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유벤투스전에서 즐라탄이 보여준 무력 시위에 골치가 아파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무리뉴 감독이었다.
어쨌거나 본인을 중심으로 공격 판을 깔아주면 팀을 ‘하드캐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즐라탄.
그리고 어떤 전술을 쓰더라도 1인분 이상은 무조건 해주는 나.
하지만 둘을 동시 기용하면 ‘1+1=1’이 되어 버리니...
마치 잉글랜드 대표팀의 스티븐 제라드-프랭크 램파드 같은 관계랄까?
결국 무리뉴 감독이 3자 긴급 회동을 제안했다.
무슨 국제 외교판도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니 별일이 다 생긴다.
“많이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이렇게 조심스러운 모습의 감독님은 처음 본다.
“혹시 로테이션을 돌린다면 어떨까? 체력도 세이브하고 좋지 않아?”
“즐라탄은 거부합니다.”
종종 터져 나오는 즐라탄 특유의 3인칭 화법.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해.
언론 인터뷰 때는 하지 말고.
그나저나 아침에 단호박을 먹었나, 엄청나게 단호하네.
개인적으로는 로테이션도 수용할 용의가 있다.
어차피 주급은 나오니까, 경기당 페이는 오히려 올라가는 셈 아닌가?
출전수당이 좀 아깝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계산이...
음... 내가 너무 속물인 건가.
어쩐지 반성하게 되는군.
“당연히 그렇게 나올 거라 생각했다. 자, 그럼 이걸 보자.”
무리뉴 감독이 내민 그림 한 장.
“이건 사흘 뒤 챔피언스리그에서 파나티나이코스를 상대할 때 쓸 포메이션이다. 우리는 사실상 16강 진출을 확정 지은 상태니, 전술적 실험을 하기에 아주 적절한 경기지.”
“이게요?”
그림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즐라탄의 표정을 살폈다.
역시나.
스웨덴 사나이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진심이십니까?”
“열심히 훈련 중인 팀의 핵심 선수를 둘이나 불렀는데, 농담할 상황은 아니지. 시간이 아깝지 않나.”
또다시 이는 전운(戰雲).
이 양반들 한 판 붙을 기세다.
“하하, 두 분 다 진정들 하시고. 그런데 정말 이게 먹힐까요?”
“통할 거라고 믿고, 더 나아가 앞으로는 이걸 주력 전술로 사용하려고 한다.”
단호박을 쌍으로 드셨나.
“포메이션이라는 틀에 갇히지 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역할 분배야. 정백강과 즐라탄, 즐라탄과 정백강이 필드 위에서 무슨 플레이를 할 것이냐. 그게 핵심이다.”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남긴 채 무리뉴 감독이 홀연히 사라졌다.
“제길!”
거칠게 내뱉으며 즐라탄도 방을 떠났다.
“아, 진짜! 누군 성깔 없는 줄 알아? 이것들이 아주 사람을 우습게 보네!”
모두가 떠나간 걸 철저히 확인한 후 나도 한마디 했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한국어로.
후... X나 카리스마 있어.
* * *
‘필드 위에서 무슨 플레이를 할 것이냐.’
앞으로 파나티나이코스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일.
무리뉴 감독이 던진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해리 레드냅 감독의 얼굴도 생각이 났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나와 문타리를 동시에 잃은 포츠머스는 그 돈으로 영입한 선수들이 줄줄이 폭망하면서 현재 리그 8위에 머물러 있었다.
나 덕분에 진출한 챔스에서도 신나게 죽을 쑤고 있었고.
왜 갑자기 레드냅 감독이 떠올랐을까.
- 포메이션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어. 그건 숫자놀음에 불과하지.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야기다.
이 말이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는 주장.
그래, 무리뉴 감독이 제시한 포메이션이 파격적이긴 하지만, 결국 실제로 어떻게 움직일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니겠어?
뭔가 해답이 보이는 듯했다.
가만, 이렇게 혼자서 고민해봐야 아무 의미 없잖아?
또 다른 당사자인 즐라탄하고 이야기를 좀 해보자.
생각난 김에 바로 문자를 보냈다.
- 둘이서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내가 살게.
별 생각 없이 전송했는데 보내 놓고 보니 뭔가 데이트 신청 같다.
크흠...
- 콜.
답장 한 번 성의 있네.
약 5초 뒤에 다시 한 번 울리는 핸드폰.
- 장소는 내가 고른다.
비싼 데 가겠구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밀라노에서도 가장 고급지기로 소문난 식당에서 풀코스 만찬을 대접하게 됐다.
끄응, 돈이 부담되는 건 아니지만 염치라는 게 없는 건가.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와인도 해야지?”
아무래도 나한테 피파 진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분명하다.
오늘을 잊지 않으리.
나중에 나도 꼭 얻어먹을 테다.
“근데 어쩐 일로 따로 보자고 한 거야? 지난번 초대의 답례인가?”
“뭐, 그런 것도 있고. 파나티나이코스전 이야기도 좀 하고...”
기분 좋게 공짜 와인을 들이켜던 즐라탄이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흥!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흥이라고 했나.
195cm짜리 주제에 흥이라니.
어디서 앙탈이야, 앙탈이.
후... 한 살이라도 많은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인생 선배 노릇도 피곤하다.
“나도 처음엔 너처럼 당황스러웠어.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이야. 감독님의 의도를 좀 알 것도 같더라고.”
“감독의 생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누구야? 즐라탄이야. 나보고 미드필더로 뛰라는 게 말이 돼?”
그렇다.
무리뉴 감독이 우리에게 던져준 포메이션은 4-2-3-1.
원톱에 정백강,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즐라탄이 포진해 있었다.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원톱으로서 미친 퍼포먼스를 선보였건만, 바로 다음 경기에서 공미로 뛰라니.
즐라탄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을 만도 했다.
제게 새로운 삶을 주신 분이시여.
당신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제게 무리뉴의 혀를 주소서.
“일단 내 얘기 좀 들어봐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경쟁에서 승리해서 즐라탄을 밀어낸 모양새가 돼 버렸으니...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고깝게 들을 가능성이 컸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애초에 우리 투톱이 왜 안 맞았을까? 나도 잘하는 선수고, 너는 뭐,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인데 말이야.”
“그렇긴 하지.”
스타트가 좋다.
역시 즐라탄에게는 칭찬이 약이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활동 반경, 그리고 스타일의 문제라는 걸.”
“좋아, 이해했어. 우리가 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해. 너나 나나 기본적으로 포스트 플레이 기반이니까.”
“아마 공미를 둔다는 감독님의 아이디어는 거기서 나왔을 거야. 자, 이 대목이 중요한데 말이야.”
어느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즐라탄.
“그러면 원톱으론 나를 쓸 수밖에 없어. 왜냐? 나는 때려죽여도 공미 롤을 소화할 수 없단 말이지. 내가 원체 투박하잖아. 하지만 너는 어때? 개인기면 개인기, 시야면 시야, 패스면 패스, 거기에 몸싸움 능력까지 모든 걸 다 갖춘 토털패키지잖아. 공미 따위는 그냥 쌈 싸 먹을 수 있지. 솔직히 우리 팀에서 너보다 그 자리에서 잘할 선수가 없어. 루이스 피구가 회춘하지 않는 이상에야. 아니, 피구가 10살 젊어져도 너보다 나을진 장담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
마지막 말은 마음에 없는 얘기였다.
전성기 피구면 지네딘 지단하고 비비던 미드필더인데.
하지만 지금은 즐라탄 띄워주기에 만전을 기할 때다.
“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확실히 네가 그 기술로 미드필더 자리에서 뛴다는 건 상상할 수 없긴 해.”
와...
본인은 모를 거다.
자기가 말로 사람을 얼마나 잘 패는지.
악의가 없다는 게 느껴져서 화도 못 내겠고...
“백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있어.”
“얘기해봐, 편하게.”
“공미로 뛰면 내 득점력을 살릴 수가 없잖아. 결국에 난 태생이 스트라이커라고.”
왔다, 딱 예상했던 전개다.
“백번 옳은 말이야. 내가 다 생각해 둔 게 있지.”
즐라탄이 흥미롭다는 듯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 * *
2008년 11월 26일.
챔피언스리그 32강 B조에서 2위를 달리고 있는 파나티나이코스가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를 방문했다.
앞서 그리스에서 열렸던 양 팀 간 1차전에서는 나의 두 골로 2-0 승리를 거뒀었다.
우리 팀의 선발 라인업은 예상대로 4-2-3-1 전형.
미리 알고 있었던 나와 즐라탄은 평온했지만 동료들은 즐라탄의 눈치를 봤다.
라탄이 형, 평소에 이미지가 얼마나 개차반이었으면 반응이 이래?
“16강 진출이 확정적이지만 끝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특별한 전술적 지시보다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 무리뉴 감독이었다.
파나티나이코스는 대놓고 5백 전술을 들고 나왔다.
B조 최강자인 인테르, 게다가 원정 경기.
무승부만 거둬도 감지덕지라는 이야기였다.
킥오프.
익숙하지 않은 자리임에도 즐라탄은 무난하게 플레이 메이킹을 해나갔다.
미드필더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 ‘공을 빼앗기지 않을 것’.
발재간과 피지컬을 둘 다 갖춘 즐라탄의 볼 키핑 능력은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중원에서 주고받는 짧은 패스와, 양쪽으로 쫙쫙 벌려주는 긴 패스도 모두 수준급.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즐라탄의 재능은 역시 진짜배기다.
‘축잘잘(축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은 만고불변의 진리.
즐라탄이 중심을 잡고 공을 순환시켜주면서 파나티나이코스는 공을 거의 잡아보지도 못했다.
체감상 볼 점유율은 거의 9 대 1 수준.
초반부터 경기를 지배하는 가운데 첫 골은 생각보다 이른 전반 11분에 터졌다.
루이스 피구가 중앙으로 오프더볼 무브를 가져가며 어그로를 끄는 사이, ‘오른쪽’ 마이콘이 측면으로 오버래핑.
즐라탄이 타이밍 좋게 스루패스를 전달해주었다.
이번 시즌 인테르를 상대하는 모든 팀이 기억해야 할 사실.
마이콘의 프리 크로스 찬스 = 최소 0.8골이라는 것.
요즘 절정의 폼을 보여주고 있는 마이콘의 크로스는 절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콰앙-----
임팩트 순간 골을 직감하는 헤더슛.
이번 시즌 챔스에서 벌써 6골을 몰아치고 있는 나였다.
생애 첫 챔스인데 뭐, 별 거 아니구만.
인테르의 ‘월클 3인방’, 즉 즐라탄-마이콘-정백강으로 이어지는 깔끔한 결과물.
무리뉴 감독이 즐라탄을 내려 쓰기로 결심했을 때는 분명 이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오케이, 그럼 이제 다음 단계.
“즐라탄! 자리 바꿀 차례야.”
“패스 제때 주라구.”
“걱정 붙들어 매고. 헤더 패스 항상 생각해.”
“난 항상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파나티나이코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나와 즐라탄은 곧바로 자리를 바꾸었다.
최전방에 즐라탄이 위치하고, 나는 미드필드 지역까지 내려와 수비 가담.
“백강! 네가 왜 내려와?”
하비에르 사네티 주장이 의아하다는 듯 외쳤다.
“감독님 지시입니다! 주장!”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이게 우리의 대답입니다, 감독님.
벤치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무리뉴 감독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양쪽 눈 모두 2.0의 시력을 자랑하는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무리뉴 감독의 흡족한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