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1화 (32/176)

31화

아이고, 하필이면 비가 오냐.

한국에 있었다면 엄마랑 김치전에 동동주 한 잔 했을텐데, 아쉽네.

나는 지금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 서 있다.

수중전은 딱 질색인데 말이지.

벌써 4월인데 기온도 5℃에 불과하다.

까딱하면 감기 걸리기 십상.

경기에 이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관리도 잘해야 한다. 아직 시즌은 많이 남았으니까.

인테르와 뮌헨은 2년 전인 2006-2007 시즌, 챔피언스리그 32강에서 같은 조에 소속되어 자웅을 겨룬 바 있었다.

당시 전적은 우리 기준 1무 1패.

뭐, 그때는 내가 없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지.

오늘은 분명히 다를 거다.

“양 팀 주장은 모이세요.”

오늘 주심은 어지간한 선수보다 유명한 ‘스타 심판’ 하워드 웹.

포츠머스를 떠난 뒤 웹을 다시 보는 건 처음이다. 잉글랜드에서는 ‘친 맨유파’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데, 잉글랜드 국적인지라 4강에 가더라도 맨유와의 경기에서 웹이 주심을 볼 일은 없다.

모쪼록 좋은 판결 부탁드리겠습니다.

양 팀 감독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내 친구 즐라탄은 오늘도 벤치 신세.

16강 1차전에서 완전히 무리뉴 감독의 신뢰를 잃은 즐라탄은 리그 경기에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그에서는 기막히게 잘한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오늘 고생 좀 하겠네, 마이콘.”

“하하. 어느 쪽이 더 고생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

크,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 존멋이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매치업은 뭐니뭐니해도 마이콘과 프랑크 리베리의 대결이었다.

명실상부 세리에 최고의 풀백과 분데스리가 원톱 윙어의 만남이었으니.

덕분에 내가 좀 묻히는 감이 있는 건 살짝 마음에 안 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뮌헨에는 리베리 말고도 잘 알려진 선수들이 많았다.

박지승 선배가 PSV에서 뛸 때 팀 동료였던 마르크 반 봄멜(무려 뮌헨 주장이다), 브라질 국대 센터백 루시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타겟형 공격수 루카 토니 등이 ‘용병 라인’을 형성.

독일 출신 선수들은 말해 뭐하겠는가.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에 벤치 멤버로는 미로슬라프 클로제까지.

독일에서 공 좀 찬다고 하는 선수들은 죄다 모여 있었다.

뮌헨은 16강에서 포르투갈의 스포르팅을 만나 1차전 5-0, 2차전 7-1, 도합 12-1로 특급 우주 관광을 보내버리며 기세가 잔뜩 오른 상태.

독이 잔뜩 오른 상대 공격진을 원정 경기에서 어떻게 잘 막아내느냐가 승부의 키포인트였다.

킥오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사전 지시가 있었는지, 휘슬과 동시에 뮌헨 녀석들이 거칠게 전방 압박을 들어왔다.

우리가 스포르팅인 줄 아나...라며 속으로 비웃는 순간, 반 봄멜의 거친 태클에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무력하게 넘어지며 공을 빼앗겨 버렸다.

“파울! 파울이잖아요!”

옆에서 상황을 목격한 문타리가 소리쳤지만 꿈쩍 않는 웹 주심.

반 봄멜이 탈취한 공을 슈바인스타이거에게 넘겼고, 슈바인스타이거는 리베리 쪽으로 연결했다.

‘마이콘 대 리베리’ 1라운드 공이 울렸다.

리베리의 최대 강점은 드리블 중에도 떨어지지 않는 스피드와 퀵니스.

마이콘이 아주 민첩한 선수는 아니기 때문에, 일단 어깨부터 집어넣고 피지컬로 승부하는 수비 전략을 들고 나왔다.

결과는 성공적.

마이콘의 어깨빵(?)에 당한 리베리가 튕겨져 나가며 필드 위를 굴렀고, 공은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며 살았다.

판정은? 노 파울.

아까 반 봄멜의 태클도 그냥 넘어가더니.

아무래도 오늘 웹 주심은 어지간한 건 안 불어줄 듯했다.

마이콘은 공을 뻥 걷어내는 대신 직접 몰고 나오는 쪽을 선택.

한 마리의 황소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드리블로 전진, 또 전진했다.

“뭐해? 빨리 붙어줘!”

뜨악해서 소리치는 반 봄멜.

어지간히 나오다가 패스하겠지 싶었는데, 그대로 하프라인까지 넘어버리자 뮌헨 수비진이 완전히 당황해 버린 것 같았다.

퍼억---

주장의 부름을 받고 갑자기 나타나 강렬한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걷어내는 남자.

필립 람이었다.

초반부터 불꽃 튀는 별들의 전쟁.

오늘 경기 승패는 측면 대결에서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근데... 내가 너무 존재감이 없는걸?

공 좀 줘봐 얘들아...

* * *

“이것밖에 안 돼? 엉? 힘 좀 써봐.”

“조용히 좀 해.”

“리그와 챔스 득점 선두라 그래서 기대했더니... 생각보다 약골이잖아?”

“좀 닥치라니까.”

내 전담 마크로 붙은 루시우가 쉴 새 없이 입을 털며 나를 자극했다.

시끄러운 것도 시끄러운 건데, 거친 몸싸움을 곁들이며 긁어대는 통에 엄청난 이중고를 겪고 있는 나였다.

아니, 대체 뭘 먹고 어떻게 훈련을 했길래 힘이 이렇게 좋은 거야?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바꾼 이후 수많은 수비수들을 상대해봤지만 이런 장사는 처음이다.

신장도 체중도 분명 나랑 비슷한데, 몸이 무슨 바윗덩이 같다.

그렇다고 발이 느린 것도 아니어서, 우리 팀 양쪽 윙어인 발로텔리와 알레산드로 만시니 쪽에 찬스가 나면 순식간에 달려가 커버하고 복귀하는 홍길동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회귀 전에 루시우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많이 보진 못했었는데 이렇게 잘했었나 싶다.

하여간에 한 방만 걸려라.

그거면 충분하다.

포지션을 변경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딱 한 번만 잘하면 된다’는 사실이었다.

센터백으로 뛸 때는 늘 심장에 시한폭탄 하나 매달아 놓고 사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한결 편하다.

물론 무득점 기간이 길어지면 그 스트레스 역시 장난이 아니겠지만, 난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데헷!

내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악전고투를 벌이는 사이, 마이콘과 리베리의 2라운드가 열렸다.

막느냐 뚫느냐의 단순한 싸움.

모두가 주목하는 남자들의 대결에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뮌헨의 원톱 루카 토니가 그 주인공.

중앙에서 왼쪽 측면으로 살짝쿵 이동하며 리베리의 패스 길을 열어주었다.

툭--- 탁---

2대 1 패스로 순식간에 마이콘의 수비를 따돌린 리베리가 중앙으로 파고들며 땅볼슛을 시도.

데굴데굴 굴러간 공이 줄리우 세자르의 손에 쏙하고 들어갔다.

독일을 씹어먹고 있는 리베리지만, 슈팅 마무리는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알아서 극복하게 되긴 하지만...

뻐엉-----

오늘처럼 중원 싸움이 치열한 경기에서는, 중간 과정 생략하고 내 머리를 겨냥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세자르 형님은 알고 있었다.

루시우가 경합을 했지만 하늘에선 나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정확한 헤더 패스로 만시니에게 공을 전달.

“이것밖에 못 뛰어? 엉? 열심히 뛰어 봐.”

“입 다물어라.”

“브라질 국대에 뮌헨의 부주장이라 그래서 기대했더니... 생각보다 시원찮잖아?”

“아가리 여물라고.”

별것도 아닌 게 입만 살아가지고.

근데 진지하게 싸우면 내가 질 것 같긴 하다.

“백강!”

해맑게 외치며 왼쪽 측면에서 만시니가 올린 얼리 크로스가 람을 향해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허무한 턴오버.

이번 시즌 만시니의 폼은 최악 오브 최악으로 한화로 200억이 넘는 이적료값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주 비교되는 히카르두 콰레스마는 그나마 가끔 눈요깃거리라도 만들어주는데, 만시니는 그런 것도 없었다.

돌파도 안돼, 크로스도 안돼, 슈팅도 안돼.

이번 시즌 최고의 먹튀라는 게 내 결론이다.

소위 말하는 [콰밥만훈] 중 왜 만시니가 으뜸으로 꼽히는지 절절하게 확인하는 중.

[콰]가 부상 중이라 만시니가 선발로 나오긴 했는데 후반 들어가면 바로 교체 각이다.

삑--- 삑---

무지하게 치고박긴 했는데, 막상 결정적인 찬스는 양 팀 다 만들지 못한 채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예상대로 만시니의 시간은 여기서 끝.

대신에 루이스 피구 형님이 나섰다.

곧 은퇴하실 분이 이런 큰 경기에 뛰게 하다니.

시니야, 반성 좀 하자.

피구 형님이 나오면서 포지션에도 약간의 변경이 있었다.

오른쪽에서 뛰던 발로텔리가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역발 윙포워드로 골문 타격을 노리고, 피구 형님은 오른쪽에서 크로스를 통해 공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실전에서 어떨진 모르겠지만, 이론적으로 보면 밸런스가 굉장히 잘 맞는 공격 조합. 느낌이 좋다.

“챔피언스리그의 토너먼트에서 원정골의 가치는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반드시 한 골 이상을 넣고 돌아가자.”

비기기 작전으로 나갔다가 허무하게 탈락할 뻔했던 레알 마드리드전에서 교훈을 얻은 것일까.

무리뉴 감독이 전례 없이 득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감독님.

이 정백강이가 있지 않습니까.

* * *

이번 시즌 우리 팀은 홈구장인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무승부 한 번을 거뒀을 뿐, 나머지 경기는 전부 승리하는 괴물 같은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 1무도 같은 경기장을 쓰는 밀란을 상대로 기록한 것.

만일 오늘 무승부로 끝난다면, 2차전에 원정을 와야 하는 뮌헨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경기에 임해야 하는 셈이었다.

그래서일까.

후반전 들어 뮌헨 선수들의 플레이에서는 엄청나게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일종의 ‘강자 프리미엄’이라고나 할까?

“패스를 빨리 줘야지! 뭐 하는 거야!”

리베리는 원래 엄청나게 과격한 성격.

훗날 나이가 들면서 성질을 좀 죽이긴 했지만, 이때의 리베리는 고작 스물다섯 살.

한창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때다.

안 그래도 마이콘의 피지컬한 수비에 고전 중인데, 동료들이 패스 주는 꼬라지도 마음에 안 드니까 짜증이 확 올라온 모양이었다.

명색이 팀의 에이스인데.

멘탈이 저렇게 약해서야... 쯧쯧...

저거 한 번만 더 긁어주면 폭발하겠는데?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마이콘이었다.

때는 후반 14분.

리베리가 돌파를 시도할 때 오른팔을 써서 거칠게 밀쳐 버리는 마이콘.

오늘 잔디와 사랑에 빠진 리베리가 또 한 번 필드 위를 뒹굴었다.

“헤이! 헤이! 심판!”

일어나자마자 분노에 차서 웹 주심을 부르는 리베리.

이미 파울은 선언됐으나, 리베리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카드 안 줘요? 일부러 그랬잖아!”

“조용히 하고 프리킥 준비나 하시지.”

“이 새끼가 진짜!”

얼굴이 시뻘게진 리베리가 양손으로 마이콘을 밀어제쳤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마이콘.

리베리는 170cm, 마이콘은 184cm에 체구 차이도 많이 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죽여 버린다!”

완전 ‘삔또 나간’ 리베리가 기어이 선을 넘었다.

짝-----

“으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마이콘.

부리나케 뛰어온 주장 반 봄멜이 리베리를 끌어안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얄짤 없는 레드카드.

챔스 준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최강의 크랙을 잃은 뮌헨이었다.

역시 마이콘, 잔머리도 월클이야.

이제 일어나도 돼. 연기 좋았다 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