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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25화 (26/176)

25화

아무래도 나의 모든 경기를 분석했다는 알리 다에이 감독의 인터뷰가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흠... 곱씹어볼수록 일리가 있는 전략이야.

이란이 수비라인을 왕창 끌어올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나를 골문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였다.

밀라노 더비 때 하프라인 부근에서 헤더골을 넣은 적도 있는 나지만, 그건 상대방이 전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기본적으로 나의 헤더가 위력을 발휘하려면 페널티박스 근처까지는 전진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프사이드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정말 무적의 술책일까?

물론 아니다.

내 눈앞에 태평양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는 뒷공간을 보라.

발이 느린 나로서는 제대로 공략하기 어렵겠지만 내 파트너인 이건호는 스피드가 좋은 선수 아니겠는가.

패스 한 방만 제대로 들어가면 바로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들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다에이 감독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를 못 막는다고 보고 일종의 모험을 건 셈.

다만 근거 없는 모험은 아니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들어간 전술적 안배가 들어갔으니...

“그냥 앞으로 뻥 질러요!”

애가 타서 목놓아 소리쳤지만 여의치 않다.

다에이 감독이 말도 안 되게 높은 수비라인에 더해 세트로 준비해온 건 숨이 턱 막히는 전방 압박이었다.

취약한 뒷공간에 아예 패스 공급이 안 되게 볼 줄기를 끊어버리겠다는 이야기.

아마 경기장이 테헤란이 아니라 서울이었으면 이런 극단적인 전술은 절대 사용하지 못했겠지.

그래도 대단한 배포긴 하다.

역시 A매치에서 100골 넘게 넣은 사나이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그러나 동요하지 말지어다.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란 녀석들이 약이라도 빨고 오지 않은 이상 90분 내내 이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버티면서 추가 실점만 안 하면 분명히 기회는 찾아온다...

삑-----

“아니! 이게 어떻게 파울이야?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제발...”

거의 눈물을 흘릴 기세로 주심에게 달려드는 센터백 강만수.

그럼 그렇지... 인생이 생각대로 될 리가 없지...

* * *

전반전 38분.

키커로 나선 자바드 네쿠남이 호쾌한 ‘맞고 뒈져라 슛’으로 또 한 번 우리 골망을 흔들었다.

페널티킥 선방률이 높기로 유명한 이원재 선배가 방향은 제대로 잡았으나 슈팅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네쿠남 녀석은 오늘 벌써 두 골째.

아자디 스타디움은 완전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작년 5월부터 계속된 대한민국의 A매치 무패 행진이 마감될 위기에 처했다.

“예이! 예스! 예에스!!!”

다에이 녀석, 키만(192cm) 큰 줄 알았더니 목소리도 무지 크다.

이것도 다 심리전이야, 백강아.

말려들지 말자.

1-0보다 암울한 건 사실이지만 두 골 차라도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

후반전이 통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킥오프.

내가 이건호에게, 이건호가 박지승 선배에게 공을 건넸다.

여유 있게 앞서고 있건만 늦춰줄 생각이 없는지, 또다시 시작된 이란의 무식한 전방 압박.

그 순간 지승 선배의 눈빛이 변했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마수드 쇼자에이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며 가볍게 탈압박.

아까 네쿠남의 프리킥 골을 이끌었던 바로 그 장면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시작된 질주.

엄마야... 지승 선배 화가 많이 나셨네.

소속팀 맨유에서는 ‘수비형 윙어’로 불리며 팀플레이에 주력하고 있지만, 국가대표팀에서의 지승 선배는 명실상부한 에이스 아니겠는가.

예상치 못하게 끌려가는 상황이 발생하자 지승 선배의 공격 본능이 폭발해 버렸다.

거칠게 달려드는 상대의 태클을 요리조리 피하며 하프라인을 넘어서더니 거의 15m 전방으로 공을 뻥 차낸 후 계속 달리는 지승 선배.

마치 카카나 가레스 베일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치달이었다.

패닉에 빠진 이란의 4백이 뒤늦게 허둥지둥 쫓아갔으나 완전히 가속이 붙어버린 지승 선배를 붙잡지 못했다.

이란 최후의 보루는 메디 라마티 골키퍼.

슈팅 각을 좁히기 위해 후다닥 뛰어나왔는데...

“백강아!”

지승 선배의 선택은 크로스였다.

이란 녀석들, 지승 선배한테 정신이 팔려서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

콰앙-----

텅 빈 골문으로 날아간 헤더슛에 그물이 크게 출렁였다.

시끌시끌하던 관중석에 찬물을 확 끼얹는 만회골.

위기를 맞았던 우리 대표팀은 1-2로 전반을 마치며 추격의 불씨를 살렸다.

“선배, 직접 슈팅해도 충분히 넣었을 것 같은데 왜 저한테 주셨어요?”

“내 발보단 네 머리가 더 믿음직스럽잖아.”

“에이... 그래도...”

“기자회견 때 다에이 감독 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백강아, 난 할 만큼 했으니까 후반전엔 알아서 해라. 알았지?”

지승 선배가 내 어깨를 치며 씩 웃었다.

아... 제발 그렇게 웃지 마요, 선배.

내 심장 터져욧.

* * *

지승 선배의 미친 원맨쇼와 실점은 이란 녀석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여기에 전반전 오버페이스의 후유증까지 겹쳐, 후반전에는 좀처럼 기민하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 대표팀 볼 순환의 핵심인 중앙 미드필더 기성영은 상대 압박이 좀 느슨해지자, 본인의 장기인 정확한 롱패스를 필드 여기저기에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기를로’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플레이였다.

전방으로의 패스 공급이 원활해지자, 존재감이 부족했던 윙어 이창용과 내 투톱 파트너 이건호의 움직임도 덩달아 살아났다.

이건 이란 입장에서는 최악의 전개.

한국의 측면 공격이 먹히기 시작한다는 건 정백강의 득점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상한다는 걸 의미했으니...

꾸역꾸역 막아냈지만 후반 13분, 기어이 동점골이 터졌다.

상대 오프사이드 라인을 완전히 무너뜨린 이건호에게 기성영의 대지를 가르는 스루패스가 연결되었고, 우측면에서 편하게 올린 크로스가 내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버린 것이다.

라마티 골키퍼가 손을 뻗을 엄두를 못 낼 정도로 강렬한 헤더슛이었다.

극단적으로 높은 수비라인을 유지하느라 신장은 좀 작아도 발이 빠른 선수들로 4백을 구성한 다에이 감독이었는데, 이 쪼꼬미들은 공중에서 나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자승자박(自繩自縛).

뭐, 좀 큰 애들이 나왔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0-2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다에이 감독이 급히 코치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내 시야에 잡혔다.

미안한데 이미 늦었어요, 이 양반아.

제가 그라운드의 신사긴 하지만, 어차피 관중석에는 슬퍼하실 레이디도 안 계시니 골 좀 더 넣겠습니다.

측면이 자꾸 뚫리자 다에이 감독이 풀백 교체를 단행했다.

이에 화답하듯 허종무 감독은 많이 뛴 이창용을 빼고 ‘왼발의 마술사’ 염기헌 선배를 투입.

이 용병술 대결은 결과적으로 허종무 감독의 완승.

염기헌 선배가 잔디를 밟자마자, 지승 선배가 과감한 측면 돌파로 코너킥을 얻어냈다.

5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 가장 정교한 왼발 킥을 자랑하는 기헌 선배의 코너킥이 날카롭게 휘어지며 나에게로 빨려 들어왔다.

가볍게 해트트릭.

역전과 함께 경기는 사실상 끝났다.

축구라는 스포츠도 결국 분위기를 타게 마련.

지승 선배의 기지로 위기를 극복하고 모멘텀을 가져온 우리 대표팀은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이란을 사정없이 몰아붙였고, 꽉 차 있던 경기장에는 빈자리가 점점 늘어만 갔다.

후반 46분 터진 지승 선배의 골을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

이 골은 내가 머리로 어시스트했다.

“왜 패스했어? 그냥 내려찍었으면 골이었을 텐데.”

“제 머리보다는 선배 발이 더 믿음직스럽잖아요.”

“하여간 말은 잘해요.”

아까는 어깨를 두드리던 지승 선배가 이번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심쿵...

* * *

[대한민국, 이란 6-2로 물리치고 B조 1위 자리 굳혀]

[13년 만에 돌려준 ‘그 스코어’, 상대 전적 균형도 깼다]

[정백강, 5골 1어시스트 원맨쇼... 이것이 바로 ‘월드클래스’]

아아, 192cm가 이렇게 작은 키였던가.

초췌한 모습으로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다에이 감독이 쭈구리처럼 마이크 앞에 앉았다.

어깨도 축 처져 있고, 삽시간에 20년은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게 왜 자극을 하고 그랬어요.

나 원래 나쁜 사람 아닌데.

기자회견이고 나발이고 할 기분이 아닐 텐데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은퇴해도 감독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 오늘 경기 패인은 뭐라고 생각하나?

“2-0을 만들 때까지는 완벽했다. 내 생각대로 경기가 흘러갔고, 선수들도 골로 방점을 찍어 주었다. 다만 후반전 들면서 체력 저하가 심했고 수비 집중력도 심하게 떨어졌다.”

- 정백강을 봉쇄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다섯 골이나 허용하고 말았다.

“...”

- 답변을 부탁드린다.

“하...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백강은 영상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선수였다. 훨씬 파워풀하고 위력적이었다. 내 발언이 경솔했음을 인정한다.”

큭큭큭, 그럼요. 경솔하셨죠.

그래도 인정하는 모습은 보기 좋네요.

아직 한 경기 더 남았으니까, 그때는 가볍게 해트트릭 정도로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다음 경기는 장소가 서울이죠?

그러면 또 5골 각인데... 이걸 어쩌나...

오늘 MOM으로 선정된 내가 한국 선수 대표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 믿을 수 없는 활약이었다. 득점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다섯 골은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수비라인을 끌어올린 이란의 전술은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전반 막판 박지승 선배의 엄청난 돌파 한 방이 경기 분위기를 확 바꿔 버렸다. 좋은 기회를 제게 양보해주신 덕분에 헤더 감각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었고, 덕분에 후반전에 네 골을 더 득점할 힘을 얻었다. 지승 선배를 비롯해 오늘 기가 막힌 패스를 해준 동료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 오늘 승리하면서 월드컵 본선 무대 진출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만약 진출한다면 생애 첫 월드컵인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찬 무대 아니겠는가. 엄청나게 기대가 크다. 물론 아직 예선 경기가 많이 남아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다. 끝까지 좋은 모습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 만약 본선에 간다면, 한국 축구의 숙원 중 하나인 ‘원정 16강’을 반드시 달성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밀라노에 있는 집에 창고용 방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부터 날아오는 팬레터와 택배가 너무 많아서다. 경기가 잘 안 풀리거나 유독 힘든 날에는 그 방에 가서 편지를 읽으며 기운을 얻곤 한다. 팬분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정백강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나의 제1호 팬인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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