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다른 선수도 아닌 프랑크 리베리의 퇴장.
바이에른 뮌헨에게 이보다 큰 악재가 있을까?
이 시점부터 경기는 일방적으로 우리 쪽에 기울기 시작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승리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전원 수비 태세를 지시하며 버티기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이 판단은 큰 실수였다.
나는 상대가 수비라인을 낮추면 낮출수록 더 파괴력을 뽐내는 사나이.
마이콘과 루이스 피구 형님이 합을 맞춰 오른쪽 측면을 미친 듯이 공략했고, 천하의 필립 람이라도 두 명의 합공(合攻)을 혼자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두 사람이 올려주는 질 좋은 크로스는 나에게 아주 좋은 영양 공급원.
리베리의 퇴장 이후 무려 16개의 유효 슈팅을 쏟아부은 우리 팀은 적지에서 2-0으로 완승을 거두며 4강 진출 가능성을 한껏 높였다.
루시우의 정신 나간 활약과 미하엘 렌징 골키퍼 의 연이은 선방이 아니었다면 대참사가 났으리라.
나는 헤더골 1개와 발로텔리에게 머리로 내준 어시스트까지, 두 골에 모두 관여하며 오늘도 클래스를 입증했다.
- 정백강 챔스 6경기 연속골 ㄷㄷㄷ...
- 리그도 씹어먹고 챔스도 씹어먹고 다해처먹네 ㅋㅋㅋㅋㅋ
- 이러다가 발롱도르 받는 거 아님??
- 솔직히 발롱 가능성 90% 이상이지 ㅋㅋㅋ 이렇게만 하면 적수가 안 보임 ㅋㅋㅋ
- 그거 레알임. 메시고 호날두고 카카고 간에 올 시즌은 정백강한테 뭐 하나 앞서는 게 없음 ㅇㅇ
인테르로 이적하자마자 미친 활약을 이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 팬들은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의 이름은 바로 ‘아시아 선수 최초 발롱도르 수상’.
지금까지의 활약만 보면, 현시점에서 발롱도르와 가장 가까운 선수는 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이 쏟아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 리그 득점왕, 챔스 득점왕을 거의 예약해 놓고 있다. 도박사들은 당신을 가장 유력한 발롱도르 수상 후보로 놓고 있는데?
“오늘이 4월 8일이다. 발롱도르 시상식은 약 8개월 후에나 열리는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30여 년 동안 산전수전 겪으면서 뼈저리게 배운 사실 하나.
어떤 경우에도 설레발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
그러나 기자들은 나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 그렇긴 하지만 소속팀 인테르의 기세와 본인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건 사실이다. 수상 후보 중 하나라는 데는 동의하나?
정말 피곤하게 구는군.
옛다, 이걸로 기사 써라 이놈들아.
“부인하진 않겠다.”
* * *
“에이, 아무리 백강이라도 그건 안 되지.”
“뭘 모르시네. 가능하다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아무리 헤더를 잘해도 절대 불가능해. 손으로도 어려운데.”
“백강은 손이나 발보다 머리가 훨씬 나아. 난 된다에 한 표.”
이 상황은 대체...
당사자인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왜 자기들끼리 투닥대고 있는 것인가.
사태의 시작은 피구 형님이 제공했다.
“오늘은 왠지 집에 가기 싫군.”
훈련 종료 후 넋두리처럼 뱉은 말에 문타리가 반응했다.
“왜요?”
“아침에 아내랑 좀 싸웠거든.”
“그럼 빨리 들어가셔서 형수님 심기를 풀어 줘야 되는 거 아닌가요?”
“훗, 난 사네티랑 달라. 그렇게 쩔쩔 매며 사는 남자가 아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랑 저녁 같이 먹을 사람~”
“사시는 거죠?”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냥 사는 건 좀 그렇고. 내기 어때?”
나는 별로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문타리가 하도 졸라대는 통에 억지로 합류하게 되었다.
최종 멤버는 나, 피구, 문타리, 발로텔리, 그리고 줄리우 세자르.
“혹시 세자르 형님도...?”
“너희들은 결혼하지 마라.”
“왜요?”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 가르침, 가슴 속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내기 종목은...”
주최자인 피구 형님이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킥력 대결이다. 코너 에어리어에 표적을 세워놓고, 하프라인에서 공을 차 맞히면 성공!”
“우--- 우---”
“너무 편파적이지 않나요? 돈도 많으신 분이 어쩜 그렇게 아끼시는지...”
나이가 들어 체력과 민첩성은 많이 떨어졌지만 킥력 하나만큼은 날이 서 있는 피구 형님 아니겠는가.
열띤 비난이 이어지는 와중에 발로텔리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콜. 어차피 내가 무조건 1등이다. 근데 백강은 어쩌나? 쟤 완전 개발인데.”
크윽, 발로텔리 이 녀석이 또 뼈를...
분하지만 맞는 말이다.
내 킥력이 평균만 됐어도 뮌헨전 끝나고 기자들한테 자신 있게 외쳤을 것이다.
‘이번 시즌 발롱도르는 내 거’라고.
“그럼 저는 머리로 참가하죠, 뭐.”
이 말이 도화선이 되어 앞서 소개한 논쟁이 붙게 된 것이다.
‘유부남파’인 피구와 세자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쪽.
‘총각파’인 문타리와 발로텔리는 ‘정백강이라면 가능성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우리는 된다 안 된다에 베팅을 하고, 백강의 시도 결과에 따라 진 쪽이 나눠서 내는 걸로.”
“찬성이요.”
“그거 재밌겠군.”
이 사람들, 나의 의사는 왜 묻질 않나.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대신 백강, 너는 오늘 무조건 공짜로 얻어먹는 거야.”
역시 관록이 있으십니다, 피구 형님.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백강, 파이팅!”
“이 정도는 하겠지.”
“안 돼, 절대 안 돼.”
“이게 성공하면 내 축구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일 거야.”
열렬한(?) 응원과 야유가 교차하는 가운데 하프라인에 섰다.
맞춰야 할 타깃은 축구공.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사이즈다.
가벼운 내기고, 사실 나는 이미 이겨 있는 승부긴 하지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정말 이게 가능할까?
“간다!”
세상에서 가장 몸값 비싼 볼보이 문타리가 두 손으로 공을 높이 띄워 주었다.
뭐지? 이 긴장감은?
뻐어엉---
실제 경기 때도 이렇게 강렬한 헤더를 한 적은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담아 내려찍은 공은 무서운 속도로 코너 에어리어를 향해 날아갔다.
“말도 안 돼!”
“이게 진짜 된다고? 설마?”
경악에 찬 피구와 세자르의 목소리.
공기 저항에 의해 조금씩 느려진 공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표적을 톡 하고 건드렸다.
“이예에에에!!!”
“흠, 제법이군.”
기쁨에 광분하는 문타리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발로텔리.
오늘도 피구 형님의 혓바닥이 한 건 해버렸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우셨나.
좋은 한국 영화 하나 추천해드려야겠다.
외국어 자막 버전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 * *
또 벤치인가.
2009년 들어 벌써 네 번째다.
레체, 볼로냐, 우디네세, 그리고 내일 펼쳐지는 팔레르모와의 경기까지.
레체전이야 월드컵 최종예선 일정과 겹쳤다지만 나머지 경기는 충분히 출전할 수 있었다.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체력 문제를 호소한 적도 없는데, 왜일까?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별다른 언질도 없이 벤치를 지키는 경우가 많아지자 참지 못하고 무리뉴 감독을 찾아가 버렸다.
“감독님.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왜 자꾸 선발 명단에서 빼는지 궁금하겠지?”
이 사람은 그냥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경기 안 뛰어도 주급은 꼬박꼬박 들어가지 않나? 출전수당 몇 푼 아쉬워할 연봉도 아니고.”
이쯤 되면 무서워진다.
내가 공돈 좋아하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궁금할 뿐이죠.”
“인테르에 처음 왔을 때 우리 둘이 기자회견을 같이 했었지. 기억하나?”
어찌 잊겠습니까.
저보다 감독님 기사가 더 많이 나와서 약간 거시기하던 기분이 생생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때 말했던 나의 목표도 기억하겠지.”
“네, 트레블을 하겠다고 말씀하셔서 밀라노, 아니 이탈리아 전역이 발칵 뒤집혔었죠.”
“하지만 여기까지 오고 보니, 그리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지?”
압도적 리그 1위 고수, 챔스 4강 진출 직전,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순항하며 4강 1차전까지 이미 승리를 거둔 상태.
무리뉴 감독은 자신의 호언장담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큰 틀에서 나의 계획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 지금의 선수 기용도 마찬가지고.”
“그 말씀은...”
“축구는 변수로 가득 차 있지. 하지만 나는 변수를 아주 싫어해. 우리는 스쿠데토를 거의 손아귀에 쥐었어. 이변이 없는 한 말이지. 그렇다면 남은 건 코파 이탈리아, 그리고 챔스지. 이 두 대회를 제패하려면 백강, 네가 항상 100%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해. 그게 리그 경기에서 너를 자주 벤치에 앉히는 이유야.”
결론적으로 나에게는 좋은 이야기였다.
이렇게까지 관리받으며 뛸 수 있는 선수는 전 유럽을 통틀어도 흔치 않으리라.
리그에서 득점을 쌓는 데는 좀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무리뉴 감독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 쪽에 좀 더 마음이 갔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요.”
“즐라탄 이야기인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독심술을 배운 게 분명하다.
“즐라탄의 불만에 대해서는 저보다 감독님이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요새 훈련 태도도 부쩍 불성실해졌고, 동료들과 잦은 다툼으로 팀 분위기를 흐릴 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챔스에서 못 뛰는 게 주요 원인인 것 같습니다만.”
무리뉴 감독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즐라탄보다 너를 신뢰하는 건 사실이다. 그건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리그 역시 챔스만큼이나 중요한 대회다. 즐라탄이 정말 시원찮은 선수였다면, 로테이션이고 뭐고 백강 너를 계속 기용했을 거야. 요즘 리그에서 즐라탄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무리뉴 감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빠진 네 경기에서 원톱으로 출전한 즐라탄은 무려 7골을 터뜨리며 경기당 2골 가까운 미친 득점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나는 즐라탄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해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네가 나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할 정도면 내 생각처럼 잘 되진 않았나 보군.”
“자존심이 워낙 강하니까요.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를 정도로 에고(Ego)가 강한 선수 아니겠습니까?”
“그래. 즐라탄하고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대화를 해보도록 하겠다. 이상인가?”
“네, 감독님.”
“그런데 백강,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무리뉴 감독이 나에 대해 궁금해할 게 있던가?
“편하게 물어보시죠.”
“내 감독 경력도 짧지 않은 편인데, 너 같은 캐릭터는 처음이야. 20대 초반의 억만장자 선수치고는, 뭐랄까. 어른스러운 느낌이 든단 말이지. 너랑 대화를 하고 있으면 꼭 피구나 사네티를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
“그렇습니까?”
“반은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유럽으로 건너올 때 나이를 속인 건 아니겠지?”
“하하, 외모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젠장, 22세로 안 보이나?
대답이 바로 안 나오니까 매우 뻘쭘하다.
“크흠, 저도 농담입니다.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만큼 주민등록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나라도 없지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어른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아마 제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가 아닐까 싶네요. 세 살 때부터 어머니가 저를 혼자 키우셨거든요.”
“그랬나.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제 가정사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편입니다.”
무리뉴 감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았네. 시즌이 끝나면 술이라도 같이 한 잔 하지. 우리가 꼭 축구 이야기만 나누라는 법은 없지 않나?”
“언제든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온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 무리뉴 감독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으로 봤었는데 말이지.
방금 대화를 마치고 나서 그에 대한 인상이 좀 바뀌었다.
‘사람 같다’고나 할까?
주제 무리뉴와 인간미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속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