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후안데 라모스 감독의 크나큰 실책은 승부를 너무 서둘렀다는 것이었다.
아마 몰아붙이고 있을 때 3-0 상황을 만들어놓고 잠그고 싶었던 모양인데, 대한민국 경기도 오산이었다.
4-4-2 포메이션의 지공에서 유의미한 변수를 창출하는 건 일반적으로 두 가지 패턴.
하나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활발한 오버래핑에 이은 돌파나 스루패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해당 역할을 맡고 있는 라울 곤잘레스에게선 특별한 무언가가 감지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측면 공략인데, 최전방에서 상대 움직임을 지켜보던 나는 마르셀루의 포지션이 점점 앞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다비데 산톤의 투입 이후 오른쪽의 로벤이 어느 정도 막히기 시작하자, 왼쪽의 마르셀루를 통해 활로를 뚫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원래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풀백인 마르셀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라왔고, 그 뒷공간을 발로텔리가 제대로 공략했다.
아니, 정확히 보면 나의 스마트한 머리로 공략한 거지.
무지막지한 헤더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의외로 두뇌파 선수랍니다.
“더 올라가! 적극적으로 붙어!”
이제 시간은 우리 편.
발등에 불이 떨어진 라모스 감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무조건 골이 필요해진 레알은 ‘닥공’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서 무리뉴 감독이 교체 카드를 사용했다.
“고생했어, 문타리.”
“마무리 잘해라. 나는 좀 쉴게.”
로벤 돌파하는 거 커버치랴, 공격에도 참여하랴, 정말 많이 뛴 문타리가 들어가고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필드를 밟았다.
- 공격하려면 해봐, 대신에 뒷공간 탈탈 털릴 각오는 해야 할 거다.
무리뉴 감독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다소 노골적인 용병술.
이 시점부터 경기 내용은 엄청난 난타전으로 흘러갔다.
양 팀을 응원하는 팬들은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지만, 중립팬들 입장에서는 핵꿀잼인 그런 경기.
가드를 완전히 내린 레알이 미친 듯 달려들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결과는...
마음 급한 레알이 크게 휘두르는 펀치는 맥없이 빗나가기 일쑤였고, 우리의 역습은 예리하면서도 묵직하게 레알의 골문을 위협했다.
후반 22분, 후반 37분.
발로텔리는 역습 상황에서 약속대로(?) 높은 크로스를 깔끔하게 올려주었고 내 머리는 자비 없이 ‘마드리디스타(Madridista)’들의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 * *
[인테르, 레알 마드리드 꺾고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
[정백강, 해트트릭 기록하며 레알 격침 선봉]
[후안데 라모스, “정백강은 막을 수 없는 선수”]
1차전 1-0에 이어 2차전에서도 3-2로 승리를 거둔 우리 팀은 종합 스코어 4-2로 레알을 눌렀다.
- 해트트릭 완성할 때 ‘레알’ 소름이 쫙~~~
- 요즘 인생의 낙이 여소시대와 정백강임 ㅋㅋ
- 심지어 발로도 골 넣었엌ㅋㅋㅋㅋㅋㅋ
- 정백강 덕분에 인테르 트레블 갈듯!!!
팬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한국인 선수가 다른 곳도 아닌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해트트릭을 하다니.
살다가 그런 광경을 또 언제 보겠는가.
애니웨이.
우리와 함께 8강에 진출한 팀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잉글랜드 : 맨유, 아스널, 첼시
스페인 : 바르셀로나, 비야레알
독일 : 바이에른 뮌헨
포르투갈 : 포르투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강세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우리와 함께 16강에 올랐던 유벤투스와 로마는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클럽이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대답.
8강 진출팀이 확정되자마자 나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은 쪼르르 루이스 피구 형님에게 달려갔다.
“포르투로 점지해주시죠. 또 고국 팀 아니겠습니까.”
“이 녀석들이... 난 포르투가 아니라 스포르팅 출신이야. 어디 보자... 굳이 의미를 둔다면 내가 뛰었던 바르셀로나도 있는데 말이지.”
“그... 그건 좀... 포르투가 싫으시면 비야레알도 괜찮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포르투랑 붙게 되길 기도하지.”
그러나 약발이 끝났는지 ‘피구의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기대했는데... 쩝.
* * *
2009년 4월 1일, 만우절.
펑--- 펑---
상암벌 하늘을 화려한 폭죽이 장식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5경기에서 북한을 3-1로 꺾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7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금자탑의 중심에는 역시 내가 있었다.
5번의 경기를 치르는 동안 무려 11골.
경기당 2골이 넘는 화력으로 아시아의 양민들을 잔인하게 후드려 팼다.
월드컵 본선 진출은 당연히 엄청나게 기쁜 일이었지만, 나의 진짜 파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감독님, 정말 죄송한데 좀 일찍 들어가보겠습니다. 집에 일이 있어서요.”
“어, 그래그래. 들어가 봐. 고생 많았다 백강아. 정말 고생 많았어.”
허종무 감독이 기분좋게 술에 취해 거나해진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대표팀에서 나이로 막내급인 내가 회식 자리에서 먼저 들어간다는 건 좀 눈치 보이는 일이긴 했지만, 편모 가정이라는 배경 덕분에 다들 이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뭐, 물론 압도적인 실력이 없었다면 한 소리 들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술 많이 마셨어?”
내가 팀에서 자리 못 잡고 빌빌댈 때나, 유럽 명문 구단에서 연봉 100억 원을 넘게 받을 때나 엄마의 걱정은 한결같다.
차 조심해라, 술 많이 먹지 마라, 끼니 거르지 마라, 얼른 장가 가야지...
“아뇨, 조금밖에 안 마셨어요. 근데 엄마.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요.”
“지금? 이 시간에? 밤 10시가 넘었는데 어딜 간다고.”
“그래도 지금 가요.”
“얘가...”
“얼른 옷 입어요! 밖에 택시기사님 기다리고 계시니까.”
엄마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몇 년 전부터 그 옷 입는 거 계속 본 것 같은데. 옷 좀 사 입어요, 엄마. 돈 뒀다 어디 쓰려고.”
“에이, 나는 이게 편해서 그래.”
스물일곱 어린 나이부터 나를 혼자 키우며 몸에 밴 검소함이 어디 가겠는가.
“아이고! 정백강 선수 어머님이세요?”
“네. 맞아요.”
“허허, 오늘 아주 운수가 대단한 날이네요. 갑자기 정백강 선수가 타서 엄청나게 놀랐는데 어머님까지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정말 장한 아들을 두셨어요.”
“아유, 감사합니다.”
“제가 원래 축구를 안 봤었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새벽까지 안 자고 챙겨본다니까요. 그 뭐더라, 참피... 참피온스리그? 거기서 엄청 대단했지요. 머리만 갖다 대면 골이야 그냥. 날고 긴다는 유럽 선수들이 꼼짝을 못해 아주!”
기사님의 간증(?)에 엄마의 두 볼이 자랑스러움으로 부풀었다.
“다 왔습니다.”
택시요금에 더해 팁까지 두둑이 얹어서 기사님을 보내드렸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니?”
“저 따라와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 타고 10층으로 이동, ‘1004’라는 숫자가 새겨진 문 앞에 섰다.
“천사호야. 외우기 쉽죠? 도어록 비밀번호는 391214 누르고 * 버튼 누르면 돼요. 이따 어디 적어줄게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막 들어가도 돼?”
“막 들어가다니.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인데.”
“뭐라고?”
“짠~ 뚜루루루뚜~ 뚜루루루~”
어릴 때 즐겨 보던 <러브하우스>라는 TV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을 흥얼거리며 내가 먼저 집안에 들어섰다.
“뭐해요, 엄마. 집 구경 안 할 거예요?”
“백강이 너... 이게 대체...”
“엄마 혼자 지낼 시간이 많으니까 일부러 좀 작은 평수로 했어요. 뭐, 우리 김영순 여사님께서 어디서 괜찮은 남자라도 한 명 물어오면 더 큰 데로 모실 수도 있겠지만.”
“...”
“엄마, 울어요?”
“아냐, 내가 울긴 왜 울어.”
“울지 말고 일루 와봐요. 대충 안내해줄게요. 여기가 거실이고, 주방이 이쪽인데 냉장고가 지금까지 쓰던 거랑 좀 다르죠? 이게 양문형이라는 거예요. 엄마 테레비 많이 보니까 제일 비싸고 큰 걸로 했고...”
“아들.”
“네?”
“고마워... 모든 게 만우절 거짓말 같네. 이건 정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
나는 천천히 다가가 엄마를 품에 꼭 껴안았다.
어느새 내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주룩주룩 떨어졌다.
“거짓말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혹시 알아요? 내년 만우절엔 더 거짓말 같은 행복이 찾아올지.”
“됐어. 이미 충분히 행복해. 아! 아들이 장가 간다면 정말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화제를 전환해야 할 때다.
“엄마, 나 회식하다가 중간에 와 가지고 술을 좀 덜 먹었는데. 오랜만에 같이 한 잔 할까요? 내가 쏠게.”
“그래. 간만에 아들이랑 오붓하게 한 잔 하자.”
“오케이, 그럼 집 구경은 내일 제대로 해요.”
* * *
이왕이면 이사 끝날 때까지 한국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강팀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시즌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경기 일정이 엄청나게 빡빡해진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도 보통 강팀이 아니라 ‘트레블’을 노리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허투루 치를 경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나를 반기고 있는 일정은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포르투갈로 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독일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우리의 상대는 바이에른 뮌헨.
스페인 대표 명문 레알을 꺾었더니 독일의 끝판왕이 등장한 셈이었다.
어차피 우승을 위해서는 다 이겨야 한다지만, 그래도 포르투나 비야레알을 원했는데... 크흑...
어쨌거나 추첨을 통해 8강과 예비 4강 대진이 모두 정해졌다.
A-1 : 인테르 VS 바이에른 뮌헨
A-2 : 맨유 VS 포르투
B-1 : 바르셀로나 VS 아스널
B-2 : 첼시 VS 비야레알
최근 기세를 볼 때 A그룹에서는 아무래도 우리 팀과 맨유가 결승 진출을 다툴 확률이 높아 보였다.
성사된다면 나와 박지승 선배의 ‘코리안 매치’로 주모의 과로사 각이 날카롭게 서는 셈.
물론 뮌헨은 독일의 자존심이자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강팀이고, 포르투 역시 ‘한칼’이 있는 팀이라 우리와 맨유 모두 방심은 금물이었다.
한편 B그룹은 바르셀로나와 첼시의 4강전이 유력했다.
펩 과르디올라가 새롭게 바르셀로나의 1군 감독에 부임하고, 리오넬 메시가 팀의 에이스로 부상하려던 시기가 딱 이맘때.
회귀 전의 역사에서는 바로 이 시즌을 시작으로 ‘바르셀로나의 시대’가 열렸었다.
첼시 역시 객관적인 전력에서 비야레알보다는 우위라는 평이 많았다.
“아오, 요즘 비행기 너무 자주 타.”
“그래도 1시간이면 가잖아. 한국에 비하면 엄청 가까운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근데 그거 뭐야?”
“뭐냐니, 책 처음 봐?”
“책을 처음 보는 건 아닌데, 네가 책을 읽는 건 처음 보지.”
‘문타리와 책’이라니.
비유하자면 거의 ‘즐라탄과 겸손’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이거 엄청 재밌어. 다 읽고 또 보는 중인데 원한다면 빌려줄게.”
“제목이 뭔데? <헝거 게임>? 이거 영화로도 있잖아. 제니퍼 로렌스 나오는 거.”
“이거 작년에 나온 책인데? 제니퍼 로렌스? 걔는 또 누구야.”
와우,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가 큰 실수를 했다.
“아! 미안미안. <헝거 게임>이 아니라 <더 게임>이고 제리퍼 로렌스가 아니라 마이클 더글라스다. 헷갈렸네.”
“하나도 안 비슷한데. 너 말야. 가끔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어.”
큰일이다. 눈치를 챈 건가?
눈치를 챘더라도 문타리가 나를 어떻게 할 순 없겠지만 귀찮아지는 건 싫은데...
“그게 다 평소에 책을 안 읽어서 그래. 그러니까 나처럼 독서를 열심히 하란 말이야. 자, 책 빌려줄게. 다 읽고 돌려줘.”
괜한 걱정을 했다.
타리 형,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