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20화 (21/176)

20화

한 골 차와 두 골 차는 전혀 다른 이야기.

쫓아가는 팀 입장에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의 강도가 차원이 다르다.

결국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승부수를 꺼냈다.

오늘 경기 내내 형편없는 폼을 보여주었던 풀백 크리스티안 몰리나로를 빼고 191cm의 장신 스트라이커 빈첸초 이아퀸타를 투입하며 공격적인 3-4-1-2 포메이션으로 전환.

이대로 패배할 순 없다는 결기가 엿보였다.

이아퀸타-아마우리 투톱은 피지컬을 앞세워 우리 수비진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팀의 센터백 콤비는 니콜라스 부르디소-왈테르 사무엘.

두 선수 모두 신장이 180cm대 초반으로 크지 않은 편이라, 유벤투스의 거친 ‘몸축구’가 굉장히 효율적으로 먹혔다.

그리고 후반 17분.

이탈리아의 적통 ‘판타지 스타’이자 유벤투스의 위대한 주장인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뽐냈다.

부르디소와의 몸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이아퀸타가 뒤쪽으로 내준 패스를 받아 오른발로 감아 찬 슛이 골망을 가른 것이다.

줄리우 세자르가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지만 코스가 너무 완벽했다.

소위 말하는 ‘델 피에로 존’에서 편하게 슈팅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이 실점의 빌미가 되었다.

전반전에 즐라탄이 ‘파괴적인 힘’을 보여줬다면, 델 피에로의 플레이에서는 ‘우아함’이 느껴졌다.

물론 혀 내밀고 질주하는 특유의 세리머니는 우아하다고 보긴 무리가 있었지만...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3-2의 펠레 스코어로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나는 아직 배가 고팠다.

아직 1골밖에 못 넣었단 말이다.

즐라탄은 1골 1어시스트, 지금 상태로 종료면 나의 패배다.

그러니까 나에게 공을 넘겨, 타리 형.

라니에리 감독의 지시가 있었는지, 내 공셔틀(?) 역할을 해야 할 문타리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에게 철저한 맨마킹을 당하고 있었다.

마르키시오 녀석, 잘생긴 주제에 터프하기까지 하니...

저러니까 여자들이 뻑이 가지...

세리에 최고의 귀요미 VS 세리에 최고의 미남이 벌이는 세기의 대결!

미남 쪽이 하도 거세게 몰아붙이는 통에 귀요미가 전방 볼 배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이드 쪽 좀 봐줘! 문타리!”

일편단심 나만 바라보고 있는 문타리에게 빽 소리를 질러 주의를 환기했다.

윙백이 공격적으로 나서는 3백 전술의 고질적인 약점은 측면 수비에 있다.

나의 간절한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문타리가 히카르두 콰레스마 쪽으로 패스를 연결했다.

그새 망할 놈의 기복이 도진 건지, 전반전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후반 존재감이 미미했던 콰레스마였다.

형, 이제 원기옥 좀 터뜨릴 때 됐잖아?

일단 공을 잡으면 멈출 줄 모르는 그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어설프게 붙었다가는 한 방에 뚫려버릴 수 있는 상대.

이를 의식하고 있는 즈데넥 그리게라는 거리를 좀 둔 채 수비에 나섰다.

“바로 올려!”

원래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닌데...

‘This is competition(이건 경쟁)’이니까.

평소 같았으면 더 질질 끌었을 텐데, 나의 준엄한 기세에 눌렸는지 콰레스마가 그대로 크로스를 올렸다.

아까 나한테 제대로 당했던 조르조 키엘리니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내 유니폼을 움켜잡았다.

나도 센터백 출신이라서 간절한 마음은 이해가 간다만... 자꾸 선 넘네?

질세라 팔을 써서 키엘리니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주심이 순간 움찔했다.

나한테 파울 주기만 해봐.

확 박아 버릴라니까.

아시죠? 원래 얘가 파울 먼저 했어요.

PK 안 줄 거면 조용히 있으셔.

모두의 시선이 나의 머리에 쏠린 사이, 미남을 따돌린 귀요미가 페널티박스로 쇄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자, 선물이야.

내가 헤더로 툭 떨궈준 공이 문타리의 왼발 다이렉트 발리슛으로 이어졌다.

* * *

[인테르, 유벤투스 4-2로 격파... 세리에 A 독주 체제 굳혀]

[전반의 즐라탄-후반의 정백강, 각각 1골 1어시스트 ‘펄펄’]

[패장 라니에리, “월드클래스 공격수를 둘이나 보유한 무리뉴는 행운아”]

인테르의 넘버원 스트라이커 자리를 놓고 펼쳐졌던 ‘정즐 대전’은 결국 훈훈한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어쩌면 이게 잘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쪽이 두드러지게 앞섰다면 누군가는 상처를 입을 뻔했으니.

만족스럽게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뜻밖에도 즐라탄이 튀어나와 말을 걸었다.

“백강! 원톱으로도 잘하는데? 솔직히 전반 끝나고 안심했었는데, 역시는 역시야. 인정할게, 네가 최고야.”

또 연기인가 싶었지만 즐라탄의 표정에서는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형 또 대인배 모드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버거울 때도 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건 확실하다.

“너도 대단했어. 특히 두 번째 골, 내가 30년을 더 뛰어도 그런 골은 못 넣을 거야.”

내 대답 역시 순도 100% 진심이었다.

그렇게 아크로바틱한 플레이는, 어우...

꿈도 꾸기 힘들지.

“오늘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연이은 의외의 제안.

아무래도 내가 단단히 맘에 든 모양이다.

비슷한 클래스의 선수들 간에 통하는 교감이랄까.

아, 나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남자들한테...

뭐, 앞으로도 계속 호흡을 맞춰 갈 사인데 친해져서 나쁠 건 없겠지.

“좋아.”

즐라탄의 저택은 사네티 주장네 못지않게 으리으리했다.

“어서 와... 어머, 손님이 오셨네?”

즐라탄의 아내인 헬레나 세예르가 즐라탄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흘겼다.

아니 라탄이 형, 나 온다고 미리 연락도 안 한 거야?

특유의 상남자 캐릭터, 콘셉트가 아니었구나?

그나저나 즐라탄보다 11살 연상이라고 들었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갑작스레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정백강이라고 합니다.”

“물론 잘 알죠, 백강 씨. 요즘 활약 잘 보고 있어요. 남편이 갑자기 손님 데려오는 거, 한두 번이 아니라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

나 떠나고 나면 부부싸움 각이다.

크흠, 이쯤에서 분위기 반전 타이밍.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어머나! 안 이러셔도 되는데. 너무 귀엽네요! 감사해요.”

좋아할 줄 알았다.

갓난아기가 있는 집에는 역시 아기옷만한 선물이 없지.

물론 브랜드는 구찌다.

계산하면서 ‘어차피 곧 클 텐데’라는 회의감이 들긴 했지만, 이왕 선물하는 거 화끈하게 해야지.

돈 뒀다 어디 쓰겠는가.

“막시밀리언하고 빈센트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정말 보고 싶은데.”

“물론이죠, 따라오세요.”

내 입에서 두 아들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헬레나의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졌다.

게임 오버다.

SNS에 아기 사진이 왜 그리 많겠는가.

너무 귀엽고 예쁜 내 새끼, 혼자 보기 아까워서 아니겠는가.

첫째 막시밀리안은 2살, 둘째 빈센트는 아직 돌도 안 지났다.

확실히 유전자가 좋아서 그런지, 아직 어린데도 둘 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게다가 태어나보니 아빠가 즐라탄.

크면 여자깨나 울리겠구나, 축복받은 녀석들 같으니라구.

쾌남 즐라탄도 자식들 얼굴을 보자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라탄이 형도 ‘아들 바보’였구나?

“요리할 동안 남편하고 쉬고 계세요.”

“괜찮습니다, 간단하게 먹죠.”

“아뇨,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예의가 아니죠.”

귀한 손님이라.

사실 그렇긴 하지.

“그래, 백강. 게임룸에 가서 ‘피파’ 한 판 해.”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즐라탄이 내 팔을 붙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인도에 따라 입장한 게임룸은...

‘호나우두룸’이었다.

방 안에 구비된 게임기의 개수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건 벽면을 가득 메운 호나우두 브로마이드들.

즐라탄이 호나우두의 광팬이라는 건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브라질에서 어린 뛰던 시절부터 에인트호번, 바르셀로나, 우리 팀, 레알 마드리드, 밀란에 이르기까지.

호나우두의 일대기를 확인할 수 있는 컬렉션이었다.

“우와...”

“가끔 축구가 잘 안 풀릴 때, 이곳에 와서 ‘일 페노메노(Il Fenomeno)’의 기운을 받아가곤 하지. 오늘도 마찬가지였어. 결과는 뭐, 알다시피.”

이쯤 되면 거의 종교 수준이다.

“자, 그럼 붙어볼까? 오늘 경기가 1라운드, 지금이 2라운드야.”

종목은 ‘피파 2008’.

둘 다 인테르를 고르고 4-3-3 포메이션을 가동했다.

즐라탄은 즐라탄, 나는 정백강을 원톱으로 기용.

“역시 EA 스포츠의 안목이 정확하네.”

“전혀 동의할 수 없는걸.”

게임상에서 즐라탄의 오버롤 능력치는 88점, 나는 84점이었다.

지난 시즌 EPL 득점왕보다 세리에 A 득점 랭킹 4위의 점수가 더 높다니.

이건 순전히 인지도 차이다.

아니면 나의 헤더 능력치를 다 반영하지 못하는 게임의 한계이든가.

“참고로, 나 이 게임 고수야.”

즐라탄이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천하의 즐라탄이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후달리냐?

“나도 만만치 않을걸?”

내색은 안 했지만 사실 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잉글랜드 진출 이후 벤치만 달구던 회귀 전의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게 바로 이 게임이다.

측정해 보진 않았지만 플레이 타임이 2천 시간은 족히 될 거다.

게다가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 않던가.

E-스포츠 종주국 출신인데, 다른 건 몰라도 게임으론 질 수 없지.

나름 살벌한 긴장감 속에 게임이 시작되었는데...

응? 뭐야?

왜 이렇게 못해?

공격에서 하는 거라곤 정직한 직선 드리블 뿐이다.

기다리다가 스탠딩 태클로 톡.

벌려주고, 돌파하고, 크로스, 헤더, 골.

첫판을 가볍게 3-0으로 발라줬다.

물론 정백강이 해트트릭.

“한 판 더!”

두 번째 판은 4-0.

“젠장, 한 판 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임.

세 번째 판은 기어이 5-0이 나오고 말았다.

“고수라면서?”

“이상하다... 컴퓨터랑 할 땐 진 적이 없는데.”

“평소에 난이도 뭘로 하는데?”

“응? 무슨 난이도?”

이제야 알겠군.

총 ‘아마추어’부터 ‘전설’까지 총 5단계의 난이도가 있는 피파 2008에서 기본으로 설정된 2단계 ‘세미 프로’ 난이도로 계속 게임을 해왔던 거다.

사실상 초보자라는 이야기.

게임 하는 방법도 참 즐라탄스럽다.

“나를 이기려면 ‘월드클래스’ 난이도 정도는 이기고 와야지.”

“에이 몰라, 이길 때까지 해.”

머릿속의 ‘승부욕 스위치’가 발동된 것일까.

즐라탄은 거듭되는 참패에도 계속해서 도전해 왔다.

그리고 나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도합 17연승.

68득점 0실점.

헬레나가 얼른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치며 게임룸에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즐라탄이 이길 때까지 밤을 샐 뻔했다.

“너, 다음에 한 판 더해.”

“얼마든지. 대신 연습 좀 열심히 하고 도전해.”

축구는 잘하지만 게임 실력은 형편없는 친구 즐라탄과 가까워진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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