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인테르, 파나티나이코스 2-0 격파!]
[팀의 두 골 모두 책임진 정백강, 경기 MOM 선정]
[“정백강, 아직 발전할 여지 많아... 무한한 가능성 가진 선수” 무리뉴의 특급 칭찬]
나의 유럽 무대 데뷔전은 환상적인 결말로 끝났다.
특히 세 번의 헤더를 통해 기어이 득점한 첫 번째 골은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챔피언스리그에 나올 정도 수준의 수비수들을 병풍처럼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높이와 믿을 수 없는 파워의 헤더.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화려한 발재간이나 호쾌한 중거리슛과는 또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한국의 모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호골메드정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호날두는 골을 넣고 메시는 드리블을 하며 정백강은 헤딩을 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감을 잡고 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펼쳐진 리그 경기에서 토리노와 레체를 상대로 두 경기 연속골.
총 3골로 제노아의 디에고 밀리토와 함께 리그 득점 공동 선두 자리에 올라섰다.
다른 나라에 비해 수비를 중시하는 이탈리아의 전술 특성상 상대 수비진이 페널티박스 안으로 완전히 내려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히려 나에게는 ‘땡큐’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오프사이드 걱정 없이 골문 근처에서 헤더골을 노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회귀하기 전의 역사에서는 인테르에서 ‘폭망’했던 히카르두 콰레스마와 알렉산드로 만시니는 나를 만난 덕분에 어시스트 스탯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었다.
크로스를 아무리 개떡같이 올려줘도 찰떡같이 넣어주니 얼마나 축구하기 편하겠는가.
우리 윙어 분들 인간적으로 나한테 밥 한 번 사야 되는데, 아직 소식이 없으시네요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전반적으로 순항 중인 팀이었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도 있었다.
지난 시즌까지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던 즐라탄의 초반 페이스가 영 좋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네 경기를 치렀건만, 아직까지 리그에서 무득점에 그치고 있었다.
온더볼 플레이에 능하고 플레이 메이킹이 가능한 공격수라는 게 즐라탄의 최대 장점 아니겠는가.
조합상 즐라탄의 투톱 파트너로는 발 빠르고 라인 브레이킹을 잘하는 선수가 딱이었으니, 아무래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입장을 반대로 놓고 봐도 마찬가지.
포츠머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벤자니처럼, 빨빨거리며 오프더볼 무브를 잘 가져가는 스타일과 함께 뛸 때 나의 머리는 한층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즐라탄에게 그런 움직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
차라리 에르난 크레스포나 훌리오 크루스가 훨씬 나와 잘 맞았다.
팀 내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두 스트라이커가 전혀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무리뉴 감독 입장에서도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한국 팬들에게는 ‘밀라노 더비’라는 말로 더 익숙한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는, 이렇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 * *
이 분위기 어쩔.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봤는가.
러셀 크로우가 아마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분위기는, 축구장이 아니라 그 옛날 노예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던 콜로세움 같았다.
아직 경기 시작도 안 했는데, 관중석 분위기는 전쟁 일보 직전.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주고받는 욕설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역시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배출한 나라답다...
우리 응원석에는 ‘등신 같은 밀란 놈들’, 밀란 응원석에는 ‘인테르 엿먹어라’는 취지의 대형 피켓이 걸려 있었다.
아니, 저런 건 반입 금지 안 하나?
그나저나 오늘... 무사히 나갈 수 있겠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점만 제외하면, 기분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 눈앞에 브라질 축구의 리빙 레전드가 둘이나 서 있으니.
카카와 호나우지뉴가 그 주인공들이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이들과 같은 경기장에서 뛴다는 건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다.
끝나면 둘 중 누구랑 유니폼 교환한다지?
아, 그 전에... 아무리 살벌한 경기라도 유니폼 교환은 할 수 있겠지?
경기 전 예상에서는 우리의 우세를 점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이탈리아 축구계를 발칵 뒤집었던 대형 스캔들 ‘칼치오폴리’의 여파와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 등으로 밀란은 예전의 영광을 점점 잃어가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칼치오폴리의 후속 조치로 2005-2006 시즌의 우승 자격을 박탈당한 밀란.
그들의 마지막 스쿠데토(세리에 A 우승)은 2003-2004 시즌이었다.
자업자득이지 뭐.
그러게 누가 나쁜 짓 하래?
원래 밀란이라는 팀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는데, 인테르 유니폼을 입고 보니 천하의 몹쓸 구단으로 보인다.
오오, 나 벌써 인테르 맨 다 됐네.
충성심이란 게 생겼나 봐.
그러나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
특히나 이런 더비의 경우 경기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방심은 절대 금물.
그렇다고 지나친 긴장도 절대 금물.
자, 심호흡하고, 마인드 컨트롤.
킥오프.
밀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무리뉴 감독의 비밀 지령(?)을 받고 나온 나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클라렌스 세도로프에게 달려들었다.
밀란의 에이스가 카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후방에서 중심을 잡고 공을 순환시켜주며 전방에 패스를 배급하는 세도르프의 비중 역시 어마어마했다.
수페르코파에서 다니엘레 데 로시에게 나를 붙이면서 재미를 봤던 무리뉴 감독은, 밀란을 상대로도 비슷한 전략을 들고나온 것이다.
그러나...
툭--- 탁---
젠나로 가투소와의 2 대 1 패스를 통해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나를 슉 지나쳐 버리는 세도르프.
탈압박에 꼭 화려한 개인기가 필요한 게 아님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방금 플레이는 세도르프라는 선수의 클래스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역시 명장임을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내가 세도르프에게 붙을 걸 간파하고 가투소에게 보디가드 역할을 사전에 지시해 놓은 게 분명했다.
챔스 3회 우승이 고스톱 쳐서 딴 건 아닌가 보군요, 안첼로티 감독님.
1차 저지선인 나를 손쉽게 통과한 세도르프는 수비가 붙기 전에 재빨리 카카에게 공을 넘겼다.
2007년 발롱도르 위너가 어떤 플레이를 보여줄지 긴장되는 순간, 우리 수비진 뒷공간을 노리며 로빙 스루패스를 시도하는 카카.
다음 플레이에 대한 판단이 굉장히 빨랐다.
이것이 슈퍼스타의 품격인가?
‘치달’이 워낙 유명해서 과소평가 받는 감이 있었지만 카카의 패싱과 플레이 메이킹 역시 세계적 수준임에 분명했다.
최전방에서 호시탐탐 찬스를 노리고 있던 알레산드로 파투가 우리 수비진 사이로 침투하며 논스톱 왼발 땅볼슛을 날렸다.
철썩-----
경기 시작하자마자 골을 터뜨린 파투가 관중석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가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높이 올라간 부심의 깃발.
오프사이드였다.
우우우우우-----
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일제히 내뱉는 야유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안 들어봤으면 말을 마라.
‘3대가 멸하라’는 저주를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기분이다.
우리 부심 아저씨, 끝나고 경기장 나갈 때 조심하세요.
당신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 * *
파투의 골 취소는 일종의 불씨 역할을 했다.
안 그래도 들끓던 경기 분위기가 거의 용광로 수준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뭐, 관심이 쏠리는 게임인 만큼 열기를 더해가는 건 좋은데 문제는 그 방식이 좀 과격하다는 것.
첫 타자는 예상대로(?) ‘가축소’ 가투소.
특유의 와리가리를 선보이며 공을 질질 끄는 콰레스마가 꼴 보기 싫었는지 시원스러운 슬라이딩 백태클을 시전했다.
콰레스마야, 살아 있니?
헐레벌떡 달려온 주심이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충분히 다이렉트 퇴장도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이 경기가 어떤 경긴가.
주심도 지켜야 할 가정이 있을 텐데...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기세 싸움에선 밀릴 생각이 없었다.
가투소에 대한 인테르의 대답은 파트리크 비에이라.
성깔 하면 절대 누구에게 밀리는 선수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수비 상황에서 공을 건드리는 척하면서 호나우지뉴의 정강이 쪽을 퍽 걷어찼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잔디 위에 쓰러지는 ‘외계인’.
190cm이 훌쩍 넘는 거구한테 차였으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오늘 아주 피곤한 경기가 될 것을 예감했는지 주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비에이라에게 경고를 주었다.
양 팀을 대표하는 싸움꾼 미드필더가 사이좋게 카드 한 장씩을 받았다.
이것은... 아무래도 각이다.
난투극 각이야.
중원 싸움이 하도 치열한 탓에 양 팀 모두 시원스러운 공격은 거의 시도하지 못했다.
그나마 나는 마이콘이 얻어낸 코너킥 찬스에서 헤더슛으로 크로스바를 맞추며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함께 투톱으로 나선 즐라탄은 거의 클로킹 모드였다.
가뜩이나 요즘 안 풀리는데 모두가 주목하는 밀라노 더비에서까지 부진하자, 즐라탄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패스! 패스! 제발 패스 좀 해!”
우이쒸, 혼자 힘든 줄 아나.
다들 고생하는데 왜 그래?
성질 좀 죽여 라탄이 형.
내가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건 절대 형이 무서워서가 아니야.
근데 형, 태권도 몇 단이랬지?
어쨌든 그렇게 지루한 0-0 무승부로 전반전이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전반 종료 직전 사고가 터졌다.
카카가 속도를 살린 돌파를 통해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파울을 이끌어낸 것이다.
가까스로 페널티킥은 면했으나 주심이 지정해 준 프리킥 위치는 페널티박스 바로 앞이었다.
밀란 입장에서는 천금 같은 찬스.
키커로는 호나우지뉴가 나섰다.
비록 전성기가 지나 바르셀로나 시절처럼 화려한 드리블과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킥력 하나만큼은 여전히 월드클래스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호나우지뉴였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인테르의 수비벽도 만만치 않았다.
195cm의 즐라탄, 193cm의 비에이라와 마르코 마테라치, 그리고 188cm으로 좀 왜소(?)한 편이지만 지구 최강의 높이를 갖춘 사나이 정백강까지.
삑---
휘슬이 울리고 짧은 도움닫기 이후 호나우지뉴의 오른발 킥이 작렬했다.
임팩트와 동시에 있는 힘을 다해 훌쩍 뛰어... 앗!
제대로 당했다.
호나우지뉴는 애초에 벽을 넘길 생각이 아니었다.
우와아아아아악-----
밀란 팬들 사이에서 터지는 우레와 같은 함성.
우리 수비진의 허를 완벽하게 찌른 호나우지뉴의 땅볼 프리킥이 줄리우 세자르 골키퍼의 손끝을 살짝 스치며 골망을 갈랐다.
카카가 얻어내고 호나우지뉴가 마무리.
발롱도르 위너 출신의 브라질 듀오가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골 세리머니는 클럽에서나 볼 법한 테크토닉 댄스.
귀에서 음악이 자동재생될 정도로 절도 있는 동작이 돋보였다.
저 형은 나이트 다니다가 커리어 망가졌으면서 축구장에서까지 춤을 추냐.
역시 춤바람이 제일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