지 모르나, 엄마에겐 ‘꿈의 완성’인 공간이었다.

평생 남의 일만 해주다가 ‘내 가게’를 꾸리게 됐으니 그 심정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벽면에는 메뉴판과 함께 내 전신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요즘 장사는 좀 어때요?”

“말도 마라. 가게는 코딱지만 한데 사람 하나 더 써야 할 지경이야. 다 우리 아들 덕분이지 뭐. ‘정백강이 엄마 가게’로 소문이 나 가지고... 저 봐라. 또 한 팀 오네.”

엄마가 가리키는 곳에 축구 유니폼을 입고 걸어오는 4명의 남정네들이 보였다.

내 또래인 것 같은데... 대학생들인가?

어디서 한 게임 뛰고 왔는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이모님, 안녕하세요! 우어어어억!!!”

선두에 서서 발랄하게 인사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던 유니폼 1이 비명을 질렀다.

“야, 왜 그래애으어악!!! 뭐야아!!!”

유니폼 2는 거의 졸도할 지경.

유니폼 3과 4도 뒤늦게 나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몸이 딱 굳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정백강입니다.”

지난 생에서 여러 사례들을 통해 확실하게 배운 것 하나.

종목을 불문하고 ‘프로’라는 타이틀을 달고 뛰는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팬 서비스라는 사실이다.

꿈에도 그리던 슈퍼스타가 먼저 인사를 건네오자 유니폼 4인방은 너무 큰 감동에 거의 울상이 되었다.

쐐기를 박을 차례.

“엄마, 매직 있어요? 유니폼에 사인 좀 해드리게.”

“으어어, 안 돼요. 땀냄새 엄청 나요. 씻지도 못해가지고...”

“괜찮습니다. 대신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릴게요.”

나만큼이나 감수성이 예민한지 유니폼 4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요.”

“가보는 무슨,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한소리 했지만 표정에는 뿌듯함이 가득하다.

아, 기분이 너무 좋다.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트럭에 치일 만한 가치는 있었던 듯하다.

조금만 기다려요, 엄마.

내가 정말정말 호강시켜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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