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008-2009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향한 첫 관문이 될 16강 대진이 확정되었다.
유벤투스 VS 첼시.
바르셀로나 VS 리옹.
뮌헨 VS 스포르팅.
맨유 VS 마르세유.
포르투 VS 파나티나이코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VS 아스널.
로마 VS 비야레알.
그리고 대망의 인테르 VS 레알 마드리드.
이게 다 루이스 피구 형님이 입을 털어주신 덕분(?) 아니겠는가.
첼시와 유벤투스의 대전도 빅매치임이 분명했지만, 비교적 신흥 강호라고 할 수 있는 첼시와 달리 인테르와 레알은 각각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대표하는 명문 오브 명문.
단연 16강 최고의 매치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회귀하기 전의 역사를 보면, 이번 시즌 레알은 16강에서 리버풀을 만나 광탈했었다.
그러나 내가 포츠머스에서 쓸데없이(?) 영웅적인 활약을 하는 바람에 리버풀은 UEFA컵행.
정작 리버풀 대신 올라간 포츠머스는 나와 문타리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조별리그 탈락.
결국 모든 것은 ‘정백강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하여튼 너무 잘해도 문제라니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우리 팀의 손을 들어주었다.
앞선 네 시즌 동안 연속으로 챔스 16강에서 고배를 마셨던 레알은 명성에 비해 그 전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
올 시즌 라리가에서도 바르셀로나의 독주를 전혀 막아서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 팀은 올해 열린 공식 경기에서 단 1패만 기록하며 무적의 포스를 뽐내고 있었으니...
만약 돈을 건다고 하면 레알보단 인테르 쪽에 베팅하는 게 합리적이리라.
그런데 의외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건 무리뉴 감독이었다.
“20세기 최고의 클럽이라는 수식어는 허명이 아니다. 그들이 요 몇 년 동안 부진한 건 사실이지만 절대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은 2개월 동안 열심히 준비하겠다.”
그가 평소에 보여주는 오만해 보일 정도의 마이크웍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발언.
감독님, 혹시 이때부터 큰 그림 그리신 겁니까?
* * *
“밥은 먹었어요?”
“먹었지 그럼, 시간이 몇 신데.”
“시간이... 아, 서울은 벌써 밤이겠구나.”
“오늘 같은 날에 전화를 다 줬대. 여자친구 안 만나?”
“여자친구는 무슨...”
“너무 축구만 하지 말고 연애도 하고 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요. 끊어요, 엄마.”
더 얘기가 길어지면 피곤하다.
통화를 종료하자 적막이 밀려왔다.
집이 유난히 넓게 느껴진다.
그렇다.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이제 내년까지 남은 경기도 없고, 훈련은 27일부터 재개될 예정.
무료하다, 무료해.
괜히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사네티 주장하고 즐라탄은 가족하고 보낼 거고...
콰레스마는 여자친구랑 있겠지?
엄청 예쁘던데...
스크롤을 내리던 와중에 눈에 딱 띄는 이름.
역시 이 녀석인가.
따르릉---
“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빨리 받어?”
“핸드폰으로 뭣 좀 하고 있었어.”
“오늘 바빠? 별일 없으면 놀러와.”
“그래, 한 시간 내로 갈게.”
짜식, 외로웠구나.
마음 한쪽이 짠하다.
이런 게 동병상련인가.
한 시간 내로 오겠다던 사랑하는 나의 친구, 문타리는 30분 만에 나타났다.
선물까지 들고 말이다.
“어서 와. 근데 그건 뭐야?”
“와인!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기분은 내야지.”
타리야, 좋은 생각인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염치 없는 즐라탄보다는 훨씬 낫네.
“피파 고?”
“콜.”
문타리와 나의 게임 실력은 막상막하.
나 못지않은 집돌이답게 상당한 내공이 있었다.
하하호호 웃으며 신나게 게임을 즐기다 보니...
“지금 몇 시야?”
“2시 47분.”
“아, 시간 더럽게 안 가네.”
“그러게.”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온 것만 같다.
“와인이나 마시자.”
“그래.”
냉장고에서 치즈랑 과일 쪼가리들을 꺼내놓고 와인을 홀짝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타리와 이러고 있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백강.”
“왜?”
“콜걸이라도 부를까?”
우리 문타리, 얼굴은 귀엽지만 생각은 상남자구나?
고백하건대, 귀가 솔깃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회귀하면서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랫도리를 조심하자’고.
지난 생에서는 잉글랜드 진출 이후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완전히 꼬여버리는 바람에, 반대급부로 술과 여자에 탐닉했더랬다.
트럭이 주신 소중한 기회, 이번에는 좀 건실하게 살아야지.
제대로 연애도 하고, 좋은 여자랑 결혼도 하고...
“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지금 몇 시지?”
“3시... 21분. 젠장!”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나가자. 혹시 알아? 산타가 좋은 인연을 선물해줄지.”
포츠머스에서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은 처음 본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호응해주는 게 인지상정!
그리고 누가 아는가.
정말로 끝내주는 여자가 마법처럼 말을 걸어올지.
“좋아, 나가자!”
문타리와 함께 택시를 타고 밀라노 중심가를 향해 이동했다.
우리는 인테르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
최대한 폼나게 등장하면 뭇 여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될 줄 알았는데.
제길.
여기를 봐도 커플, 저쪽을 봐도 커플이다.
인테르의 두 스타에게는 생각보다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문타리, 나오니까 오히려 더 외로운 것 같지 않아?”
“...”
“어디로 갈까?”
“술이나... 마시자...”
술집에서도 끝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결국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있을걸...
이게 다 문타리 때문이야.
* * *
악몽 같았던(?)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지나고 2009년이 밝았다.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경기는 칼리아리 원정.
지난 시즌 14위를 기록했던 칼리아리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이 부임한 이번 시즌 확 달라진 모습으로 6위에 안착해 있었다.
‘칼리아리 돌풍’의 힘은 압도적인 홈 성적.
리그 일정이 절반 가까이 진행된 현재, 홈에서 6승 2무를 거두며 무패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깔끔한 승리로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 우리 팀 입장에서는 꽤 껄끄러운 상대를 만난 셈.
물론 정초부터 ‘리그 깡패’ 인테르를 만난 칼리아리 녀석들의 심정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백강, 보여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감독님.”
오늘 경기는 나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다.
‘라인 브레이킹’이라는 무리뉴 감독의 미션에 대한 나의 특훈 성과를, 드디어 만천하에 공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훈련 때처럼만 하자.
틀림없이 먹힐 거야.
미드필더들이 패스만 잘 준다면 말이지.
킥오프.
칼리아리는 홈인데도 불구하고 5백을 들고 나왔다.
4-2-3-1 시스템의 정착 이후 폭발한 우리 팀의 공격력을 엄청나게 의식한 모양새.
특히 양쪽 윙백들은 공격 참여를 거의 하지 않은 채 내려앉아 수비에 전념했다.
측면에서의 크로스 기회를 원천봉쇄하면 나를 묶을 수 있다는 계산이리라.
거기에 더해 알레그리 감독은 187cm, 84kg의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가진 미켈레 카니니를 나의 전담 마크로 붙였다.
역시 명장답게 준비 많이 하셨네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는데.
노골적으로 역습 한 방을 노리는 칼리아리에 맞서, 우리는 절대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볼을 돌렸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홈만 오면 펄펄 나는 칼리아리에게 선제골이라도 허용했다간 이변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우--- 우---
리그 1위 팀답지 않은 소극적인 경기 운영에 분노한 것일까.
스타디오 상엘리아를 가득 메운 1만 6천여 명의 관중들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야유는 신호탄처럼 한 남자의 각성을 이끌었다.
바로 나와 함께 뜨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문타리였다.
“주장, 여기요!”
사네티 주장으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문타리가 거침없이 전진 드리블.
최전방 공격수까지 하프라인 부근으로 내려와 수비에 가담한 칼리아리 선수들이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문타리를 덮쳤지만 소용없었다.
툭--- 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깜짝 팬텀 드리블.
공을 쫓아왔던 녀석들은 멍하니 문타리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지, 여복(女福)과 축구 실력을 바꾼 거냐.
아니면 크리스마스의 분노를 여기다가 푸는 거야?
“백강!”
다정하게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문타리.
놓치기 아까운 완벽한 기회다.
문타리의 왼발이 공에 닿는 순간, 카니니를 등진 채 서 있던 나는 순식간에 몸을 홱 돌리며 앞쪽으로 뛰어나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카니니가 깜짝 놀라서 따라왔지만...
이걸 어쩌나,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드리블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오늘 문타리 날이구나, 날.
높이 완벽, 세기도 완벽.
100점 만점에 120점을 줘도 모자랄 로빙 스루패스였다.
콰앙-----
전반 14분, 호쾌한 소리와 함께 작렬한 나의 헤더슛이 골망을 흔들었다.
공이 어찌나 빨랐던지, 페데리코 마르체티 골키퍼가 손조차 뻗어보지 못한 채 눈 뜨고 당했다.
크하하, 이게 진짜로 되는구나.
“나이스 헤더! 백강!”
“네 패스가 너무 좋아서 안 넣을 수가 없었어.”
겸손의 미덕까지 완벽하다.
역시 난 멋있어.
* * *
동급 최악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정백강이가 어떻게 라인 브레이킹을 할 것인가.
잠돌이로 유명한 내가 하루 7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골치 아픈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공격수들이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수비수와 동일 선상에 서 있다가 쇄도하는 패턴을 연습했다.
그러나 결과는 엉망.
발이 워낙 느리니 공 따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어쩌다 공을 잡아도 불안한 퍼스트 터치 때문에 골키퍼에게 헌납하기가 일쑤였다.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던 내게 구원처럼 내려온 무리뉴 감독의 한 마디.
“내가 지난번에 얘기했잖나. ‘라인 깨기는 머리로 하는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머리를 쓰면 되지.
무리뉴 감독이 ‘두뇌’를 말한 건지 두개골 바깥쪽을 지칭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후자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무리를 꼭 발로 할 필요는 없잖아?
그때부터 훈련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깔아서 주지 말고, 띄워서 패스해 줘.”
“바라는 것도 많네.”
“너의 로빙 패스는 땅볼 패스만큼 정확하잖아.”
“훗, 그건 그래.”
나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 즐라탄 다루기다.
“자, 간다!”
죽어라 뛰어서 즐라탄의 패스를 헤더골로 연결했다.
된 건가?
“오프사이드였어, 백강.”
수비수 역할을 해주던 마르코 마테라치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나 스스로 느리다는 사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한 박자 빨리 움직인 것이다.
됐다 싶었는데, 김이 확 샜다.
“내 생각엔 말이야. 그 빌어먹을 동일선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공중볼에서 너랑 경합할 수 있는 새끼는 없잖아. 헤더라면 자신 있는 나도 너랑 붙으면 개발리는데.”
더티한 플레이만큼이나 혓바닥도 걸쭉한 라치 형.
그러나 조언의 내용만큼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최종 버전이 바로 칼리아리전 선제골을 만든 플레이였다.
수비수 앞에서 등진 채 버티고 서 있다가 패스 타이밍에 맞춰 쇄도-헤더-골.
마테라치 말마따나 어차피 공중에선 언제나 나의 승리.
굳이 수비수보다 앞서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이 방식의 최대 장점은 오프사이드에 ‘절대’ 걸리지 않는다는 것.
패스만 제대로 날아오면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아, 이것 참.
어떻게 실력이 더 늘어버리냐.
성장하는 것도 지겹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