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빡세디 빡센 이란 원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더니, 또 빡세디 빡센 경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2008-2009 시즌의 마지막 밀라노 더비.
지난 시즌 5위에 그친 밀란이 챔피언스리그는 아예 못 나갔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라치오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하는 바람에 앞으로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었다.
서로가 꼭 이겨야 하는 더비 경기이긴 하지만 더 간절한 쪽은 역시 밀란.
UEFA컵에서도 32강에서 베르더 브레멘에게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탈락, 꼴랑 리그 하나 남았으니...
어느덧 23라운드까지 치러진 세리에 A.
리그 선두는 단연 우리 인테르였다.
20승 3무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과시하며 승점 63점을 마크.
그 밑으로는 유벤투스와 밀란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2위 유벤투스가 17승 3무 3패에 승점 54점.
3위 밀란이 16승 5무 2패로 승점 53점.
밀란 입장에서 스쿠데토를 향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남겨두기 위해서는 이번 더비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둬야 했다.
“모든 것을 걸고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임전 소감이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비장하다, 비장해.
이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응답은?
“굳이 죽지 않을 정도로 싸워도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한다.”
누가 혀리뉴 아니랄까봐.
명불허전이다.
* * *
뭐를 잘못 먹었나.
어젯밤에 야식 먹은 게 얹힌 걸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뱃속이 꾸르륵 꾸르륵 장난이 아니다.
지금 운전하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화장실 들렀다가 집에 가야겠다.
“감독님, 이건 아닙니다! 그 엄청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할 겁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소리의 진원지는 감독실.
이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석코치 주세페 바레시가 분명하다.
바레시는 현역 시절 인테르에서 무려 392경기나 출장했던 레전드 미드필더.
이름에서 짐작하겠지만 축구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전설적인 수비수 프랑코 바레시의 친형이다.
동생이 밀란의 슈퍼 레전드인데, 친형이 인테르의 레전드라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둘이 같이 인테르 입단 테스트를 봤는데, 동생의 키가 작다는 이유로 형만 합격한 것이다.
당시 인테르의 테스트 담당자가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탈리아, 아니 전 세계의 축구 역사가 완전히 뒤바뀔 뻔했다.
요즘같이 금방 신상 털리는 시대였으면 인테르 팬들한테 테러를 당했을지도...
아이고, 배야.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너무 궁금해서 못 가겠다.
무리뉴 감독이 듣고만 있는지 계속해서 바레시 코치의 목소리만 들린다.
“발로텔리와 산톤이라니요. 원석임에는 분명하지만, 둘 다 아직 어린아이들입니다. 생각을 바꾸시죠.”
이거 흥미로운걸.
아무래도 무리뉴 감독이 밀라노 더비에서 마리오 발로탈리와 다비데 산톤을 주전으로 쓸 건가 보다.
둘 다 ‘낭랑 18세’의 유망주.
물론 약체들과 붙을 때는 주전으로 뛴 적도 있기는 하다.
으윽, 내 위장아... 좀 참아 봐!
“코치님의 의견은 존중합니다만... 라인업은 바꾸지 않겠습니다.”
“감독님!”
“피구는 은퇴를 앞두고 있고, 막스웰은 좋은 선수지만 ‘특별한 선수’는 아닙니다. 나는 우리 팀이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그 두 녀석에게는 뛰어난 재능이 있고, 밀란과의 경기를 통해 경험을 쌓고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밀라노 더비는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입니다!”
응?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
언제 들었더라...
“이번 한 번만 제 뜻에 따라주시죠.”
“언제나 감독님 뜻대로 하지 않습니까?”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바레시 코치가 쌓인 게 많았었구나.
“밖에 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독님.”
어이쿠, 걸렸다.
비록 필드에선 느리지만 이럴 땐 민첩하게...
아무래도 근심은 집에 가서 해결해야겠다.
괄약근아, 버텨다오!
* * *
<신(新)과 구(舊)의 대결!>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 출전할 선발 명단이 공개되자 언론들이 붙인 캐치프레이즈였다.
우리 팀의 베스트 일레븐 평균 연령은 만으로 25.7세.
반면 밀란은 무려 만 30.2세였다.
무리뉴 감독은 결국 고집을 꺾지 않았고, 오른쪽 윙에 마리오 발로텔리, 왼쪽 풀백에는 다비데 산톤을 내보내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세간의 반응은 대체로 바레시 코치와 비슷했다.
특히 밀란 팬들은 아주 격한 반응을 보였는데, 저런 애송이들을 둘이나 출전시킨 건 자신들에 대한 모독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근데...
님들 원톱인 알레산드로 파투도 19세입니다만?
‘내로남불’은 역시 만국 공통인가보다.
가만, 파투가 평균을 깎아주는데도 30살이 넘는단 말이야?
‘밀란 노인정’이란 명성(?)이 헛된 게 아니었어.
애니웨이.
경기 전 몸을 푸는데 아무래도 산톤에게 신경이 쓰인다.
너무 잘생겨서 평소엔 좀 싫어했던 녀석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 있다.
후... 이 백강 선배가 나설 타이밍인가.
“산톤, 괜찮아?”
“으... 응.”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사실 잠을 잘 못 잤어. 이런 큰 경기는 처음이라...”
우리 산톤 애기, 바짝 얼었구나?
“내가 비법 하나 알려줄까?”
“비법이라니?”
“긴장을 푸는 나만의 비법, 들어볼래?”
“응, 알려줘.”
귀엽다 귀여워.
얼굴만 좀 덜 잘생겼어도 더 귀여웠을 텐데.
역시 문타리에게는 못 미치는구나.
“겁나는 선수의 약점을 쭉 떠올려 보는 거야. 예를 들어, 나는 공격수니까 ‘말디니는 노쇠화로 인해 반응속도가 느려졌다’ 이런 식이지.”
“흠...”
“누가 제일 겁나?”
“히카르두 카카.”
선배 노릇 하려다가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카카의 약점이 뭐지?
타... 탈장?
그건 몇 년 후 얘긴데...
하지만 나의 노련함은 탈출구를 찾았다.
“에이, 그건 바보 같은 걱정이네.”
“어째서?”
“카카는 중앙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잖아. 너랑 매치업될 일이 없을걸?”
“그... 그럴까?”
“나만 믿어. 카카는 절대 네 쪽으로 안 갈 거야. 나한테 크로스나 잘 줘. 너 아직 공격포인트 없잖아? 내가 챙겨줄게.”
“그래, 고마워 백강.”
휴... 자칫하면 민망한 상황이 생길 뻔했다.
산톤을 성공적으로 케어했으니 다음엔 발로텔리인가.
“발로텔리! 컨디션 어때?”
“응, 개좋아!”
“...”
됐다, 말을 말자.
바레시 코치님.
산톤은 몰라도 발로텔리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녀석은 종자가 달라요, 종자가.
* * *
우우우우우우우-----
어느덧 두 번째로 경험하는 밀라노 더비지만, 이 살벌한 경기장 분위기는 당최 적응이 되지 않는다.
다들 과몰입 자제요.
커다란 마음으로 보면 이건 공놀이에요, 공놀이.
우리는 이번 시즌 극강 성적의 원동력인 4-2-3-1 포메이션을 오늘도 변함없이 들고 나왔다.
밀란 역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자랑하는 4-3-2-1 ‘크리스마스트리’ 전형으로 맞대응.
파투-카카-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전방의 브라질 3인방은 여전했지만, 그 뒤를 받치는 3미들의 구성원은 좀 바뀌었다.
지난 경기에서 부상으로 결장했던 안드레아 피를로가 젠나로 가투소 대신 출전했고, 최근 부진한 클라렌스 세도르프 대신 LA 갤럭시에서 임대 온 데이비드 베컴이 포진했다.
유명세는 좀 떨어지지만 이번 시즌 밀란 중원의 핵심인 ‘암자물쇠’ 마시모 암브로시니는 1차전에 이어 오늘도 선발로 나섰다.
킥오프.
밀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마치 짠 것처럼 몇 번의 패스에 이어 피를로에게 전해지는 공.
너무 뻔한 거 아닙니까?
슈퍼스타 정백강이 피를로 앞에 떡 버티고 섰다.
나와 뭘 해볼 생각이 없는 듯 피를로가 베컴에게 짧은 패스를 연결.
그러자 문타리가 득달같이 달려와 베컴에게 붙었다.
이것이 바로 ‘포츠머스 콤비’인 나와 문타리에게 내려진 임무.
나는 피를로, 문타리는 베컴을 경기 종료까지 거머리처럼 붙어 따라다니라는 특명을 받았다.
뻐엉-----
아니, 타리야.
더 타이트하게 붙었어야지.
방해를 뚫고 날린 장거리 로빙 패스가 오른쪽 측면으로 쇄도하는 카카에게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진짜 킥력 하나는...
괜히 베컴이 아니다.
바늘구멍만 한 틈으로도 초정밀 패스를 날릴 수 있는 선수 아니겠는가.
근데 잠깐만, 오른쪽 측면이라고라?
내가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건만, 경기 시작하자마자 카카와 산톤의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미안, 쏘리, 스꾸사미.
이는 필시 여우 같은 안첼로티 감독의 지시이리라.
잔뜩 긴장해 있을 산톤 쪽을 집중 공략해서 우리 수비진을 흔들겠다는 책략.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툭 치고 나가며 스피드를 살린 돌파로 산톤을 벗겨내는 카카.
원래 산톤도 그렇게 느린 선수는 아니었지만, 몸이 굳어 있어서인지 반응이 늦었다.
퍼억-----
산톤이 무력하게 뚫리며 큰일이 났나 싶었는데, 어디선가 혜성처럼 나타난 사네티 주장이 멋들어진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걷어냈다.
파울 아니냐고 항의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태클이었다.
크으... 역시 우리 사주장.
존경합니다.
* * *
카카가 노골적으로 산톤 쪽을 노리면서 몇 차례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했지만, 사주장과 니콜라스 부르디소의 적절한 커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산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감을 찾아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산톤의 재능은 진짜배기.
‘무리뉴 사단’의 핵심 멤버인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코치는 산톤을 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파올로 말디니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립서비스가 좀 섞이긴 했겠지만, 훈련 때도 빛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건 사실이었다.
“문타리! 여기!”
카카의 일대일 시도를 몇 차례 막아내며 자신감을 회복한 산톤이 적극적으로 오버래핑하며 공격에 가담했다.
참고로 유소년 시절 인테르에 합류할 때만 해도 산톤의 포지션은 윙어였다.
공격력 역시 만만찮다는 이야기.
문타리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산톤이 전진을 시작했다.
현란한 헛다리 드리블로 1차 저지선인 베컴을 손쉽게 클리어.
크흑... 베컴 형이 5년만 젊었어도.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베컴이 팔팔한 10대의 움직임을 따라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완전히 탄력받은 산톤의 폭발적인 질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2라운드 상대는 이탈리아 축구의 리빙 레전드 잔루카 잠브로타.
지금은 전성기가 지났지만, 한때는 세계 최고 수준의 풀백으로 불리던 인물.
패기와 노련미의 대결이었다.
우와아아악-----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왼쪽 사이드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가던 산톤이 갑자기 점프하면서 왼발 뒤꿈치로 공을 툭 쳐서 잠브로타의 수비를 떨쳐낸 것.
이후 곧장 오른발로 공을 옮겨 중앙을 향해 파고들었다.
뭐야? 백숏?
자기가 무슨 호날두인 줄 아나.
난 저런 거 못하는데...
대신 다른 건 좀 잘하지.
“산톤! 올려!”
마이콘이 버티고 있는 오른쪽 대신 왼쪽 풀백으로 출전했지만 산톤은 원래 오른발잡이.
지금 같이 반대발 상황에서 올리는 크로스가 오히려 더 정확했다.
파앙-----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내 머리를 겨냥해 휘어져 들어오는 공.
밀란의 전설(오늘따라 왜 이렇게 전설이 많아?) 파올로 말디니가 함께 경합하며 뛰어올랐지만, 나는 노인 공경을 잘 못 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대로 헤더슛... 잠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 사이, 길쭉길쭉한 다리를 놀리며 공간을 잘라먹고 들어오는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발로텔리였다.
상대 오프사이드 라인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
저거, 발만 가져다 대면 골이겠는데?
까짓거 감독님 체면 좀 세워드릴까?
누군가 그랬다.
베컴의 오른발은 센티미터 단위를 조절한다고.
그렇다면 나의 머리는 나노 단위다!
퉁---
미세하게 방향만 살짝 돌려놓은 헤더가 발로텔리의 발 앞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골문과의 거리는 약 2m.
작심하고 때려 넣은 하프발리 슈팅이 그물을 찢을 기세로 꽂혔다.
“야! 뭐해? 하지 마!”
“말려! 빨리 말려!”
“쟤 미쳤나봐!”
깜짝 놀란 동료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생애 처음으로 출전한 밀라노 더비에서 선제골을 넣은 발로텔리는, 그 자리에서 상의를 훌러덩 벗어 버렸다.
열여덟 살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와 적당히 발달한 대흉근, 왕(王)자가 선명한 복근이 드러났다.
그리고 옐로카드.
경고를 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주심도 헛웃음을 지었다.
텔리야, 너 정말 또라이구나?
근데 그러다가 총 맞아, 정말.
이거 밀라노 더비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