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레알 마드리드전에서 심하게 창피를 당했던 즐라탄은, 이어지는 로마와의 리그 경기에서 유독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결과는 깔끔한 해트트릭.
뺨은 레알한테 맞고 애꿎은 로마한테 화풀이를 한 셈이 됐다.
이렇게 잘하는 형이 왜 챔피언스리그만 나가면...
정말 축구란 알 수 없는 스포츠다.
“즐라탄, 레알과의 2차전은 전혀 다를 것이다. 다들 기대해도 좋다.”
이 인터뷰는 물론 즐라탄 본인이 직접 한 것이었다. 봐도 봐도 적응 안 되는 3인칭 화법.
그러나 상황은 그리 녹록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무리뉴 감독이 발표한 2차전 선발 명단에 즐라탄의 이름은 없었다.
나의 중재 덕에 호전됐던 무리뉴와 즐라탄의 관계는 삽시간에 다시 바닥을 치게 되었다.
“제가 왜 빠졌는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나?”
무리뉴 감독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물.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1차전 비디오나 다시 보고 오지 그래?”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혓바닥 싸움에서 즐라탄은 무리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꼭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당연히 무리뉴 감독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다. 선수 기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니까.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즐라탄도 이해가 간다.
해트트릭도 했겠다, 폼 쫙 끌어올리고 대기 중인데 이렇게 큰 경기에서 빠지라니.
내가 즐라탄 입장이었어도 정신적 충격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물론 무식하게 감독한테 들이박지는 않았겠지만.
이처럼 조금은 꺼림칙한 분위기에서 스페인 원정길에 오르게 되었다.
* * *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캄 노우와 함께 손꼽히는 스페인 축구의 성지.
사실 이곳에 온 게 처음은 아니다. 회귀 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물론 관광으로...
엘 클라시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드리드 더비였다는...
없는 살림에 무리해서 티켓팅 성공하고 기쁨에 소리 지르다가 갑자기 현타 세게 와서 소주 빨간 걸로 3병 때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 흑역사는 바이바이.
“고작 한 골 차 리드다. 절대 실점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임하자.”
무리뉴 감독은 4-1-4-1 포메이션으로 단단한 방패를 들고 나왔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즐라탄은 수비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기 때문에, 이런 전략이라면 즐라탄을 벤치에 앉힌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레알은 1차전과 동일하게 4-4-2 전형.
나한테 제대로 막혀서 거의 보이지 않았던 페르난도 가고 대신 구티가 선발로 나왔고, 마르셀루가 왼쪽 풀백, 라파엘 반 더 바르트가 왼쪽 미드필더로 나섰다.
킥오프.
최근 거의 중앙 미드필더로 나오다가 간만에 왼쪽 윙으로 나온 문타리가 먼 거리에서 크로스.
포츠머스 시절 자주 하던 직관적인 공격 패턴을 오랜만에 써먹게 되었다.
톡--- 뻐엉---
간만에 주전 출장한 데얀 스탄코비치가 내가 머리로 떨궈준 공을 지체 없이 중거리 발리슛으로 연결했다.
크로스바를 스치듯 지나가는 공.
크으, 너무 아깝다.
시작하자마자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릴 찬스를 놓쳤다.
“백강! 나 오늘 감이 좋은데?”
“오케이, 쭉쭉 밀어줄게.”
상대 홈이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실점하지 않는 것이 제 1의 목표이기 때문에 중원에서 점유율 싸움을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뻥축구’로 귀결되는데, ‘킥 앤 러시’ 스타일의 축구에서 나만큼 좋은 원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띄워주면 99%의 확률로 공을 따주니까.
반격에 나선 레알은 중원 사령관 구티에게 플레이 메이킹을 맡겼다.
퍼엉---
세르히오 라모스에게 공을 건네받자마자 퉁 때려 넣은 왼발 패스가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던 아르연 로벤에게 연결되었다.
우리 미드필더 숫자가 워낙 많아서 패스길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는데, 구티의 플레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막스웰을 상대로 자신 있게 일대일을 시도하는 로벤. 특유의 박자를 쪼개는 드리블로 주춤주춤 전진하다, 삽시간에 폭발적인 가속을 선보이며 막스웰을 따돌렸다.
커버 온 문타리와 사네티 주장이 동시에 로벤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구티 잡아요! 구티!”
로벤에게 동료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이, 어느새 전진한 구티가 로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앞에 견제하는 선수가 아무도 없는 완벽한 중거리슛 찬스. 로벤의 침착한 땅볼 패스가 딱 때리기 좋은 위치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원기옥을 모으듯 양팔을 쫙 펼치며 디딤발을 가져가는 구티.
센터백 이반 코르도바가 몸으로라도 막을 각오로 황급히 뛰어나왔다.
툭---
당했다.
완벽하게.
구티의 선택은 슈팅이 아닌 스루패스.
코르도바가 없는 공간을 파고든 선수는 레알의 위대한 주장, 라울 곤살레스였다.
파앙---
크게 힘을 주지 않고 깔아 찬 슈팅이 줄리우 세자르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지나 그물에 폭 안겼다.
우와아아아아아악!!!
광분한 레알 팬들을 향해 달려간 라울이 양손 엄지로 자신의 백넘버인 ‘7’을 가리켰다.
한층 더 커지는 함성.
거짓말처럼 시간도 전반 7분.
순탄할 줄 알았던 우리 팀의 챔스 8강 진출 여정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었다.
* * *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오늘의 구티는 제대로 ‘그날’이었다.
그날의 구티는 지네딘 지단 부럽지 않다는 농담이 있는데,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 사방팔방으로 뿌려주는 패스의 질이 장난이 아니었다.
1차전에서 가고의 부진 속에 공격 조립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레알은, 구티의 지휘 아래 위협적인 장면을 여럿 연출했다.
원래 탈압박 능력이 약점으로 알려진 구티였으나, 수비가 채 붙기도 전에 원터치 패스를 뻥뻥 때려대니 어설프게 압박했다간 괜히 체력만 소모하는 꼴이 되었다.
로벤도 몸이 가벼워 보였고, 이미 골맛을 본 라울은 말할 것도 없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곤살로 이과인마저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활발한 움직임으로 우리 수비진에게 부담을 안겨 주었다.
게임 ‘위닝일레븐’에 비유하면 레알 선수들의 컨디션이 ‘발딱 섰다’고나 할까?
이렇게 일방적인 경기 양상이 펼쳐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축구는 기세 싸움.
이른 시간에 동점골(합산 스코어 1-1)을 허용한 데다가 원정이라는 심리적 압박까지 더해져, 철옹성 같던 우리 수비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전반 39분.
절대 허용해선 안될 추가골이 터지고야 말았다.
단독 돌파로 막스웰과 코르도바를 유린한 로벤이 페널티박스 바로 앞에서 감아 찬 왼발 슈팅.
임팩트 되는 순간 골임을 직감한 로벤이 바로 세리머니 준비에 들어갔다.
로벤의 클래스를 입증하는, 말 그대로 환상적인 골이었다.
삑--- 삑---
복싱에서 흔히 ‘공이 살렸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말 휘슬이 우리 팀을 살렸다.
단 한 개의 유효슈팅도 기록하지 못하는 졸전 끝에 0-2로 전반전 종료.
“미안하다.”
호된 질책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무리뉴 감독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고작 한 골 앞선 걸로 만족해서는 안 됐는데, 어리석게도 무승부 전략을 들고 나온 나의 실책이다.”
45분 동안 로벤을 상대하며 명왕성까지 관광 다녀온 막스웰이 물러나고, 그 자리는 다비데 산톤이 대신했다.
“로벤 상대로 오른쪽은 열어줘도 돼.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만 확실하게 막아 줘. 그것만 하면 네 몫은 다한 거다, 산톤.”
사네티 주장이 잔뜩 긴장한 18세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독려했다. 오른발잡이라는 이점을 수비에서 활용할 때였다.
“백강.”
“네, 감독님.”
무리뉴 감독이 나를 은근한 목소리로 부른다는 건 아주 중요한 지시를 내리겠다는 의미.
“후반전에는 감독이 되어다오.”
“감독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우리 공격진 중에 가장 축구 지능이 높은 게 바로 너야. 문타리와 발로텔리는 둘 다 나름의 장점이 있는 선수지만 게임을 읽는 눈은 부족하지. 경기장 안에서 네가 잘 이끌어줘야 한다.”
* * *
타산지석(他山之石)일까.
적장 후안데 라모스는 두 골이나 앞서고 있음에도 공세를 늦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비적으로 나서다가 경기를 말아먹게 생긴 무리뉴 감독의 실패로부터 단단히 배운 모양.
선수 교체 없이 그대로 나온 레알 선수진은 총력전으로 세 번째 골 사냥에 나섰다.
0-2와 0-3은 전혀 다른 이야기.
그나마 다행인 건, 산톤이 굉장한 집중력을 선보이며 레알 최강의 크랙인 로벤을 묶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네티 주장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며 오른쪽 돌파를 강제했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크로스는 코르도바와 니콜라스 부르디소 콤비가 올라오는 족족 끊어냈다.
라울과 이과인은 공중 장악력이 좋다고 볼 수는 없는 선수들이었으니.
레알의 또 다른 창 구티는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철저히 근접 마크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반칙도 불사하며 거친 수비로 영향력을 최소화.
한편, 오늘만큼은 수비 가담을 자제하면서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던 나는 시시각각 바뀌는 레알의 전형을 살펴보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거 아무래도 라모스 감독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것 같은데?
삑---
구티를 향해 들어간 캄비아소의 깊은 태클에 프랑크 더블레이케러 주심이 즉각 옐로카드를 꺼내들었다.
“퇴장! 퇴장이죠 이건!”
“개소리하지 마!”
“심판, 얘 방금 욕했는데요?”
분위기가 어수선한 사이, 싸움이 날 조짐이 보이자 신이 나서 달려오는 마리오 발로텔리를 내가 붙잡았다.
“야, 곧 기회가 올 것 같다.”
“기회라니?”
“다음 공격에서 우리가 공을 뺏으면 무조건 너한테 공이 올 거야. 적당히 수비하는 척하다가 앞으로 달려, 알았지?”
“흠...”
“그냥 믿어봐라, 좀.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빵이 나온다니까?”
“알았어.”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발로텔리.
내가 설득해야 할 다음 타자는 마이콘이었다.
“네 귀여운 브라질 후배가 엉큼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오케이. 교육 좀 시켜줘야겠네.”
역시 월드클래스는 다르다.
척하면 척이네.
삑---
한바탕 난리가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레알의 프리킥으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자신의 보디가드로 나선 라사나 디아라와 짧은 월패스를 주고받으며 템포를 조절하던 구티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전방을 향했다.
“지금이다!”
나의 신호와 함께 발로텔리가 레알 진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구티의 장거리 스루패스가 왼쪽 측면을 향해 날아갔다.
왼쪽 미드필더 자리에 있던 반 더 바르트가 중앙으로 이동했고, 자연스럽게 생긴 공간을 향해 달려드는 마르셀루.
하지만 나의 지령에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이콘이 달려 나오며 한발 앞서 공을 끊어냈다.
마르셀루가 전방 깊숙한 지역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른쪽 윙인 발로텔리 앞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
마이콘의 로빙 패스가 텅 빈 필드에 떨어졌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마르셀루를 대신해 공을 향해 달려가는 세르히오 라모스.
수비수치고는 대단한 준족인 라모스였지만, 발로텔리 역시 주력 하면 빠지지 않는 선수. 게다가 먼저 스타트를 끊었으니 라모스가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로 올려!”
완벽한 크로스 찬스.
그러나 발로텔리는 멈추지 않았다.
한 마리 야수처럼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짓쳐들어오는 발로텔리의 공세를 막기 위해, 페페까지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
파앙---
페페의 태클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나를 향해 날아오는 낮고 빠른 크로스.
퉁---
발만 갖다 댄 공이 이케르 카시야스 골키퍼를 지나쳐 레알 골문을 흔들었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역전.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우리가 8강으로 간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관중들이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바로 올리라니까.”
“발로도 넣을 줄 아는지 궁금했어.”
“어때? 괜찮지?”
“좀 어설프던데? 다음엔 그냥 높게 줄게.”
“...”
이 녀석이 진짜.
골을 넣었기에 망정이지...
어쨌거나 감독 역할,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게 해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