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후반전 경기 양상은 단순하게 흘러갔다.
우리가 양손에 창을 든 채 달려들었고 밀란은 방패로 몸을 감싼 채 버티기에 들어갔다.
뚫느냐 뚫리느냐의 싸움.
그 와중에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카카의 존재였다.
단 한 번의 역습 찬스만 와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가 바로 카카 아니겠는가.
언뜻 보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두드려 패는 것 같았지만, 언제 등 뒤에서 비수가 꽂힐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불안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후반 17분.
즐라탄이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다가 밀란의 ‘살아 있는 전설’ 파올로 말디니의 깔끔한 태클에 공을 헌납하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 전방을 향해 롱패스를 내지르는 말디니.
때를 기다리던 카카가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후 공이 떨어지기 전에 오른발로 툭 쳐서 수비하러 온 니콜라스 부르디소의 키를 넘겼다.
클래스를 입증하는 환상적인 개인기... 아니, 감탄할 때가 아니다.
난리가 났네.
이윽고 시작된 카카의 질주.
부르디소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죽을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카카의 ‘치달’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결국 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카카의 어깻죽지를 잡고 늘어졌는데...
삑-----
지체 없이 울리는 휘슬.
쪼르르 달려간 주심이 품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색깔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쟤가 오버해서 넘어졌다니까요? 와, 환장하겠네!”
부르디소가 시뻘게진 얼굴로 주심에게 대들었다.
얼굴색이 카드보다도 더 빨갰다.
레드카드.
다이렉트 퇴장.
가뜩이나 0-1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최악의 전개였다.
“괜찮아! 아직 시간 있어. 집중하자! 한 발 더 뛰면 돼!”
하비에르 사네티 주장이 실의에 빠진 선수들을 독려했다.
음... 근데 주장...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게 문제 아닐까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절대로 기회를 놓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밀란의 졸개들이 공격적으로 치고 올라오며 점유율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외치는 듯했다.
수적 열세에 놓인 우리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밀란을 응원하러 온 팬들은 벌써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노래까지 불러댔다.
어우, 듣기 싫어.
관중석에 찬물을 확 끼얹어 버리고 싶은 열망이 끓어 오른다.
나도 메시처럼 슉슉 다 제끼고 골을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냐, 백강아.
너에겐 메시가 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높이와 헤더가 있잖아.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순간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
어쩌면 될지도 몰라...
* * *
까앙---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 울리는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와우, 진짜 X 될 뻔했다.
알레산드로 파투가 맘먹고 때린 중거리포가 오른쪽 골포스트를 맞고 라인을 벗어난 것이다.
한 명 퇴장당한 상황에서 추가골까지 먹혔으면...
그냥 게임 오버지 뭐.
부르디소의 퇴장 이후 갑자기 바빠진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골킥을 준비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한테 띄워 주세요, 형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나의 텔레파시가 전해진 것일까?
정말로 공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기회는 곧 찬스.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때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있는 힘껏 점프.
내게 붙어 있던 젠나로 가투소는 같이 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돌아가랏, 내 몸뚱아리야.
새삼 김연아 선수의 위대함을 느끼며 가까스로 공중에서 몸을 180도 트는 데 성공했다.
내 시선이 꽂힌 곳은 중앙에 위치한 즐라탄도 아니요, 좌우 측면에 서 있는 콰레스마나 만시니도 아니었다.
밀란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온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골키퍼였다.
이거, 가능하다!
점프의 최정점에서 공을 이마에 정확하게 임팩트.
콰아앙-----
잘 맞은 헤더는 소리부터 다르다.
힘을 잃지 않고 파워풀하게 쭉쭉 뻗어 나가는 공.
이 헤더의 목표 지점은 골문 안쪽이었다.
착지하고 보니 모든 밀란 선수들이 뒤로 돈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헤더로 슈팅을 시도할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페널티박스 밖까지 나와 있던 아비아티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늦었어, 짜식아.
그물을 흔드는 공.
충격적인 광경에 1.8초 정도 정적에 싸여 있던 관중석이 곧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크와아아아아아악-----
주먹을 불끈 쥐면서 오른팔을 하늘 높이 들었다.
내 딴에는 멋진 포즈를 취한다고 한 건데, 동료들이 나를 가만 놔둘 리가 없지.
“야, 미쳤어?”
“사랑한다, 백강아!”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온다!”
“무슨 거기서 헤더를... 말을 말자, 말을 말어.”
“야, 그럼 이거 세자르 어시스트인 거야? 완전 꽁으로 먹었네?”
덮치고 끌어안고 머리 쓰다듬고 난리도 아니다.
너무 붙지는 말아 주세용.
나 카메라에 잘 나와야 하니까.
* * *
[인테르 1-1 밀란, 승부 가리지 못한 ‘축구 전쟁’]
[9명 뛴 인테르, 정백강의 천금 동점골로 무패행진 이어가]
[무리뉴, “올해의 푸스카스 상은 이미 정해졌다”]
[“100% 노렸던 골, 절대 우연 아니다” 정백강의 포효]
이번 밀라노 더비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천신만고’라고 할 수 있으리라.
11 대 10 상황에서 가까스로 동점 만들어놨더니, 마르코 마테라치가 제 성질 못 이기고 카카한테 살인 태클을 시전.
경기 종료 15분 남기고 또 한 번의 다이렉트 퇴장을 당해버렸다.
그때부터는 역습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9명 모두 골문 앞에 진을 치고 무한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수비력 강화를 위해 즐라탄은 수비수 이반 코르도바와 교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교체당한 후 짜증을 엄청 냈다고...
나는 어땠냐고?
원래 센터백 출신인 데다가 공중 경합 승률 100%를 자랑하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선수였다.
마테라치 퇴장 이후 내가 걷어낸 크로스만 족히 15개.
밀란 팬들의 염원을 담아 카카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중거리포마저 빗나가면서 기어이 승점 1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경기 후 정밀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내가 성공시킨 동점골의 비거리는 무려 51.3m였다.
구단 측에서는 즉각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 참.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호들갑들인지.
다들 헤더 그 정도 하는 거 아니었어요?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골을 터뜨린 귀염둥이 정백강에게 인테르 팬들은 새로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Grande Testa(위대한 머리)’.
명색이 축구선수인데 발이 아니라 머리가 위대하다니, 처음엔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발이면 어떻고 머리면 어떤가.
위대하다잖아?
어렸을 때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위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밀란전에서 살짝쿵 삐끗하긴 했으나 곧 전열을 재정비한 우리 팀은 다시 연승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리그에서 7연승,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3연승.
도합 10연승.
경이적인 연승의 비결은 수비에 있었다.
열 경기 동안 고작 2실점밖에 하지 않은 것이다.
경기당 0.2골밖에 허용하지 않는 극강의 짠물 수비에 만나는 팀들마다 헛심만 잔뜩 쓰고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마이콘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 팀 4백 중 월드클래스라고 부를 선수는 없었지만, 무리뉴 감독이 오프시즌 동안 잘 다져놓은 수비 전술에, 사네티-비에이라-캄비아소 등 수비력이 출중한 미드필더들의 활동량이 더해지면서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문제는 오히려 공격에 있었다.
10승 중 1-0으로 이긴 경기가 무려 7경기.
수비진의 맹활약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끊겼을 연승이었다.
시즌 개막 전까지만 해도 ‘인테르 역사상 최강의 공격진’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빈공의 원인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건수 잡은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로 논란을 더욱 부추겼다.
<정백강 VS 즐라탄, 당신의 선택은?>
인테르 팬들을 대상으로 한 모 신문사의 노골적인 설문조사.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90%를 넘는 팬들이 나를 지지했다.
리그 12경기 9골로 득점 랭킹 단독 선두에 올라 있는 나와, 고작 2득점에 그치고 있는 즐라탄의 비교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슈퍼스타들 중에서도 유난히 에고(Ego)가 강한 게 바로 즐라탄.
그의 폭발은 어쩌면 예고된 것인지도 몰랐다.
* * *
“공격 전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 것이 왔다.
즐라탄과 무리뉴 감독의 충돌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나였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방법을 택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동료들이 다 듣고 있는 팀 훈련 시간에 불만을 제기할 줄이야.
이것도 ‘즐라탄스럽다’고 해야 할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무리뉴 감독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래서 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팀 공격력이 형편없는 건 팩트 아닙니까?”
라탄이 형, 왜 그래.
분위기 싸해지잖아.
사네티 주장이 즐라탄을 말리려 했지만 무리뉴 감독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금 팩트라고 했나? 팩트는 네가 이번 시즌 5골도 못 넣고 있다는 것. 그런 걸 사람들은 팩트라고 부르지.”
역시 혀리뉴.
아이고, 내가 감독님께 감히 무슨 망언을...
어쨌든 말발 하나는 세계 최강이다.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님이 팀을 지휘할 때는 제가 팀 득점 리더였지요.”
전임 감독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형, 지금 선 제대로 넘었어.
상대는 무리뉴라고.
“그 만치니가 영 시원치 않아서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됐지.”
만치니 감독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리뉴 감독의 뺨을 갈겼을지도 몰라.
만약에 말싸움에도 능력치가 있다면 100점 만점에 120점을 주고 싶다.
어떻게 저렇게 말을 싸가지 없게 잘하지?
두 사람 간에 전개되는 팽팽한 눈싸움.
체구는 즐라탄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만 무리뉴 감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더 할 말 없으면 이 얘긴 이쯤 하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는 무리뉴 감독.
휴우, 드디어 정리되는 건가?
“다음 경기에,”
아니었다.
무리뉴 감독이 발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렸다.
“제가 원톱으로 출전하게 해주십시오.”
병, 형신이야?
바로 옆에 내가 있잖아.
감독님, 이런 바보 같은 요구는 거절하실 거죠?
“좋아, 그렇게 하지.”
오케이라고?
이 사람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다.
“단, 나도 조건을 걸지. 너와 정백강이 둘 다 원톱으로 45분씩 뛴다. 전후반은 알아서들 정하도록 해. 싸움을 하든, 뽑기를 하든.”
“알겠습니다, 감독님.”
무슨 2부리그 팀하고 친선경기 하는 줄 아시나.
다음 경기 상대, 유벤투스예요 이 사람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