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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14화 (15/176)

14화

인테르가 나의 영입에 사활을 건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야 이름값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그와 함께 ‘아들탄’ 조합을 구성하던 아드리아누의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던 것.

일시적 부진이라고 하기엔 기간이 너무 길었으며, 피치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 더 말썽이었다.

사생활 문제가 너무나도 심각했다.

‘밤의 황제’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클럽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은 기본이요.

술 진탕 마시고 훈련에 빠지는 일도 빈번했다.

거기에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조사를 받는 등 기행(奇行)이 도를 더해가자, 대인배로 알려진 구단주 마시모 모라티의 인내심도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그 결말은 계약 상호 해지.

아드리아누는 거액의 위약금을 받고 유유히 브라질로 돌아갔다.

흠, 인생을 저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지만...

물론 인테르에는 아드리아누 말고도 에르난 크레스포나 훌리오 크루스 같은 뛰어난 공격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라티 구단주는 잘 알려진 ‘공격수 성애자’.

현재 공격진에 만족하지 못하고 추가적인 스트라이커 영입을 원했다.

그때 포착된 게 잉글랜드를 아그작아그작 씹어먹고 있는 천재 스트라이커, 정백강이었고.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합류로 인해 인테르가 전 유럽을 통틀어도 첫손에 꼽힐 만한 초강력 공격진을 보유하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의 이적을 덮을 만한 빅 이벤트가 ‘빵’하고 터졌다.

* * *

[인테르, 주제 무리뉴 감독 선임]

[모라티 구단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한 결정”]

[로베르토 만치니 ‘리그 우승 하고도...’ 쓸쓸한 퇴장]

나야 이미 알고 있었던 미래지만, 이 소식이 축구계에 미친 파장은 상당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적수가 없는 전력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인테르와 ‘스페셜 원’의 만남이었으니.

뭐,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정이 묘하게 겹쳐서 나의 입단식과 무리뉴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을 같은 날 진행하게 되었다.

덕분에 인테르의 홈구장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는 인산인해.

무려 7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제는 나도 전 세계가 알아주는 스타.

입단식에서 아마추어스러운 리프팅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정백강!!! 정백강!!! 정백강!!!”

오늘 왔는데 이름도 정확하게 발음해 주신다.

2002년 월드컵에서의 악연 때문에 걱정하는 마음이 적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는 분위기였다.

하긴, 그 거금을 주고 모셔온 선수인데...

무리뉴 감독이 내게 건네준 유니폼에는 10번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 아드리아누가 쓰던 백넘버다.

포츠머스에서 쓰던 12번을 계속 쓸 마음도 있었지만, 인테르의 주전 수문장이자 브라질 국가대표 골키퍼이기도 한 줄리우 세자르가 이미 사용 중이었다.

전통적으로 10번은 ‘기술자’들이 많이 다는 번호긴 한데...

뭐, 어떻게 보면 헤더도 기술 아니겠는가.

성대한 입단식이 끝나고 기자회견장으로 이동.

취재진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EPL 득점왕과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장이 한 자리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삿거리는 없으리라.

먼저 기자들의 타깃이 된 건 나였다.

- 인테르에 온 소감이 어떤가?

“이 세상의 모든 축구선수들은 명문 구단에서 뛰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오늘 나는 그 꿈을 이뤘고, 그래서 행복하다.”

기자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나의 유창한 이탈리아어 때문.

아무리 생각해도 헤더보다 이게 더 사기 능력인 것 같아.

한국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가 한국어를 잘하면 괜히 호감도가 확 올라가지 않던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한결 온화해졌다.

- 이탈리아어가 굉장히 유창한데?

“축구는 자기 혼자 잘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스포츠가 아니다. 팀원들과의 의사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국어 공부는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 왔다.”

거짓말이지롱.

- EPL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세리에는 또 다른 무대다. 이탈리아 축구에 적응해야 하는데?

“잉글랜드는 굉장히 역동적이고 빠른 축구를 구사한다. 그와 비교하면 이탈리아는 보다 전술적인 움직임이 강조되며 특히 수비 완성도는 매우 높다. 그러나 결국 큰 틀에서 보면 둘 다 축구다. 한국에서 흔히 쓰는 표현 하나를 소개하겠다. ‘축구는 결국 잘하는 선수가 잘한다’는 것이다. 내게도 이 말이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기대되는 경기가 있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밀란 더비다. 반드시 승리하겠다.”

- 이번 시즌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스트라이커에게 목표는 항상 골 아니겠는가. 득점왕이 목표다.”

이어진 무리뉴 감독에게도 전반적으로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질문이 쏟아졌는데, 순간 나의 귀를 확 사로잡은 질문 하나가 있었다.

- 현재 인테르의 스쿼드를 보면 공격진이 포화 상태다. 어떤 식으로 운용해 나갈 생각인지?

그래요, 감독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주전급 스트라이커만 네 명입니다, 네 명.

난감한 질문일 수 있었지만 무리뉴 감독의 답변에는 거침이 없었다.

“좋은 선수가 많다는 건 감독 입장에서 축복이다. 이번 시즌에 우리 팀이 뛰어야 할 경기가 몇 개인지 아는가? 주요 대회 3개만 해도 56경기나 된다. 가진 자원을 최대로 가용해야 겨우 치를 수 있는 수준이다.”

56경기요? 감독님?

그렇게 많아요?

설마...

- 지금 그 발언의 뜻은...

“맞다. 이번 시즌 우리 팀의 목표는 트레블이다.”

* * *

[무리뉴 취임 일성, “이번 시즌 트레블 노린다”]

[자신감 넘치는 발언의 배경은?]

[‘스페셜 원’이 걸어온 역사와 인테르의 미래]

역시 무리뉴 감독은 타고난 이슈메이커였다.

어지간하면 감독이 선수 이기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덕분에 내 관련 기사는 소박한 규모로 나갔다.

끄응...

감독이 내지른 원대한 목표에 호응하듯 이적 소식이 끊임없이 터졌다.

아무래도 모라티 구단주가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로마에서 알렉산드로 만시니(208억 원).

포르투에서 히카르두 콰레스마(297억 원).

루이스 피구의 은퇴가 임박함에 따라 윙어 보강은 필수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영입한 선수들의 면면이...

결말을 알고 있는 내게는 하나같이 말리고 싶은 ‘돈지랄’이었지만, 이것 참.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만시니는 성폭행...

에이, 여기까지 하자.

이처럼 안타까운 케이스도 있었지만 반가운 이적도 있었다.

포츠머스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설리 문타리가 인테르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다.

이적료는 256억 원.

이미 나를 팔았기 때문에, 핵심 멤버인 문타리까지도 넘길까 싶었지만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구단의 재정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었나 보다.

역시 손절은 탁월한 선택이었나.

미드필더진에 나를 잘 아는 선수가 버티고 있다는 건 공격수 입장에서 아주 든든한 이야기.

올해도 잘 부탁해, 타리야.

거듭 얘기하지만, 문타리가 나보다 두 살 형이다.

이상하게 문타리한테는 형 소리가 잘 안 나온단 말이지.

생긴 게 너무 귀여워서 그런가?

* * *

인테르 1군의 첫 훈련 날.

원래 그렇게 부지런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인데, 설레서 그런지 나머지 새벽에 깼다.

더 자려고 했지만 정신이 말똥말똥.

그리하여...

결국 훈련장에 1등으로 도착해 버렸지 뭐얌.

나의 새로운 애마, 페라리 F430 쿠페를 타고 말이지.

그렇다, 나는 이제 페라리를 끄는 남자.

축구를 하길 정말 잘했다.

트럭에 치인 건 더 잘했고.

나에 이어서 2등으로 도착한 건 문타리였다.

두리번거리던 문타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방실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짜식, 긴장했구나?

야, 나두...

마치 포츠머스로 돌아온 것처럼 둘이서 가볍게 몸을 푸는 사이 인테르의 1군 멤버들이 속속 도착했다.

포르투갈의 전설이자 2000년 발롱도르 위너인 루이스 피구.

아스널 무패우승의 주역이자 EPL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혔던 파트리크 비에이라.

인테르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이며 위대한 주장이기도 한 하비에르 사네티.

앞으로 한국 팬들에게 ‘오른쪽’이라 불리게 될 마이콘.

그리고...

“정백강! 반가워! 네 플레이는 아주 인상 깊게 봤다고!”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포옹해 오는 거친 매력의 스웨덴 사나이.

지난 시즌 팀 내 득점 1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까지.

화려하다, 화려해.

포츠머스에도 훌륭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들이 몇 있었지만, 여기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역시 명문은 명문이야.

이윽고 이 스타들을 지휘할 무리뉴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도착했나?”

기자회견 때도 느꼈지만 카리스마가...

어후...

확실히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주장인 사네티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한 명이... 아, 저기 오네요.”

일동의 시선이 꽂힌 곳에 여유롭게 걸어오는 길쭉한 생명체가 있었다.

마리오 발로텔리!

어릴 때도 보통은 아니었구나, 너.

이탈리아 사람인 걸 감사하게 생각하거라.

한국이었으면 넌...

* * *

“오늘 저녁에 바빠?”

첫 훈련을 무난하게 마무리하고 들어가는데 사네티가 말을 걸어왔다.

“아뇨, 그럴 리가요.”

‘사주장’께서 먼저 다가와 주신 데 감격한 나머지 대답이 이상하게 나갔다.

나의 황당한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평정을 찾는 사네티.

역시 노련하시군.

“특별한 일 없으면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데.”

“영광입니다, 무조건 갈게요.”

“좋아, 그런데 이탈리아어 정말 잘하네. 발음도 완벽하고.”

“하하, 쑥스럽네요. 다 노력의 결과죠.”

가끔 나도 나의 뻔뻔함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나와 같이 초대된 동료들은 문타리, 콰레스마, 그리고 만시니였다.

모두 이번 시즌에 새로 이적해 온 선수들.

적응을 돕기 위한 주장의 따뜻한 배려였다.

“집이 정말 좋네요!”

초대를 받았으면 우선 칭찬으로 시작하는 것이 세상 사는 지혜.

그런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멋진 대저택이었다.

역시 밀라노 유지는 달라...

“자, 다들 들어와.”

정원 구경을 마치고 들어가니 널찍한 실내가 일행을 반겨 주었다.

쓸데없는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인테리어가 집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했다.

전반적인 콘셉트 컬러는 ‘블루’.

누가 인테르 선수 아니랄까봐.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멋들어지게 조리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우리를 불렀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요리사 까밀로 씨야. 원래 손님들 초대하면 아내가 요리를 주로 하는데 오늘 아이들 데리고 장모님을 뵈러 가서...”

사정을 설명하는데 사네티 주장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린다.

“인사를 좀 시키면 좋은데 오늘 거기서 자고 온다네. 아쉽게 됐어, 참.”

표정 관리가 힘드시군요.

마음껏 웃으셔도 됩니다, 주장.

같은 남자 아니겠습니까.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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