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받아주고 들어가고, 리턴 쾅!, 받아주고 들어가고, 리턴 쾅!’
“백강,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려?”
이런, 문타리에게 민망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지 트레이닝 중이었는데...
“아무것도 아냐. 근데 너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인다?”
“나야 항상 최고지.”
타리야, 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다들 나를 닮아가는 건가.
나와 교체된 선수는 미드필더 데얀 스탄코비치.
무리뉴 감독은 중원 숫자를 줄이고 공격에 더 힘을 실었다.
이로써 정백강-즐라탄이라는 정신 나간 투톱 조합이 완성되었다.
기대에 찬 관중들의 함성 속에 후반전 킥오프.
다니엘레 데 로시가 공을 잡고 패스 뿌릴 곳을 찾았다.
어딜 건방지게!
내가 잡아먹을 기세로 달라붙자 데 로시가 당황하면서 골키퍼에게 길게 백패스를 했다.
이게 바로 감독님이 내린 오늘의 미션 중 하나, ‘데 로시 봉쇄 작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심지어 미래에도.
그동안의 경력을 볼 때 무리뉴 감독의 전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공격수의 수비 참여를 중시한다는 것.
인테르에 와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 데 로시가 아무것도 못 하게 철저히 묶어 버려.
누가 뭐래도 데 로시는 로마 중원의 핵심 중의 핵심.
데 로시를 어느 정도 제어한다면, 로마의 볼 흐름에 엄청난 지장을 줄 수 있었다.
안드레아 피를로가 박지승 선배한테 호되게 당한 것처럼, 너에게도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주마.
물론 퍼거슨 영감의 ‘대(對) 피를로 상대법’은 2년 후 이야기긴 하다만...
계속되는 나의 밀착 마크에 짜증이 났는지 데 로시가 직접 드리블 돌파를 시도해 왔다.
짜식이?
이 형님이 수비력으로 잉글랜드 진출한 사람이야.
다리를 쭉 뻗으며 교과서적인 스탠딩 태클로 공만 깨끗하게 따냈고, 루즈볼은 마침 근처에 있던 즐라탄의 품에 안겼다.
로마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턴오버.
“여기!”
오늘 최고의 폼을 보여주고 있는 문타리가 손을 번쩍 들면서 우왕좌왕하는 상대 수비진 사이로 침투.
즐라탄의 스루패스가 정확하게 문타리의 발 앞으로 연결되었다.
골키퍼 나오는 거 보고 침착하게 깔아 찬 슈팅이 참 얄밉게도 또르르 굴러가 로마의 골문을 흔들었다.
후반 11분 터진 문타리의 데뷔골, 어시스트는 즐라탄.
아... 뭐야...
이거 나도 0.2골 정도는 공헌한 거 아니냐?
그래도 축하는 한다, 타리야.
대신 다음번엔 나 좀 도와주라.
* * *
선제골의 기쁨은 채 10분을 가지 못하고 끝났다.
후반 20분.
최전방까지 올라온 풀백 욘 아르네 리세가 시도한 크로스가 미르코 부치니치의 헤더골로 연결되었다.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잘못된 위치 선정이 문제였다.
원래 미드필더지만 수비수들의 줄부상으로 인해 제 포지션이 아닌 센터백으로 출장한 캄비아소.
전반전에도 몇 차례 불안한 모습을 연출했었는데, 기어이 실점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누굴 탓하겠는가.
항상 그놈의 부상이 문제지.
들끓던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역시 로마는 저력이 있는 팀.
지난 시즌에서도 막판까지 우리 인테르와 리그 우승을 다투다가 승점 3점 차로 아깝게 무릎을 꿇은 전적이 있었다.
경기가 생각한 대로 흐르지 않자 무리뉴 감독이 선수 교체를 통해 활로를 찾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지친 기색이 완연한 루이스 피구 형님을 불러들이고, 마리오 발로텔리를 투입했다.
발로텔리의 나이는 겨우 만 18세.
한국이라면 수능 준비하고 있을 나이에 빅클럽 1군 멤버라니.
애가 망나니 기질이 좀 있어서 그렇지, 재능 하나만큼은 진퉁임에 틀림없다.
‘젊은 피’가 수혈되자 우리 팀 공격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혈기를 주체할 수 없는 듯, 발로텔 리가 좌우 중앙을 가리지 않고 빨빨거리며 뛰어다니며 어그로를 끄는 통에 우리 미드필더들의 운신 폭이 확연히 넓어졌다.
그리고 후반 34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오른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발로텔리가 화려한 발재간을 선보이며 리세의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타이밍 맞춰 필립 맥세스에게 ‘등딱’을 시전하는 나.
급하게 백업을 오는 데 로시의 모습을 흘끗 확인한 발로텔리가 내 오른발 앞으로 땅볼 패스를 연결했다.
에르난 크레스포와 수백 번 몸을 부벼가며 연습했던 바로 그 상황.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 것까지 포함하면 수십만 번은 족히 되리라.
‘받아주고.’
안정적인 트래핑과 키핑.
‘들어가고.’
가속 받아 짓쳐 들어오는 발로텔리에게 패스를 내준 후, 빙글 돌아 사선으로 침투하며 상대의 오프사이드 라인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리턴.’
발로텔리가 돌아 들어가는 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절묘한 스루패스 연결.
‘쾅!’
오른발등에 제대로 얹힌 공이 골문 좌측 상단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 * *
[인테르, 2-1로 로마 꺾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이적생의 대활약’ 설리 문타리 선제골, 정백강 결승골 기록]
[첫 트로피 품에 안은 무리뉴, “이제 시작일 뿐”]
확실히 이번 생은 다르다.
이렇게 잘 풀려도 되는가 싶다.
훈련했던 그 상황이 기가 막히게 딱 나와서 골을 넣고, 우승을 결정짓다니.
소설로 써도 욕먹을 상황 아닌가.
“생각보다 훨씬 습득이 빠른데? 솔직히 놀랐어.”
감독님의 칭찬은 보너스였다.
내가 지난 시즌 잉글랜드에서 넣은 골은 모든 대회 통틀어 47골.
그중에서 발로 넣은 건 고작 3골에 불과했다.
비율로 하면 6%대.
좋았어, 이번 시즌에는 20% 이상을 한 번 노려보자.
수페르코파 우승으로 2008-2009 시즌을 상큼하게 출발한 우리 팀은 리그 개막전인 삼프도리아 원정, 홈 첫 경기인 카타니아전을 모두 무실점으로 승리하며 2연패 도전에 청신호를 켰다.
무리뉴 감독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받은 나는 두 경기 모두 선발로 출전하여 삼프도리아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으며, 카타니아전에서는 크레스포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수비의 이탈리아’, ‘카테나치오’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이 정백강님의 무자비한 머리 앞에서는 답을 찾지 못하는구먼, 껄껄껄.
적응기도 뭣도 없이 인테르의 핵심 공격수가 되어 버린 나는 역사적인 경기를 치르기 위해 아테네 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 중 하나인 파나티나이코스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이 경기가 왜 역사적이냐고?
왜긴 왜야, 나의 챔스 데뷔전이니까 그렇지.
내가 왜 리버풀의 이적 제의를 거절했던가.
바로 챔스에서 뛰기 위해서였다.
EPL도 세리에도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대회지만, 챔스의 권위는 남다른 데가 있지 않은가.
인테르 VS 파나티나이코스.
전력으론 확실히 우리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원래 수비적 성향이 강한 무리뉴 감독은 원정임을 감안하여 4-5-1 같은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절정의 경기력을 과시하고 있는 나는 당연히 선발로 출전.
이 말인즉슨?
천하의 즐라탄이 후보란 말씀이다.
나한테 밀려서!
미안하게 됐어요, 라탄이 형.
그러나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쇼.
언제나 첫경험은 설레는 법.
이제 큰 경기 경험이 적지 않은 편인데도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이것이 챔스의 느낌이구나.
잘하자, 백강아.
오늘 공격진에서 나와 호흡을 맞출 윙포워드는 나의 입단 동기라 할 수 있는 히카르두 콰레스마와 알렉산드로 만시니다.
리그 경기에서는 그닥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두 사람.
형만 믿어, 일단 올리면 넣어 줄 테니.
킥오프.
파나티나이코스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휘슬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공 가진 선수를 압박하러 뛰어다니는 나.
이는 무리뉴 감독이 왜 즐라탄이 아닌 정백강을 선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기도 했다.
축구에서 ‘수비력’이라는 능력치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가?
피지컬도 중요하고, 스킬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마인드’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본업이 수비가 아닌 포지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데뷔 때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팀 공격의 핵심 역할을 했던 즐라탄에게, 악착같이 들러붙는 수비 마인드를 주입한다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내려와서 수비 가담을 하더라도 그저 적당히 흉내나 내는 수준이지, 팀에 유의미한 수비력 증강 효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프로가 되기 전부터 축구 인생의 대부분을 센터백으로 지내오지 않았던가.
뛰는 위치만 최후방에서 최전방으로 바뀌었을 뿐, 감독이 지시만 내리면 언제든 수비에 나설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선수란 말씀이다.
거기다가 득점력도 절대 즐라탄 못지 않으니...
공수 밸런스를 잡아야 하는 경기에서 즐라탄보다 내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파나티나이코스를 상대로 무리뉴 감독이 들고나온 전술은, 역삼각형으로 세운 3미들의 선수 구성만 봐도 명확했다.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4백을 보호하고, 그 위에는 파트리스 비에이라와 하비에르 사네티가 박스 투 박스로 공수에 참여하는 시스템.
기술이나 창의성보다는 상대 공격을 차단하고 공을 탈취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 아닌가.
후방 지역에서 공을 끊어낸 뒤 발빠른 윙어들을 이용해 역습을 펼치겠다는 게 무리뉴 감독의 복안.
그리고 전반 17분, 이 그림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장면이 나왔다.
질베르투 실바가 시도한 느슨한 전진 패스를 후방에서 ‘갑툭튀’한 캄비아소가 끊어냈고, 캄비아소는 다시 비에이라에게 공을 넘겼다.
비에이라의 선택은 오른쪽 측면.
지체 없이 시도한 롱패스를 콰레스마가 받아냈다.
상대 수비진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태.
‘UCC 스타’ 콰레스마가 자신감 있게 일대일.
통통 튀는 리듬의 드리블로 전진하며 상대 센터백과 풀백을 동시에 달고 중앙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인테르의 ‘오른쪽’ 마이콘은 그런 틈을 놓치는 선수가 아니었다.
평범한 플레이도 화려하게 하는 콰레스마가 인상적인 노룩(No Look) 땅볼 패스를 마이콘의 발 앞에 떨궈주었다.
실속은 모르겠다만 멋있긴 하네...
콰레스마가 길을 닦아준 덕분에 장애물이 전혀 없는 공간에 홀로 선 마이콘이 1.2초 정도 여유를 둔 후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월드클래스 풀백의 크로스 각이란...
말해 뭐하겠는가.
너무 날카로워서 손을 갖다 대면 베일 것만 같다.
콰앙-----
굉음을 내며 날아간 나의 헤더슛은 아쉽게도 마리오 갈리노비치 골키퍼의 정면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정면이라도 골문 인근에서 내려찍은 나의 헤더를 잡아낸다는 것은 언감생심.
펀칭으로 쳐낼 수밖에 없었고, 공은 부메랑처럼 나를 향해 다시 날아왔다.
자비 없이 작렬하는 두 번째 헤더슛.
그리고 오늘 컨디션 최상인지 몸을 날리며 환상적인 선방을 보여주는 갈리노비치.
“공 살아 있어!”
갈리노비치가 넘어진 상태에서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두 번이나 막아낸 걸 칭찬해 주마.
그런데 그거 아니?
한국인은 삼세번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