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009년 2월 25일.
이번 시즌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최다 관중 기록이 경신됐다.
공식 집계된 수치는 정확히 80,018명.
2008-2009 챔피언스리그 16강 최고의 매치인 인테르 VS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보러 온 팬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백강, 너는 떨리지도 않냐?”
“왜? 떨려?”
“나 올해가 챔스 처음이잖아. 조별리그까지는 괜찮았는데, 16강은 좀 느낌이 다르네. 지면 탈락이잖아.”
“아마추어 같기는.”
우리 문타리 형이 많이 얼어 있다.
긴장해서 말도 잘 안 나오는지 욥욥대며 입술을 오므리는 모습이 그렇게 깜찍할 수가 없다.
태연한 척 했지만 나라고 해서 왜 긴장이 안 되겠는가.
월드컵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라고 할 수 있으니...
앞으로 챔스에서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를 때마다 내 커리어에 의미 있는 족적이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백강, 잘 지냈어?”
“라스! 오랜만이야.”
“이런 자리에서 만날 줄이야.”
“그러게.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지.”
“오늘 경기에 대해선 미리 사과할게.”
“어유, 내가 미안하지. 옛정을 생각해서 2골만 넣을게.”
영입 당시만 해도 의문 부호가 붙었으나, 어느새 레알 중원의 핵심 선수로 떠오른 라사나 디아라.
문타리까지 하면 경기장에 포츠머스 출신만 셋이었다.
보고 계십니까? 레드냅 감독님.
당신이 키운 선수들이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아, 물론 레드냅 감독님은 멀쩡히 살아 계신다.
[Die Meister, Die Besten,
Les grandes équipes, The champions!!!]
듣기만 해도 마음이 경건해지는 웅장한 챔스 주제가가 끝나고 양 팀 모두 각자의 진영에 자리를 잡았다.
4-4-2 포메이션을 가동한 레알의 라인업은 우리 전력분석관의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라울과 곤살로 이과인이 투톱으로 나섰으며, 라사나 디아라와 페르난도 가고가 미드필드 지역을 책임지고, 양쪽 윙에는 마르셀루와 아르연 로벤이 출격.
파비오 칸나바로 대신 세르히오 라모스가 센터백으로 출전할 것까지 맞췄다.
이 정도 적중률이면 로또를 한 번 사보시지.
킥오프.
레알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문타리! 로벤 쪽으로 붙어줘, 가고는 내가 마크할게!”
“오케이.”
이번 시즌 레알이 처한 어려움 중 하나가 중원에서의 창의성 부족이었다.
패싱력 자체는 구티가 가장 뛰어났으나 기복이 너무 심했고, 가고는 괜찮은 선수였지만 월드클래스는 분명 아니었다.
로벤의 드리블 돌파 변수만 제어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 수비진이 고전하는 그림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지네딘 지단과 루이스 피구를 동시에 보유했던 팀이건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가고의 약점 : 피지컬한 압박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리포트의 내용을 떠올리며 가고에게 바싹 붙었다. 키가 나보다 10cm가량 작고 체구 역시 가녀린 가고.
또 이런 애들 상대로 수비하는 맛이 있지.
“세르히오!”
따끔한 맛을 좀 보여주려 했더니 가고가 미련 없이 라모스에게 공을 돌려 버렸다.
이거 재미없게 왜 이래? 내가 무서워?
라모스는 대표적인 ‘빌드업 되는’ 수비수.
집중 견제 대상인 로벤 대신 왼쪽 측면의 마르셀루에게 긴 땅볼 패스를 전달했다.
오래지 않아 레알 부동의 왼쪽 풀백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마르셀루.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종종 윙어로 출장하곤 했다.
뭐, 기술이야 워낙 좋은 선수니...
최근 활약을 인정받아 오늘도 선발로 나선 마리오 발로텔리가 붙었지만, 브라질리언 특유의 리듬감 넘치는 드리블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쉽게 뚫려 버렸다.
애초에 수비 의지가 크게 없어 보였다는 건 함정.
우리 진영까지 거침없이 진격한 마르셀루가 날카로운 크로스를 날렸다.
택배 수령인은 이과인.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크로스였지만 이과인의 헤더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명불허전 ‘챔스의 이과인’이었다.
“나이스 헤더!”
이과인을 마크하고 있던 크리스티안 키부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신경을 긁었다.
오우, 얄미워.
키부가 우리 팀이라 정말 다행이야.
* * *
레알에 이과인이 있다면 우리 팀에는 즐라탄이 있었다.
오늘 경기 전까지 챔스에서 59경기나 출전했지만 고작 17골밖에 넣지 못했다. 경기당 0.3골이 채 안 되는 수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즐라탄인데, 높은 기대치에 비하면 챔스 활약은 늘 아쉬운 선수였다.
본인도 의식하고 있는지 오늘따라 유독 중거리슛 시도가 많았다.
물론 힘이 잔뜩 들어간 슈팅은 대부분 장외 홈런.
레알 수비진은 노골적으로 즐라탄에게 슈팅 공간을 열어주면서, 옛날 복권 추첨 풍경처럼 ‘쏘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흥분 좀 가라앉히고. 볼 돌리면서 천천히 하자.”
“... 그래...”
자존심 강하고 안하무인인 캐릭터지만, 그래도 즐라탄이 내 말은 잘 들어주는 편이다.
오늘 레알의 양쪽 풀백을 맡은 가브리엘 에인세와 미겔 토레스는 오버래핑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원정 경기라는 점도 있고, 무엇보다 측면에서는 절대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
중앙에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경기라면 역시 ‘그거’지.
나는 페페를 등진 상태에서 호시탐탐 침투를 노렸고, 전반 28분경 드디어 찬스가 찾아왔다.
“백강!”
즐라탄이 높게 로빙패스를 띄워주는 순간, 휙 돌아서 페페를 따돌리며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레알의 수호신 이케르 카시야스가 오른쪽에 치우쳐 있어 골문 왼쪽이 휑했다.
이렇게 또 골인가?
텅 빈 왼쪽 골문을 향해 헤더슛을 날리며 세리머니를 뭘로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퍼엉---
어느샌가 나타난 라모스가 헤더로 실점 위기를 완벽하게 막아낸 것.
높이 떠서 골라인 밖으로 나가는 공.
골을 확신하고 나를 안아주기 위해 두 팔 벌려 달려오던 문타리가 그 자리에 딱 멈춰서며 비명을 질렀다.
“미친! 저걸 막는다고?”
거의 손안에 들어왔던 골이 날아가 버린 상황.
허탈했지만 아직 우리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코너킥 찬스.
문타리가 키커로 나섰다.
“좀 떨어지지?”
“그렇겐 안 되겠는데.”
“둘이나 붙다니 너무 치사한 거 아냐?”
“입 다물어.”
“유니폼 좀 놔라.”
“싫다면?”
라모스하고 페페한테 더블팀 당해 봤는가?
안 당해봤으면 말을 마라.
실력 뛰어나고 피지컬 좋고 성깔까지 더러운 월클 수비수 두 명의 견제를 뚫고 골을 넣는다는 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알에서 제공권 제일 좋은 두 명이 나한테 붙었는데, 인간적으로 우리 팀에서 좀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내 상황이 여의치 않자 문타리가 마음을 바꿔 즐라탄 쪽을 노리며 코너킥을 시도했다.
좋은 판단이다, 가자! 라탄이 형!
압도적인 높이를 과시하며 마르셀루와의 경합에서 승리한 즐라탄이 작정하고 찍은 헤더!
회심의 슈팅이 벌떡 일어난 관중들을 향해 날아갔다.
에이, 이러니까 저 형이 챔스 우승을 못 했지.
모든 결과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 * *
조심스럽게 다득점 승리도 노렸던 경기.
그러나 레알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
점유율 자체는 우리가 훨씬 높게 가져갔으나, 나의 헤더슛을 제외하면 결정적 찬스라 부를 만한 상황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결국 전반전은 0-0으로 마무리.
라모스-페페의 센터백 라인에 끝판왕 카시야스가 버티고 있는 레알의 최후방은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이런 팀이 왜 리그에선 죽을 쑤고 있는 거지?
무리뉴 감독이 16강 대진 결정 이후 평소답지 않게 ‘겸손한’ 인터뷰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반전에는... 히카르두가 나간다. 마리오가 최전방으로 올라가고. 즐라탄, 오늘은 이만 쉬자.”
어느 정도 예상된 교체였다.
“네... 알겠습니다...”
레알을 상대로 챔스에 약하다는 이미지를 벗고 싶었을 텐데.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
또 한 번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조기 교체되고 말았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즐라탄 아니겠는가.
아마 지금 속이 아주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콰레스마가 나오면서 우리도 4-4-2 포메이션으로 전환되었다.
후반전은 우리의 선공.
“언제 패스가 나갈지 모르니까 열심히 움직여.”
“너도 마찬가지야, 백강. 절대 놓치치 말라고.”
발로텔리와 투톱으로 호흡을 맞추는 건 처음이다.
언뜻 생각하면 즐라탄보단 잘 맞을 것 같은데,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감이 안 잡히네.
“여기!”
킥오프 후 새로 투입된 콰레스마가 공을 요구했다.
오른쪽 윙 자리에 발로텔리가 선발로 나오는 경기가 많아지면서, 점점 팀 내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콰레스마.
오늘같이 큰 경기에서 무리뉴 감독의 눈도장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리라.
측은지심이 동한 문타리가 콰레스마에게 공을 전달했다.
방금 투입됐으니 체력은 아주 넘치는 상황.
뒤도 안 돌아보고 드리블을 시작하는 콰레스마였다.
형, 형이 그래서 발로텔리한테 밀리는 거야.
공만 좀 덜 끌면 훨씬 좋을 텐데...
수비력이 약한 편인 마르셀루는 손쉽게 제쳤지만, 에인세는 만만찮은 상대. 강렬한 슬라이딩 태클로 멋지게 공격을 끊어냈다.
우리 팀의 스로인.
“헤이! 바로 줘!”
발로텔리가 크게 소리치며 공을 받아주러 달려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 콰레스마가 깜짝 놀라서 빠르게 공을 던졌다.
툭--- 뻥---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발로텔리가 공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시저스 킥으로 공을 높게 띄워 찼다.
다른 팀에서 했다면 대책 없는 본헤드 플레이라고 질책을 받았겠으나...
인테르에는 정백강이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올라온 크로스.
천하의 라-페-카라도 대응하기 어려웠다.
발로텔리 녀석, 나를 좀 이용할 줄 아는구나?
콰앙--- 철썩---
그렇지, 바로 이 느낌이지.
후반 5분, 그렇게도 기다리던 선제골이 나의 머리를 통해 터졌다.
“젠장할!”
땅을 치며 소리를 빽 지르는 카시야스.
완벽하게 사각지대를 찌른 공이었으나 카시야스가 거의 막을 뻔했다.
반사신경만큼은 칭찬해 줄게요, 야스 형.
원래 보통 골키퍼라면 손도 못 쓰는 게 정상이니까요.
“내가 놓치지 말라고 했지?”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기록한 발로텔리가 내 앞으로 다가와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좋았다, 임마. 근데 그런 대책 없는 패스는 나밖에 못 넣는 거 알아?”
“흠... 인정.”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어쩐지 싫지는 않단 말이지.
부디 사고 치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거라.
* * *
[인테르 1-0 레알 마드리드, 예상대로 1차전 제압]
[6경기 8골... 챔스에서도 멈추지 않는 정백강의 득점 질주]
[‘18세’ 마리오 발로텔리, 나이를 믿을 수 없는 맹활약으로 팀 승리 견인]
나의 헤더 선제골은 곧 결승골이 되었다.
여러모로 답답한 구석이 많은 경기였지만, 이럴 때야말로 슈퍼스타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경기 결과를 두고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나만큼이나 발로텔리를 비중 있게 다뤘다.
간만에 등장한 이탈리아산(産) 공격수 유망주니까 호들갑을 떨 만도 했다.
- 밤을 샌 보람이 있었다 ㅠㅠ 역시 정백강 ㅠㅠ
- 지랄탄 때문에 체했다가 백강이 형 덕에 나았습니다
- 즐라탄 진짜 똥.덩.어.리였음 ㅋㅋㅋ 탐욕 개오지더라 ㅇㅇ
- 무링요가 생각이 있으면 2차전에서 즐라탄 빼야 됨. 걔는 그냥 리그용임.
한국 축구팬들은 나에 대한 찬사와 함께 즐라탄에 대한 비난을 퍼부어댔다.
표현이 좀 거칠어서 그렇지 완전히 무시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리그에선 그렇게 잘하는데 왜 챔스만 나가면 베이브 루스가 되는 건지. 친구이자 동료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화나 걸어볼까.
“어, 무슨 일이야? 백강.”
“뭐하고 있어?”
“집에서 호나우두 스페셜 영상 보고 있는데, 왜.”
“아, 알았어. 내일 훈련 때 봐.”
다행히 회복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