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마리오 발로텔리의 도발적인 섹시(?) 세리머니에 흥분한 밀란 팬들이 웅장한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다행히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경기가 더 격해졌을 뿐.
생각해 보면 1차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레산드로 파투의 골이 오프사이드로 취소된 다음에 더욱 달아올랐었다.
하여간 이놈의 더비는 왜 이렇게 거친 건지... 누구 하나 다쳐야 끝나겄어.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마시모 암브로시니가 선전포고를 했다.
“크아악!”
발목을 노리고 들어간 깊은 태클로 즐라탄의 195cm 거구를 쓰러뜨리는 ‘암자물쇠.’
내가 뒤에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건 99.999% 확률로 고의였다.
“이 새끼가...”
“뭐? 뭐? 어쩔 건데?”
빚지고는 못 사는 즐라탄이 벌떡 일어나 으르렁대자 암브로시니도 지지 않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냥 놔뒀다간 한 판 붙을 기세. 급히 달려온 로베르토 로세티 주심이 암브로시니를 향해 옐로카드를 꺼내 들면서 겨우 상황을 정리했다.
인간적으로 밀라노 더비 주심한테는 누가 수고비 좀 더 찔러줘라. 사람 할 짓이 아니야 이건...
아, 그러다가 칼치오폴리가 터졌던 건가?
“더 이상 입을 열면 둘 다 퇴장시키겠습니다.”
그래요, 잘하셨어요. 좀 세게 나갈 필요가 있지.
로세티 주심의 으름장에 즐라탄이 씩씩대며 고개를 홱 돌렸다.
라탄이 형, 한국 속담에 참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이 있어. 형이 먼저 고개 돌렸으니 형이 이긴 거야. 오케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0으로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양 팀 주장들 잠깐 와보세요.”
경기가 과열 양상을 띠자 로세티 주심이 우리 팀 사네티 주장과 밀란의 파올로 말디니를 불렀다.
“후반전부터는 구두 경고 없이 바로 카드 나갑니다. 주의하세요.”
글쎄... 그런다고 분위기가 바뀌려나?
* * *
후반전이 되자 밀란의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승부를 서둘렀다.
데이비드 베컴을 빼고 스트라이커 필리포 인자기를 투입. 만 33세 선수가 만 35세 선수로 바뀌면서 라인업의 평균 연령은 더 높아졌다.
미드필더 숫자가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휑해진 중원의 공백은 양 풀백의 위치를 전진 배치하면서 해결.
측면 역습 기회를 주더라도 무력하게 지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반대로 여유 넘치는 무리뉴 감독은 1-0도 괜찮다는 마인드로 수비적인 경기 운영을 보여주었다.
즐라탄을 제외한 10명의 선수가 모두 방패 모드에 돌입하며 단단하게 진을 쳤다.
“카카만 잘 잡으면 돼!”
사네티 주장이 동료들에게 계속 환기시키는 그 이름, 히카르두 카카.
발롱도르 위너이자 ‘노인정’이라 조롱받는 밀란에서 소년가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사나이.
무너져 가는 팀의 멱살을 잡고 있는 카카가 없었다면, 리그 우승을 노리긴커녕 UEFA컵 진출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반전에는 우리 수비진의 집중 견제에 막혔던 그가 슬슬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원래 밀란의 후방 플레이메이킹은 안드레아 피를로의 담당.
그러나 나의 모기 같은 그림자 수비에 꽁꽁 묶여 있어 피를로가 영 힘을 쓰지 못했다.
답답함을 느꼈는지 카카가 본인 포지션보다 한참 아래로 내려와서 공을 받더니 직접 몰고 전진을 시작했다.
문타리가 어깨싸움을 걸었지만 그대로 튕겨내 버린 카카가 알레산드로 만시니의 태클도 가볍게 뛰어넘었다.
“라인 유지해!”
다음 타자로 사네티 주장이 나서면서 수비진에게 엄중 경고를 내렸다.
지금 카카에게 어그로를 끌리면 절대 안 됐다.
상대 투톱 조합은 발이 빠른 알레산드로 파투와 ‘오프사이드 라인에서 태어난 남자’ 인자기.
어설프게 카카를 막으러 나갔다간 스루패스 한 방에 바로 실점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마주한 인테르의 주장과 밀란의 에이스.
카카의 선택은 직접 슈팅이었다.
뻐엉-----
사네티 주장이 카카의 주발인 오른발을 견제하는 틈을 타 왼발로 감아찬 중거리슛.
크게 힘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 절묘한 코스로 휘어져 들어갔다.
텅---
골포스트를 강타하고 골라인 아웃되는 공.
휴우... 심장이야.
이게 들어갔으면 역대급 골이 나올 뻔했다.
위기 뒤에 찬스가 오는 법.
우리의 든든한 수문장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내 머리를 겨냥하고 빠르게 골킥을 연결했다.
이 공을 누구한테 떨궈 줄... 어라?
쿵---
눈앞이 번쩍거렸고 척추가 놀라서 찌릿한 비명을 질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랬지?”
이건 즐라탄.
“퇴장이요! 퇴장! 백강, 괜찮아?”
이건 문타리의 목소리.
고성과 욕설이 난무한다.
에혀, 내가 끼어들면 더 복잡해질 것 같으니 잠깐 누워서 쉬자.
* * *
“백강, 괜찮나?”
“네, 코치님.”
“곧 정밀 검사에 들어갈 걸세.”
“안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인가? 검사는 받아야지. 자네는 우리 팀의 보물이야.”
“네... 근데 여기 오셔도 되나요? 아직 경기 중인데...”
“감독님 지시일세. 지금쯤이면 경기가 끝났겠군. 경기 결과 좀 볼까?”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들었다.
오, 코치님. 생각보다 젊게 사시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석코치를 나에게 딸려 보내다니. 무리뉴의 백강 사랑은 정말 못 말린다.
“2-0으로 이겼네. 즐라탄이 한 골 더 넣었군. 산톤 녀석이 기어이 어시스트를. 허허, 이거 감독님 보기 민망하게 됐는걸?”
“왜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
<대부>의 말론 브란도도 울고 갈 메소드 연기.
“밀라노 더비에 애송이들을 넣으면 절대 안 된다고 감독님을 말렸었거든. 근데 그 애송이들이 골도 넣고 어시스트도 해버렸군. 나도 감이 벌써 떨어졌나 봐.”
코치님은 모르시겠지만 발로텔리 골은 자기 실력이 아니었답니다. 제가 넣게 밀어준 거죠.
그나저나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더니, 산톤이 기어이 해냈구만.
이게 다 정백강의 케어 덕분 아니겠는가.
나의 영향력이란 정말...
애니웨이.
공을 떨궈주기 위해 공중에 뜬 나를 밀어서 고꾸라뜨린 건 카하베르 칼라제였다.
비교 불가 월등한 높이를 자랑하는 만큼, 떨어졌을 때의 충격도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클 게 뻔한데 그런 파울을 했다는 건?
나를 담가버리겠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로세티 주심은 칼라제에게 곧바로 레드카드를 꺼냈고, 이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우리 팀의 즐라탄, 문타리, 발로텔리가 경고를 받았고 밀란에서는 잔루카 잠브로타, 피를로, 암브로시니가 옐로카드를 받아들었다.
발로텔리와 암브로시니는 두 번째 경고로 사이좋게 퇴장.
으이그... 웃통은 괜히 왜 벗어가지고 퇴장을 당하냐, 텔리야.
“정백강 선수, 들어가시죠.”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지루한 검사가 시작되었다.
엑스레이, CT, MRI, 일어나 보세요, 걸어 보세요, 허리를 돌려 보세요, 고개를 숙여 보세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이거 보세요, 코치님. 제가 그랬잖아요. 검사 필요 없다니까?
그러나 바레시 코치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말입니까? 엄청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네, 문제가 될 만한 소견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허허, 그것 참...”
내 미친 헤더가 회귀의 산물이라면, 부상 면역 수준인 나의 신체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트럭 정도는 끌고 와야 나를 다치게 할 수 있지, 암.
경기가 끝난 뒤 바로 병원으로 달려온 동료들도 내가 멀쩡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떨어질 때 진짜 ‘쿵’ 소리가 났다니까?”
“갈비뼈 몇 개 나가야 정상인데...”
“혹시 뇌를 다쳐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게 아닐까?”
병문안 멤버 중에는 발로텔리도 있었다.
녀석, 평소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이지.
사실은 나를 흠모하고 있었구나?
“나 때문에 싸워줘서 고마워.”
“응? 난 그냥 재밌어 보여서 붙은 건데? 심판이 뜯어말려서 김이 확 샜지만 말이야.”
“...”
쟤랑은 그냥 말을 말자.
* * *
정밀 검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무리뉴 감독은 내게 ‘절대 휴식령’을 내렸다.
팀 훈련은 물론, 나흘 뒤에 있을 볼로냐와의 리그 경기도 결장 확정.
물론 아무 이유 없이 쉬라는 건 아니었다.
볼로냐전 다음 경기가 대망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이었으니 모든 포커스를 거기다 맞춘 것.
생각도 못 하게 얻은 시즌 중의 달콤한 휴가.
그동안 밀린 잠을 몰아서 푹 자고 일어나니 오후 1시.
14시간 잤나? 보통이군.
무엇을 먹을까요 알아맞춰 봅시다, 딩동댕동!
오소리 당첨이군.
한국에서 오는 택배가 하도 많아서 라면 떨어질 걱정은 없다.
몸 관리하느라 자주 먹진 못하지만, 오늘은 휴일이니까 먹어도 되겠지.
다 끓은 라면 냄비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자 문득 옛 생각이 난다.
“잘 먹겠습니다.”
나밖에 없는 집이지만 괜히 인사를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후루룩- 드르륵-
원래 한 젓가락 할 때마다 마우스 스크롤 내려주는 게 국룰인데, 이탈리아에선 두 젓가락에 스크롤 한 번이다.
인터넷이 더럽게 느리기 때문.
이럴 땐 정말 한국이 그립다.
- AC밀란 홈페이지 공격하실 분 찾습니다.
- 칼라제 그 미친 새끼는 동업자 정신도 없나?
- 정백강 부상당했으면 테러하러 밀라노행 티켓 끊었다 진짜 ㅡㅡ
- 우리 백강님 안 다쳐서 천만다행 ㅠㅠ
- 칼라제의 나라 조지아 물건 불매운동 고고!
한국 축구 커뮤니티를 눈팅해 보니 예상대로 팬들의 분노가 어마어마했다. 근데 조지아에서 수입하는 품목이 있던가?
- 저 눈 찢어진 녀석 오버하며 넘어지는 꼴 좀 봐라.
- 오버? 승부조작 구단 수준하고는... 거기다 인종차별까지... 쯧쯧...
- 공 찰 줄은 알아? 머리밖에 못 쓰는 반쪽짜리!
- 응, 그래서 리그 득점 1위.
유튜브에 올라온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에서도 댓글을 통해 양 팀 팬들이 엄청난 키보드 배틀을 벌이고 있었다.
재밌네.
열심히 활동하는 ‘어둠의 기사’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악플은 내게 별 타격을 주지 못한다.
진짜 못하는 선수는 경기에 뛰지 못하고, 당연히 악플조차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자, 노는 건 이쯤 하고 이제 일 좀 할까?
냄비를 싱크대 안쪽으로 치워버리고 구단에서 보내준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 분석 자료를 집어 들었다.
어디 보자... 챔스 조별리그에서 4승 2패... 유벤투스한테만 두 번 졌네?
우리는 유벤투스한테 이겼으니 짱깨 논리로 하면 이미 승패는 결정난 거나 다름없다.
[3골로 챔스 팀 최다 득점자인 반 니스텔루이의 부상 이탈 악재.]
반니가 없다니. 그럼 라울하고 곤살로 이과인이 투톱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겠군.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당시의 이과인은 챔스에서 더럽게 못하는 선수였다.
반대로 라울은 자타가 공인하는 ‘챔스의 사나이’.
동료들한테 라울 위주로 막으라고 귀띔을 좀 해줘야겠어.
[라사나 디아라-페르난도 가고가 더블 볼란치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됨.]
반가운 이름이 등장했다. 포츠머스에서 함께 뒤었던 디아라.
옛 동료를 상대로 이긴다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지는 건 더 가슴 찢어지는 일이지만.
아니,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라 상대 수비진을 좀 보자. 대충은 알고 있지만 말이지.
[리그에서는 가브리엘 에인세-파비오 칸나바로-페페-세르히오 라모스 조합이 주로 출전함. 그러나 정백강의 높이를 의식하여 라모스를 센터백으로 돌릴 가능성도 있음.]
그러든가 말든가.
라모스 정도야 뛰어봤자 벼룩이지.
[리그와 챔스에서의 성적을 종합했을 때 전력에서는 우리 팀의 확연한 우위. 단, 베른트 슈스터 감독 경질 이후 후안데 라모스가 부임하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점은 불안요소.]
마지막 문장은 그냥 노파심처럼 보이네.
레알 마드리드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단지 내가 몇 골을 넣느냐가 중요할 뿐.
그나저나 경기까진 한참 남았는데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냐.
이게 다 칼라제 때문이다.
오늘부터 조지아 불매운동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