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22화 (23/176)

22화

시계를 돌려 다시 즐라탄과의 식사 자리.

“생각해 둔 게 뭔데?”

“무리뉴 감독님이 한 말 기억나지? ‘포메이션의 틀을 깨 버려라.’ 자, 경기 시작할 땐 4-2-3-1 그대로 가. 그런데 우리가 90분 내내 공격만 하는 건 아니잖아. 수비를 해야 할 때가 온단 말이지.”

“그래서?”

이 타이밍에서 나는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얼굴을 붉혔다.

“내가 화가 나는 게 뭔 줄 알아? 너처럼 공격 재능이 차고 넘치는 선수를 미드필더로 써버리면 수비에 체력을 낭비하게 되잖아. 감독님이 좀 너무하셨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역시 백강, 축구 보는 눈이 남다르네. 아니 물론, 난 수비도 잘하지만 말이야.”

백번 양보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건 말야. 포메이션 두 개를 가동하는 거야. 하나는 우리가 공을 잡고 공격을 할 때. 이때는 네가 미드필더 위치에서 중심이 돼서 팀 공격을 이끄는 거지. 하지만 수비할 때는, 내가 깊숙이 내려가고 대신 네가 최전방에 머물면서 역습 찬스를 보는 거야. 우리 팀이 역습할 때 가장 위력적인 선수가 누굴까?”

“말해 뭐해, 즐라탄이지!”

3인칭 화법이 또 나왔다.

“어때, 그림이 좀 그려지지 않아?”

“흠... 나쁘진 않아 보이네. 내가 원톱으로 뛰는 게 가장 낫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백강 너도 뭐, 최고 중 하나니까.”

즐라탄이 누군가를 ‘최고’라고 부른다는 건 기분이 무척이나 좋다는 뜻이다.

“감독님한테 보여주자고. 우리가 누군지.”

“좋아. 그런 의미에서 와인 한 병 더 할까?”

썩을... 망할...

나중에 사네티 주장한테 밀라노에서 가장 비싼 식당이 어딘지 물어봐야겠어.

* * *

이곳은 다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4-2-3-1로 출발한 우리 팀의 진영은 수비 시에 자연스럽게 4-1-4-1로 전환되었다.

사네티 주장이 4백 바로 앞에서 공을 쓸어담는 역할을 하고, 즐라탄을 제외한 나머지 미드필더들이 일자 블록을 형성.

일종의 변형 ‘두줄 수비’라고나 할까?

“상대 풀백 올라온다! 콰레스마가 커버해줘! 라인 잡고!”

“내가 붙을게! 문타리, 뒷공간 좀 부탁해!”

열심히 콜을 하다 보니 옛 생각이 나는구만.

축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텐데, 수비에는 골을 넣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쾌감이 있다.

만약 센터백의 몸값이 더 비쌌다면 전향을 안 했을지도?

파나티나이코스 역시 그리스를 대표하는 강팀.

그러나 이번 시즌 모든 유럽 팀을 통틀어 최소 실점을 자랑하는 우리 팀의 방패를 위협하기에는 그 창이 너무 무뎠다.

중원에서 답을 찾지 못하자 꾸역꾸역 측면으로 공을 보내서 크로스 공격을 시도했지만, 마르코 마테라치가 간단하게 헤더로 걷어냈다.

성깔이 좀 더럽고 지저분한 플레이를 자주 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확실한 마테라치다.

“주장! 여기요!”

파나티나이코스의 수비진이 아직 정돈되기 전.

즐라탄이 목 빠지게 기다렸을 역습 기회다.

아예 최전방으로 뻥 내지르는 방법도 있겠지만, 더 완성도 있는 역습을 위해서는 미드필더를 한 번 거치는 게 낫다.

내 ‘위대한 머리’, 제대로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련한 ‘사주장’이 곧장 나를 향해 로빙 패스를 전달.

나는 뛰어오르면서 즐라탄의 위치를 슬쩍 확인했다.

파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이 즐라탄의 발 앞에 떨어졌다.

상대 센터백 야니스 구마스와 1:1로 맞선 즐라탄이 지체 없이 오른발 강슛을 시도...하는 듯 했으나 페이크였다.

무게중심이 완전히 무너진 구마스가 넘어지면서 유니폼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쿨하게 떨쳐내는 즐라탄.

주심이 어드밴티지 룰을 적용했다.

그대로 돌진한 즐라탄이 골키퍼가 뛰쳐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왼발 슛...도 페이크였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순식간에 두 명을 유린한 후 텅 빈 골문에 공을 툭 차넣는 즐라탄.

그저 환상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개인기였다.

즐라탄의 이름을 연호하는 홈 관중들.

어떻게 쟤는 넣는 것마다 원더골이냐.

그나저나 다 좋은데.

바로 넣었으면 내 도움 기록이었단다.

밥을 사줘도 소용이 없어, 소용이.

* * *

[인테르, 파나티나이코스 5-0으로 꺾고 B조 1위 확정]

[즐라탄 시즌 1호 해트트릭, 정백강 2골... ‘꿈의 투톱’ 화력쇼 펼쳐]

누가 우리 팀에게 ‘빈공’이라는 딱지를 붙였던가.

유벤투스전 4골에 이어 이번에는 5골을 터뜨리며 폭발적인 공격력을 뽐냈다.

경기 이후 즐라탄의 공격형 미드필더 기용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무리뉴 감독은 쿨하게 답했다.

“그 자리에 배치한 것은 내가 맞지만, 세부적인 지시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 결과는 순전히 선수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에 대한 칭찬은 오롯이 선수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특히 익숙하지 않을 자리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즐라탄에게 찬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비슷한 질문에 대한 즐라탄의 반응은?

“감독님 말씀에 동의한다. 오늘 내가 굉장히 잘했다. 어떤 포지션에서 뛰든, 나는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놀랍다.

승장인 무리뉴와 해트트릭한 즐라탄에 이어 나에게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 즐라탄과의 포지션 체인지가 인상적이었는데?

“나와 즐라탄은 비슷한 면도, 다른 면도 많은 선수들이다. 서로의 장점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나온 아이디어다. 결과가 좋아서 만족한다.”

- 직접 생각해낸 전술이란 뜻인가?

“감독님이 제시한 틀 안에서 조금 변동을 준 것뿐이다. 감독님은 우리들에게 공을 돌려야 한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오늘 승리의 키포인트는 감독님의 전술이었다.”

내 인터뷰를 지켜보던 무리뉴 감독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사랑합니다, 감독님.

* * *

성공적으로 첫 삽을 뜬 무리뉴표 4-2-3-1.

그러나 아직 최종 버전은 아니었다.

“완성도를 더 높여야겠지? 백강.”

무리뉴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나에게 새롭게 떨어진 미션은?

바로 ‘라인 브레이킹’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상대 팀이 바보가 아닌 이상, 측면 전개 후 크로스에 의존하는 공격은 그 파훼법이 분명 나올 것이었다.

그러나 즐라탄에서 나에게로 바로 이어지는 패턴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내가 수비수 출신이라 잘 아는데, 생각할 거리가 하나만 늘어나도 막는 입장에선 부담이 엄청나게 커진다.

다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근데 감독님, 제가 발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니라...”

여러모로 완벽한 나지만, 스피드엔 영 자신이 없다.

몇 안 되는 인간적인 면모랄까.

특히 공을 몰고 뛰라고 하면...

우리 팀에서 나보다 느린 선수 아마 없을걸?

그러나 무리뉴 감독의 태도는 단호했다.

“라인 깨기는 발로 하는 게 아니야. 머리로 하는 거지. 필리포 인자기를 보면 알 수 있잖나.”

인자기라, 잘 알죠.

‘오프사이드 라인에서 태어난 선수’ 아닙니까.

근데 그 아저씨는 쓰나미도 위치선정으로 피해 간 양반이라 저랑 비교하는 건 좀...

어쨌거나 까라면 까야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미친 헤더 하나로 먹고 사는 ‘재능충’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나만한 노력파도 없다.

포츠머스 시절 공격수로 전향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굳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찾는다면 노력을 좀 스마트하게 한다는 정도?

어떻게 다시 잡은 기회인데, 무작정 들이박으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의 장점과 능력을 라인 브레이킹에 접목할 수가 있다면, 껍질을 깨고 한 단계 더 뛰어난 선수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슈퍼스타 정백강의 고뇌와 상관없이, 팀의 순항은 계속되었다.

체력 안배를 위해 주전이 다 빠진 챔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베르더 브레멘에게 패하긴 했지만, 리그에서는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16라운드 키에보 원정 경기에서 나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4-1로 승리하면서 무려 11연승.

밀라도 더비 이후 치러진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아직 리그 종료까지는 20경기가 넘게 남아 있었지만,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네라주리(Nerazzurri)’의 17번째 스쿠데토 사냥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 * *

2008년 12월 19일 저녁.

하비에르 사네티 주장이 모처럼 팀원들을 집에 초대했다.

단합대회의 의미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날.

“주장은 원하는 대진 있어요?”

“음... 요즘 기세로 보면 다른 팀들이 우릴 겁내지 않을까?”

오오, 대단한 자신감.

역시 주장의 품격.

오늘은 대망의 2008-2009 챔피언스리그 16강 대진 추첨일이었다.

우리 팀의 마지막 챔스 우승은 1965년.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였다.

아무리 챔스 우승이 어렵다지만, 인테르라는 클럽의 명성에 비하면 아쉬운 게 사실.

리그에서 무적의 포스를 뽐내고 있는 올해야말로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적기였다.

“시작됐다.”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지오지오 마세티와 로마의 레전드 윙어인 브루노 콘티가 추첨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엄청난 긴장감 속에 첫 번째 공이 뽑혔다.

- 첼시 FC.

첼시는 A조 2위.

각 조 1위와 2위가 매치업되기 때문에, 우리와도 만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챔스 결승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맨유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던 팀인만큼, 올해 엄청나게 벼르고 있으리라.

무서울 것까진 없지만 부담스러운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과연 첼시의 상대는?

- 유벤투스 FC.

시작부터 꿀잼 대진이 완성됐다.

공교롭게도 두 팀 다 자국 리그에서 2위를 달리는 중.

누가 더 단단한 콩인지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 올랭피크 리옹.

프랑스의 자존심 리옹!

- FC 바르셀로나.

리옹, 잘 가!

조별리그 치르느라 고생 많았어.

멀리는 안 나갈게.

- 스포르팅 CP.

탐나는 상대다.

아마도 16강 진출팀 중 최약체가 아닐까?

- 바이에른 뮌헨.

까비, 8강 날로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 어디 어디 남은 거지?”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 있던 루이스 피구 형님이 물었다.

대선배께서 물으시면 바로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마르세유, 비야레알, 아스널,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네요. 파나티나이코스는 같은 B조였으니까 16강에서 만날 일은 없고요.”

그러자 피구 형님이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레알 마드리드라, 옛날 생각나네. 적으로 붙어보는 것도 재밌겠어.”

“하하,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마르세유나 비야레알이 훨씬 낫죠. 레알은 좀 더 높은 무대에서 만나는 게...”

“흐어억!”

귀여운 문타리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지... 진짜 레알...”

문타리가 가리킨 텔레비전 모니터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글자들.

“여기 화장실이 어디더라... 아, 저쪽이었지?”

설화(舌禍)의 주인공이 된 피구 형님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으이그... 이래서 항상 입을 조심해야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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