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5화 (16/176)

15화

“백강, 잠깐 얘기 좀 할까?”

무리뉴 감독의 호출.

어? 이 장면 뭔가 익숙한데...

포츠머스에 있을 때 해리 레드냅 감독이 나를 이렇게 불렀었고, 일련의 훈련이 이어진 후 센터백 정백강은 스트라이커로 다시 태어났었다.

설마 또 포지션 변경은 아니겠지요, 감독님.

무리뉴 감독이 나를 끌고(?) 간 곳은 의외의 장소, 비디오 분석실이었다.

“자, 같이 볼까?”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것은 이틀 전 있었던 세비야와의 친선경기.

전반 27분 터진 나의 헤더골로 1-0 승리를 거뒀었다.

칭찬해 주시려는 거예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반전만 뛰었기 때문에 한 시간도 안 되어 내 파트(?)는 끝이 났다.

“다시 한 번 보지.”

음...

감독님은 아무 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다.

내가 뭔가 깨닫길 바라는 것 같은데...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또 전반 종료.

“세 번은 봐야지?”

감독님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걸까.

삼세번이라니.

3회차 복습까지 마쳤다.

“백강?”

“네, 감독님.”

“뭘 느꼈지?”

으... 이렇게 뜬구름 잡는 질문이 제일 싫다.

보기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역시 감독님의 전술은 굉장하다는 것...?”

아부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무리뉴 감독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다른 건?”

그 와중에 부정은 안 하시네요, 감독님.

저랑 캐릭터가 좀 겹치는 듯합니다.

“음...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겠지? 자, 이건 네 전반 기록을 정리한 차트다.”

서류철 하나를 내미는 무리뉴 감독.

어디 보자.

슈팅 2개, 유효슈팅 1개에 1골.

헤더 시도 6회, 헤더 성공 6회.

100%잖아? 역시는 역시군...

“자, 어때?”

어때는 뭐 어때요.

잘했는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진짜.

내가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무리뉴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볼터치 횟수를 한 번 볼까?”

7번... 아... 그렇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내가 말하려던 걸 이해했나.”

“네, 감독님. 알 것 같습니다.”

“포츠머스 시절에도 그랬지만 백강, 너는 헤더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은 선수야. 물론 그 능력만큼은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지. 아마 머리로만 따지면 세계 넘버원이란 칭호가 합당할 거야.”

하하, 그렇습니다.

제가 1인자지요.

“그러나...”

맞아, 나 지금 지적받는 중이었지...

정신 차리자.

“헤더로 골이나 어시스트를 기록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보이질 않는다는 게 문제야.”

감독님의 이야기에는 나도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측면 공격이 막혀서 크로스가 올라오지 않거나 높은 볼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존재감이 한없이 추락하곤 했다.

맞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타켓터들은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백강, 내가 너에게 미션을 하나 주겠다.”

갑자기 미션이라니요?

“반 니스텔루이, 다비드 트레제게, 그리고 디디에 드록바. 이 세 선수가 출장한 경기를 구할 수 있을 만큼 다 구해서 보도록 해. 구단 측에 얘기를 해놨으니 도움을 받으면 될 거야. 단, 대충 보지 말고 꼼꼼하게 보도록. 기한은 1주일이다.”

* * *

원래도 단조로웠던 나의 이탈리아 생활은 한층 더 피폐(?)해졌다.

훈련 후 경기 시청, 자고 일어나서 또 훈련 후 경기 시청.

이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축구 보는 게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란 것.

무리뉴 감독의 지시대로 ‘꼼꼼히’ 보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걸 업으로 삼고 있는 비디오 분석관들에 대해 존경심이 생긴 건 덤.

반니, 트레골, 드록신.

왜 콕 찍어서 이 세 명이었을까.

처음에는 좀 의아하기도 했다.

내 최대 강점은 헤더인데, 그쪽 분야 타짜들로는 체코의 얀 콜러나 독일의 올리버 비어호프 같은 선수들이 더 유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나는 파악하고야 말았다.

‘스페셜 원’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말이다.

데니스 베르캄프처럼 유려한 트래핑을 못해도,

마이클 오언처럼 빠른 스피드가 없어도,

호나우두처럼 수비를 벗겨낼 드리블은 꿈도 못 꾸더라도,

내가 공격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무리뉴 감독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감독님! 제게 하려던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밤늦게야 답장이 왔다.

-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중요한 법이지. 다음 훈련부터 바로 맹연습 들어갈 거니까 각오하도록.

* * *

무리뉴 감독이 원했던 해답은 바로 포스트 플레이였다.

물론 포츠머스에서 뛰던 시절부터 내가 해온 것도 당연히 포스트 플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수준은...

뭐랄까,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이나 초급 수준 정도?

그냥 압도적인 점프력과 헤더 스킬을 이용해서 흉내만 냈다고 봐야겠지.

나의 스승이 된 3인방, ‘반트드’는 달랐다.

한국 팬들이 흔히 ‘등딱’이라고 부르는 기술에 굉장히 능해서, 높은 볼이든 땅볼이든 애매한 볼이든 상관없이 받아내서 키핑한 후 다시 동료에게 내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받고-주고’ 다음에 이어지는 움직임.

리턴 패스를 성공적으로 준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빠르게 침투하면서 상대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버리는 장면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플레이가 바로 저거란 말이지?

벅찬 마음으로 맞은 첫 특별훈련.

무리뉴 감독은 굉장히 흥미로운 교수법을 들고 나왔다.

“백강, 에르난 훈련하는 것 좀 도와줘. 수비 코치 훈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원래 센터백 출신이잖아? 신체 조건도 에르난하고 비슷하고.”

크레스포의 훈련 파트너로 나를 낙점한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감독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종합적인 능력치로 보면 단연 즐라탄이 최고겠지만, 포스트 플레이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크레스포가 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스트라이커였다.

그렇다고 해서 포지션 경쟁자인 나에게 “기술 전수해”라고 말하는 것도 좀 꺼림칙한 노릇이니, 자연스럽게 보고 배울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준 것이다.

무리뉴 이 양반, 퍼거슨 못잖은 여우였잖아?

신장, 체중 모두 내가 좀 더 우위에 있었지만 크레스포의 등딱을 밀어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느낌은... 어딘가 익숙한데...

그래, 맨유전에서 카를로스 테베즈를 막을 때 바로 이런 기분이었어.

루이스 피구가 깔아 찬 공을 받아서 다시 내주고, 돌아 들어가면서 패스 받아 쾅, 골.

완벽하다.

내가 영상에서 수없이 보던 그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백강, 진짜 수비수 출신 맞아? 너무 허술한 거 아냐?”

크레스포가 씨익 웃으며 나를 도발했다.

“에이, 그 정도는 나도 하지. 바꿔서 해볼까?”

“그래 붙어 보자구. 내가 수비도 웬만큼 한다니까?”

머릿속에서 수만 번 시뮬레이션했던 장면, 그러나 나의 등딱은 영 시원치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백강? 무게중심이 너무 높잖아!”

무게중심이 문제였구나.

더 낮게...

“팔은 장식품이 아냐! 몸만으로 자리를 잡는 데는 한계가 있어! 이거, 헤더만 잘하지 기본이 하나도 안 돼 있네. 그래가지고 나한테 이길 수 있겠어?”

오늘 영업비밀 다 나오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스포 형.

나중에 밥 한 번 살게요.

* * *

2008년 8월 24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세리에 A 개막 전 가장 큰 경기라고 할 수 있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가 그 성대한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매치업은 지난 시즌 세리에 A를 제패한 우리 팀 인테르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거머쥔 로마.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이탈리아 땅을 밟은 거물 공격수 정백강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제기랄.

믿었던 무리뉴 아저씨가 투톱이 아닌 원톱 전술을 들고 나온 것이다.

나를 제치고 최전방에 위치한 선수는 즐라탄.

쳇, 즐라탄이면 인정하긴 한다만 그래도 후보라니!

영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무리뉴 당신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 내 이적료가 얼만 줄 알아?”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나랑 같은 팀에서 나보다 한참 싼 이적료로 적을 옮긴 문타리는 선발 명단에 포함되어 멋지게 입장하고 있었다.

친구야, 네가 잘 되는 건 좋지만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 없구나.

그래도 잘해라.

우리는 자랑스러운 포츠머스 맨 아니겠니.

상대 팀 벤치에서는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란체스코 토티가 루치아노 스팔레티 감독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이거, 각 팀을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가 빠졌으니 관중들의 실망이 크겠는걸?

킥오프.

오늘 원래 포지션이 아닌 센터백으로 출장한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수비 진영에서 오른쪽 측면을 향해 긴 패스를 날렸다.

공이 꽤 높았음에도 훌쩍 몸을 날려 오른발로 완벽하게 공을 받아내는 피구.

클래스가 느껴지는 트래핑이다.

내년에 은퇴한다고 이미 발표한 상태인데, 아쉽다.

조커로라도 몇 년 더 뛰시지.

전성기 같은 폭발적 스피드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상대 타이밍을 뺏는 노련한 드리블로 욘 아르네 리세를 벗겨낸 피구가 속도를 죽이지 않고 주특기인 러닝 크로스를 시도했다.

그러나 즐라탄보다 한발 앞서 헤더로 공을 걷어내는 필립 멕세스.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리뉴 감독을 째려보게 되었다.

저것 보라구요, 감독님.

나였으면 골이었다니까?

물론 그는 내게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지만...

공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한 문타리가 자리를 선점하면서 공 소유권을 금방 다시 가져왔다.

흠... 타리 움직임 좋은데?

이번에는 왼쪽 측면 공략.

알레산드로 만시니가 바로 직전 시즌까지 로마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 마르코 카세티를 상대로 자신 있게 일대일.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쉽게 제쳐지지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뚫지도 못했다.

대치 상황에서 변수를 만든 건 또 한 번 문타리.

만시니에게 수비진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왼쪽 측면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타이밍 좋게 들어가는 스루패스.

뻐엉-----

각이 없어 보였지만 문타리는 과감하게 슈팅을 노렸다.

깜짝 놀라 쳐내는 도니 골키퍼.

코너킥이 선언되었다.

아니, 타리 약 먹었나.

왜 저렇게 잘해?

키커로 나선 피구 형님의 코너킥이 날카로운 각도로 날아들었지만 이번에는 멕세스의 센터백 파트너인 주앙이 헤더로 우리 공격을 끊었다.

속이 탄다, 속이 타.

벌써 두 골 날아갔네.

확실히 홈이라 그런지 경기 분위기는 우리가 주도해 가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높은 점유율에 비해 유효슈팅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게 문제.

로마의 4백은 최고조의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바로 앞에서 수비진을 보호하는 게 월드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인 다니엘레 데 로시였으니...

결국 득점 없이 0-0으로 전반전을 마쳐야 했다.

휘슬이 울리는 순간, 무리뉴 감독이 멋있게 휙 돌아서며 나를 불렀다.

“백강, 준비해. 후반전엔 나간다.”

드디어 왔다!

보여줄게요, 완전히 달라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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