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2008년 5월 31일 오후 8시.
붉은 악마들로 그득그득한 상암의 열기는 아주 뜨거웠다.
아직 밤에는 쌀쌀할 때인데도 여름 날씨처럼 느껴질 정도.
2010 남아공 월드컵의 관문인 3차 예선.
북한, 요르단, 투르크메니스탄과 한 조가 된 대한민국은 앞선 두 경기에서 1승 1무를 거두며 조 1위 자리를 고수 중이었다.
오늘의 상대는 요르단.
홈에서 열리는 경기인만큼 깔끔하게 잡아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 경기에서 4-4-2 포메이션을 들고 나온 허종무 감독의 전술 콘셉트는 명확했다.
양쪽 측면을 박지승-이창용 콤비가 허물어뜨린 후 찬스를 제공해주면, 나의 머리와 박주연의 발로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
‘잉글랜드를 정복한 남자 정백강’과 ‘축구 천재 박주연’의 투톱 조합에 대해 팬들이 거는 기대는 어마어마했다.
내가 86년생, 박주연 선배가 85년생으로 나이까지 어려서, 언론에서는 ‘한국의 향후 10년을 책임질 투톱’이라고 띄워주곤 했다.
뭐, 개인적으로 나는 20년 동안 해먹을 자신이 있긴 하지만.
킥오프.
중원을 싹 쓸어버린다고 해서 ‘빗자루’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김남익 선배가 오른쪽 측면으로 롱패스를 시도했다.
패스가 좀 긴가 싶었지만 이창용이 득달같이 쫓아가 공을 잡아냈다.
대표팀 막내다운 빠릿빠릿함이었다.
“창용아! 올려!”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나.
요르단의 수비 약점은 높이에 있었다.
센터백들의 평균 신장이 180cm을 갓 넘긴 수준이었으니.
다른 팀을 상대할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왜냐고? 왜긴 왜야.
내가 있으니까 그렇지.
툭 치고 나가며 순간적으로 수비를 따돌린 이창용이 페널티 박스 안을 쓱 바라본 후 높은 크로스를 날렸다.
EPL에서 세계적인 피지컬 괴물들을 상대하다가 아시아로 넘어오니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냥 훅 뛰어서 쿵하고 공을 건드리니 장내 아나운서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골! 전반 2분! 정백강의 득점!”
명색이 A매치고 월드컵 예선인데...
이거 너무 쉬운 거 아냐?
* * *
‘아시아의 재앙, 혹은 제왕.’
‘어나더 클래스(Another Class).’
3차 예선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를 보고, 언론에서 나를 지칭하는 용어들이었다.
4경기를 뛰면서 5골에 3어시스트.
직접 기록한 공격 포인트도 엄청난 숫자였지만, 나의 존재 자체가 상대 수비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내가 어그로를 끌고 다니는 사이 불을 뿜는 동료들의 득점포.
4전 전승에 15골.
대한민국은 경기당 3골을 훌쩍 넘기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뽐내며 3차 예선을 무난히 통과했다.
대표팀 경기 후면 80% 확률로 뉴스를 장식하던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정백강 효과’.
대표팀에서 내 역할을 200% 수행한 나는 곧장 잉글랜드행 비행기릍 탔다.
휴식 따위는 없는 강행군.
나라고 왜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빠른 시일 안에 이적 문제를 마무리 짓고 다음 시즌 준비에 돌입해야 했다.
잉글랜드에 도착하니, 나만큼이나 마음이 급했는지 에이전트 미노 라이올라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국 대표팀 경기는 모두 챙겨봤습니다. 엄청나던데요?”
“하하, 뭘요. 보통이죠.”
“환영 만찬이라도 해야 되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거든요.”
이적 건은 절대 정보가 새나가면 안 되는 내밀한 이야기.
라이올라가 미리 잡아놓은 호텔 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요? 한국에서도 기사는 보고 있었거든요.”
라이올라는 ‘언론 플레이의 황제’로 불리는 에이전트.
이런저런 찌라시까지 다 합치면 나와 연결된 팀이 거의 15개 가까이 됐다.
“물론 허수가 많습니다. 간만 살짝 본 곳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연락해온 곳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EPL 중위권 팀들 중에는 에버튼과 맨시티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던 라이올라가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도로 넣어 버렸다.
“포츠머스에서 다시 중위권 팀으로 간다는 건 생각하고 있지 않으시겠죠?”
고렇지 고렇지.
이 집 일 잘하네.
“다음은 리버풀입니다.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이 백강 씨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표명하고 있어요. 스티븐 제라드가 뒤를 받치고, 백강 씨와 페르난도 토레스가 투톱으로 뛰게 되면 EPL 최강의 공격진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오호, ‘제백토 라인’이라, 확실히 느낌 있다.
안필드에서 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다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
“이왕이면 다음 시즌에 챔피언스리그에서 뛰고 싶은데요.”
‘갑툭튀’한 포츠머스 때문에 5위에 그친 리버풀은 이번 시즌 챔스 진출에 실패했다.
UEFA컵은 정백강이라는 거물을 담기엔 너무 좁은 무대 아니겠는가.
“좋습니다. 그러면 조건을 만족하는 팀은 세 팀으로 압축되겠네요.”
“세 팀이요? 거기가 어딘가요?”
라이올라가 룸서비스로 시킨 와인을 한 모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맨유, 인테르,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입니다.”
* * *
남자 둘이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호텔 방 안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오우, 표정 관리가 너무 힘든데?
생각해 보라.
국가대표 경기 중계를 보는데 내 얼굴이 원샷으로 잡히면서 화면 밑에 이런 자막이 뜨는 것이다.
- 정백강, FW,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정백강, FW, 인테르
- 정백강, FW, 바이에른 뮌헨
지승 선배가 처음 맨유에 진출했을 때 주모가 얼마나 바빴던가.
지금 나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라이올라가 부가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협상 결과에 따라 최종 금액은 좀 바뀔 수가 있습니다만, 이 세 팀은 백강 씨의 이적료로 최대 3800만 유로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포츠머스가 거절하기에는 너무 좋은 제안이라, 백강 씨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적은 무난하게 진행될 겁니다.”
3800만 유로라고?
가만 있자...
헉! 우리 돈으로 하면 600억 원이 넘는다.
내 몸값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포츠머스의 재정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라이올라의 말마따나, 얼마나 더 뜯어내느냐가 포인트지 나를 붙잡는 건 사실상 어려운 상황.
맨인뮌, 맨인뮌 신나는 노래.
근데 이걸 어떻게 고른다냐.
“세 팀 다 너무 마음에 드는데요.”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이 세 팀을 상대로 협상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 호텔에서의 회동 이후 불과 3일 만에 라이올라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다른 건 몰라도 일 처리 속도 하나는 기깔나게 마음에 든다.
“계약금이나 출전 수당 같은 건 차이가 미미합니다.”
라이올라가 가져온 소식은 연봉 협상 결과였다.
- 축구선수로서 백강 씨의 목표는 뭡니까?
라이올라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질문.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 첫 번째는 돈, 두 번째는 명성입니다.
세 팀 모두 각국을 대표하는 명문 구단이니까 후자는 이미 충족.
그렇다면 남은 건 뭐니 뭐니 해도 머니 아니겠는가.
“뮌헨이 가장 적습니다. 650만 유로를 불렀습니다.”
학창시절에 수학은 못해도 산수만큼은 끝내줬던 나의 두뇌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104억 원, 주급으로 하면 2억 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근데 지금 뭐라 그랬지?
가장 적다고?
“맨유와 인테르는 720만 유로까지는 지급할 용의가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750만까지 받아낼 자신이 있지만 말이죠.”
오, 마이, 갓.
점점 단위가 비현실적이 되어 간다.
750만 유로면 120억 원이에요 이 사람아.
그래도 명색이 슈퍼스타인데 내가 너무 정신없이 끌려가는 것 같아서 짐짓 아는 체를 했다.
“금액이 같아도 세율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라마다 금액 차이가 꽤 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때, 날카로웠지?
그런데 라이올라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지금, 비웃었어?
“백강 씨는 아직 제 능력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지금 말씀드린 금액은 ‘당연히’ 세금을 제한 숫자입니다.”
‘당연히’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는 라이올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슬슬 튀어나올 기미를 보이고 있는 라이올라의 똥배가 너무나도 귀엽게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혹시...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요?
* * *
[‘코리안 특급’ 정백강, 인테르 전격 이적!]
[이적료 624억 원... 역대 한국인 선수 중 최고 금액]
[정백강-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꿈의 투톱’ 결성, 인테르의 다음 시즌 전망은?]
짠돌이(?) 바이에른 뮌헨을 한쪽 구석에 치워 버린 후 맨유와 인테르를 놓고 저울질한 끝에, 나의 간택을 받은 팀은 인테르였다.
포츠머스 운영진은 예상대로 이적 제의를 받아들였고, 그 와중에 협상력을 발휘해 이적료를 3900만 유로까지 끌어올렸다.
왜 맨유가 아닌 인테르였느냐?
물론 처음에는 지승 선배랑 같이 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을 두고 냉정하게 고민해 보니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프로 축구판이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한 곳인 거,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달 전까지 리그 우승을 다투던 팀으로 휙 떠나 버린다?
모양새가 너무 좋지 않았다.
이런 내 생각에 라이올라도 적극 동의해 주었다.
“선수의 이미지는 실력만큼이나 광고 수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죠. 좋은 판단으로 보입니다, 백강 씨.”
정말 모든 걸 돈으로 계산하시는군요.
이쯤 되니 존경스럽습니다.
나의 이미지 메이킹은 <포츠머스 팬들에게 남기는 편지>를 통해 그 정점을 찍었다.
신문사에 미리 이야기해서 이탈리아 출국 후에 공개되도록 만든 치밀함까지 완벽했다.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작년 이맘때쯤, 저는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이름 없는 수비수였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탈리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네요.
눈을 감고 포츠머스에서 보낸 지난 1년을 되돌아봅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관중들로 가득 찬 프래턴 파크의 전경이고,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제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함성입니다.
그러면 곧 깨닫게 됩니다. 지금의 정백강이라는 선수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이죠.
저는 이제 떠나지만, 포츠머스의 환상적인 팬 여러분들이 제게 보내주신 열렬한 응원과 사랑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저와 함께 한 시간이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이 편지를 쓸 때 괜히 눈물이 찔끔 났다.
생각해 보면, 이 도시에서는 좋은 기억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편지가 공개되자 포츠머스 팬들의 반응은 뭐, 가히 폭발적이었다.
삼삼오오 돈을 모아 프래턴 파크 앞에 <정백강, 당신은 영원한 우리의 레전드입니다>는 대형 광고판을 세웠을 정도였다.
한 시즌 뛰고 레전드 소리 듣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게 바로 나다.
어쨌든 나의 잉글랜드 생활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자, 그럼 EPL에 이어 세리에도 접수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