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정말, 감독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간만의 벤치 스타트라 그런지 기분이 좀 어색하다.
유벤투스전에서 나 대신 우리 팀 최전방을 책임지러 나간 선수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무리뉴 감독에게 부린 말도 안 되는 땡깡이 먹히면서 원톱 자리를 차지했다.
전/후반을 걸고 동전 던지기를 한 결과, 즐라탄이 전반전을 소화하게 되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내막을 모르는 유벤투스 선수들은 ‘오늘 정백강 컨디션이 별로구나’ 하겠지.
오늘 경기는 현재 리그에서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는 두 팀간의 맞대결.
우리가 11승 1무로 승점 34점으로 1위,
유벤투스가 9승 3무로 승점 30점을 기록하며 2위에 올라 있었다.
한마디로, 무지무지 중요한 경기라는 이야기다.
킥오프.
유벤투스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우우우우-----
관중석에서는 밀라노 더비 때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데르비 디탈리아’, 한국에서는 흔히 ‘이탈리아 더비’라고 부르는 인테르 VS 유벤투스와의 경기.
가뜩이나 유서 깊은 라이벌전이었는데, ‘칼치오폴리’가 터진 이후 유벤투스가 획득했던 2005-2006 시즌의 스쿠데토가 우리 팀으로 넘어오면서 양 팀 팬들의 감정싸움은 더욱더 거세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원수진 팀들이 많은 걸까.
명문들은 다 이런가?
잡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유벤투스의 살벌한 공격이 펼쳐졌다.
왼쪽 측면에서 파벨 네드베드가 띄워준 크로스를 아마우리가 날카로운 헤더슛으로 연결.
시야가 가려서 반응이 약간 늦었던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가까스로 쳐냈다.
나였으면 여지없이 골이었는데, 큭큭.
그나저나 네드베드 저 아저씨는 벌써 서른여섯인데 움직임이 20대 같냐.
나중에 기회 되면 뭐 좋은 거 드시는지 여쭤봐야겠다.
뻐엉-----
체력뿐만 아니라 킥력도 살벌하고 말이야.
엉? 뭐야?
광분하는 원정팀 응원단.
센스 있는 다이빙 헤더로 선제골을 넣은 아마우리가 기쁨에 몸부림치며 필드 위를 질주했다.
철옹성 같던 우리 수비진이 코너킥 한 방에 무너질 줄이야.
아마우리를 놓치는 바람에 실점에 기여한(?) 즐라탄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형 인생에 마가 꼈나 봐.
우리 엄마가 용한 무당 하나 아는데, 소개 좀 시켜줘?
* * *
홈 경기에서 이렇게 이른 시간대에 실점을 한다는 건 완전 예상 밖의 전개였다.
시종 여유 넘치던 무리뉴 감독도 벌떡 일어나 선수들을 독려하기 시작.
와... 저 형.
이렇게 열심히 뛸 때도 있구나.
지금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즐라탄의 모습은 참 생경한 것이었다.
상대 수비진에 적극적으로 붙으며 전방 압박을 수행하고, 미드필드 지역까지 내려와서 공을 받아주며 팀 공격의 윤활유 역할까지 자임했다.
티아구 멘데스한테 공을 뺏겼다가 악착같이 따라가서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도로 따낸 장면은 백미 중의 백미.
어느덧 리그도 3분의 1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데 즐라탄이 슬라이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저게 즐라탄이야? 박지승 선배야?
하긴,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이니.
오늘 경기를 통해 무리뉴 감독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으리라.
자신이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말이다.
발바닥에 불 난 것처럼 뛰어다니던 즐라탄은 전반 32분 드디어 노력의 결실을 얻었다.
센터 서클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렬한 회심의 아웃프런트 패스가 공간을 잘라먹으며 쇄도하던 히카르두 콰레스마의 발 앞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완벽한 시야,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세기.
품격이 느껴지는 패스였다.
역시 라탄이 형, 클래스가 있네.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가 각을 좁히기 위해 뛰쳐나왔으나, 콰레스마가 침착하게 깔아 찬 공이 부폰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다.
‘알까기’로 이번 시즌 첫 득점을 기록한 콰레스마가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배달한 즐라탄에게 달려가 안겼다.
한껏 힘을 준 거만한 표정으로 우리 벤치 쪽을 응시하는 즐라탄.
입을 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 이게, 나야.
“좀 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짓는 무리뉴 감독.
감독님, 잘 모르시나 본데 즐라탄은 원래 잘해요.
동점골로 기세가 오른 우리 팀은 한층 공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특히 콰레스마의 폼이 절정이었는데, 상대 풀백인 크리스티안 몰리나로를 거의 농락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컨디션에 따라 업 앤 다운이 심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기본적으로 출중한 개인기를 갖춘 콰레스마의 ‘그날’이 찾아올 때면 세리에의 어떤 수비수가 오더라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
오른쪽 측면을 신나게 파고들던 콰레스마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야속한 관성의 법칙에 따라 그만 넘어지고 만 몰리나로.
콰레스마가 그대로 크로스를 시도하자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기분 좋은 날에 종종 시도하는 라보나(Rabona).
평소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오늘은 뭘 해도 되는 날이었다.
공이 어여쁜 호를 그리며 즐라탄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 태!권!도!
이렇게 말했을 리가 없건만, 나의 귀에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지금 보여주는 즐라탄의 공중 동작은 분명 태권도의 그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이는 시저스 킥.
공이 그물을 꿰뚫을 기세로 골문 우측 상단에 꽂혔다.
엄청난 원더골에 유벤투스 수비진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엠블럼을 두드리며 홈 관중석으로 달려간 즐라탄이 아무 말 없이 양팔을 번쩍 들었다.
돌아왔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 * *
45분 동안 본인 커리어에 길이 남을 골과 어시스트를 동시에 기록한 즐라탄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라커룸에 들어왔다.
“잘했다, 정말 멋졌어.”
“감사합니다, 감독님.”
무리뉴 감독이 즐라탄의 어깨를 두드렸고, 즐라탄도 감사로 화답했다.
뭐지? 두 사람 왜 이렇게 쿨해?
미친 활약을 펼친 즐라탄이 먼저 도발해올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빗나갔다.
쿨한 게 아니고 태연한 척하는 건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후반전엔 즐라탄 대신 내가 출전하고, 좋든 싫든 비교를 당하게 될 예정이다.
“백강, 너도 보여줘야지?”
싱글벙글 웃는 무리뉴 감독.
쳇, 뭔가 말린 기분이다.
“물론입니다.”
호기롭게 대답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진 않다.
저 형은 오늘 약 먹고 왔나, 왜 이렇게 잘해?
즐라탄 쪽을 힐끗 쳐다봤다.
“헤... 헤이, 콰레스마. 오늘 끝내주는데?”
나는 봤다.
내 모습을 바라보던 즐라탄이 황급히 눈을 피하며 콰레스마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뭐야, 나만 의식하는 게 아니었잖아?
순간 거구의 스웨덴 사나이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 긴장이 좀 풀렸다.
좋아,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주지.
“걱정하지 마. 내가 패스 많이 넣어줄게. 그냥 두 골 콱 박아버려.”
내 곁에 다가온 설리 문타리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든든한 ‘포츠머스 라인’은 아무래도 즐라탄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괜찮아, 그냥 평소처럼 해. 내가 알아서 할게.”
EPL 득점왕의 자존심이 있지, 부당한 도움은 받지 않겠다.
“근데... 이왕 줄 거면 낮게 말고 높게. 알았지? 평소처럼 하되, 줄 거면 높게.”
됐다, 난 분명 평소처럼 하라고 했다.
그래도 패스를 준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 * *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전반에 활약이 저조했던 티아구 멘데스를 빼고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를 투입하면서 중원에 활력을 더했다.
마르키시오를 실물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와... 이게 사람이야 조각이야?
정말 더럽게 잘생겼네.
이렇게 생기고 비율이 이런 애가 유벤투스에서 뛴다고?
내가 이래서 신을 믿지 않지.
밸런스 패치 좀...
나의 푸념 속에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즐라탄 그 겁쟁이 자식 어디 갔어? 전반전에 하도 날뛰길래 후반전엔 밟아주려고 했는데.”
슬슬 긁으며 심리전을 걸어오는 조르조 키엘리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닳고 닳은 나한테 입을 털어?
“밟아주긴 뭘 밟아줘. 두 골을 그냥 헌납한 주제에. 아까 보니 아무것도 못 하더만.”
아무리 내가 라탄이 형과 라이벌 아닌 라이벌 관계라지만, 우리 팀 선수 가지고 막말하는 건 못 참는다.
팩트폭격 좀 했다고 금방 조용해지는 키엘리니.
덩치도 크고 인상도 곱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
게다가 나는 이 녀석의 본성을 알고 있다.
어릴 적 우상인 파올로 말디니한테 멱살 잡힌 것 때문에 충격받아서 눈물을 보였던 여린 심성의 소유자란 말이다.
물론 아직 그 사건은 일어나기 전이지만...
내가 세 치 혀를 놀려 키엘리니를 제압하는 사이, 우리의 든든한 ‘사주장’ 하비에르 사네티는 교과서적인 스탠딩 태클로 마르키시오의 드리블을 저지했다.
팀 스쿼드 사정상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고 있지만, 원래 풀백 출신인 주장의 수비력은 명불허전이었다.
나이스, 주장!
저렇게 세상 혼자 사는 미남은 밟아줘야 제맛이죠.
사네티는 무리하지 않고 앞에 서 있는 문타리에게 짧은 패스를 연결.
문타리가 전방을 주시하며 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왼발로 높게 로빙 패스.
타리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오늘은 감동했으니까 형이라 부를게.
키엘리니가 슬쩍 유니폼을 붙잡았지만 그런 수준의 견제는 너무 많이 당해서 이미 익숙했다.
손쉽게 뿌리친 후 도약, 맑은 윗공기를 만끽하며 다음 플레이를 생각했다.
나 같은 하이 플라이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일단 뜨고 나서 결정하기.
밀라노 더비에서 재미를 봤던 ‘몸 비틀어 헤더슛’을 할까, 아니면 문타리에게 내준 다음에 포스트 플레이로 전환할까.
“백강! 이리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떡 벌어진 어깨를 과시하며 뛰어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정백강, 즐라탄과 함께 우리 팀에서 ‘월드클래스’라는 칭호를 거리낌 없이 붙일 수 있는 바로 그 선수.
포지션 분류는 ‘오른쪽’.
마이콘이었다.
툭-----
방향만 살짝 돌려놓은 헤더가 마이콘의 이동 경로로 떨어졌다.
지구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초정밀 헤더 패스.
착지와 동시에 멈추지 않고 골문 쪽으로 쇄도했다.
무리뉴 감독의 지도 하에 포스트 플레이를 꾸준히 훈련한 덕분에, 이제는 이런 오프더볼 무브가 몸에 뱄다.
파워 넘치는 직선 드리블로 상대 측면을 완전히 허문 마이콘이 곧바로 칼날 같은 러닝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키엘리니가 급히 따라붙었지만 소용없었다.
압도적인 높이에서 내려다본 부폰의 표정이 경악으로 뒤덮였다.
부폰을 뚫은 한국인이라.
설기윤 선배, 안정훈 선배에 이어 세 번째인가?
한국인한테 약하시네, 부폰 형님.
정점에서 내려찍은 헤더가 바닥에 한 번 맞은 후 그물을 흔들었다.
오케이, 일단 한 골.
긴장해야 될 거예요, 즐라탄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