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3화 (34/176)

33화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벌어진 팔레르모전에서 나는 90분 내내 벤치만 지켰다.

당초 나의 출전 여부와 상관없이 일방적인 결과과 예상되었던 경기.

그러나 이번 시즌 진지하게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노리고 있는 팔레르모의 도전은 엄청나게 거셌다.

후반 40분이 다 되어가도록 0-0의 팽팽한 균형은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적함대’ 인테르를 상대로 승점 획득에 성공하나 싶은 순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라는 이름의 스웨덴 남자가 등장했다.

30m 거리에서 강렬하게 때려 넣은 프리킥 골 한 방으로 순식간에 전세 역전.

즐라탄은 무리뉴 감독을 한 번 슥 바라보는 것으로 세리머니를 대신했다.

거의 람머스급 도발.

깡도 좋아, 정말.

“저거 저거, 또 한 판 붙는 거 아냐? 두 사람 신경전 보는 거 정말 지치는데 말이지.”

작고 귀엽고 소중한 문타리가 즐라탄의 모습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감독님하고 이 주제로 얘기했었거든. 즐라탄하고 한 번 대화해보겠다고 하시던데.”

“그런 얘긴 또 언제 했대. 그나저나 백강, 너는 감독님이 안 무서워? 나는 차가워 보여서 접근을 못하겠더라. 어쩌다가 나 찾으면 혼날까봐 벌벌 떨어.”

“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의외로 따뜻한 면이 있더라.”

“그냥 네 성적이 좋아서 잘해주는 건 아닐까? 내가 감독인데 너 같은 선수가 있으면 난 구두도 닦아줄 용의가 있어. 경기당 1골 이상 꼬박꼬박 넣어주는 공격수라니. 받들어 모셔야지.”

매우 일리 있는 지적이다.

타리 형의 통찰력, 인정합니다.

애니웨이.

즐라탄의 환상적인 프리킥은 그대로 이 경기의 결승골이 되었다.

리그 31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어간 우리 팀은 17번째 스쿠데토에 한 발짝 더 다가섰고.

끝없이 이어지는 빡센 일정.

우리 팀의 다음 경기는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이었다.

* * *

[바이에른 뮌헨 수뇌부, 감독 경질 고려 중?]

[부진한 리가 성적 원인, 구단 측에서는 공식적 답변 거부]

[후임 감독으로는 유프 하인케스 전 레알마드리드 감독 물망]

뮌헨에게 초대형 악재가 터졌다.

복수의 언론을 통해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경질설이 보도된 것이다.

뮌헨이라는 팀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이 문제였다.

분데스리가에서 매년 우승을 다투던 팀이 고작 4위에 그치고 있었으니...

바로 직전 시즌에 승점 10점 차로 여유 있게 우승컵을 차지한 것과는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컵 대회인 DFB 포칼에서도 레버쿠젠에게 덜미를 잡히며 8강에 그쳤다.

다행히 챔스에서는 명문다운 저력을 발휘하며 8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1차전에서 무력하게 패하며 탈락 직전 위기.

이대로 가면 무관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독일 최고의 클럽’이라는 뮌헨이 무관이라니.

감독 경질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영...

안 그래도 프랑크 리베리 없이 원정 경기를 치러야 하는 감독과 선수들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질 게 뻔했다.

정보를 흘린 내부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굉장히 감사한 일.

이 와중에 흥미로운 사실은 뮌헨 구단 측에서 답변을 거부했을 뿐,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보도가 맞다고 인정해 준 꼴.

“지금은 나의 거취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2차전과 관련된 질문만 받겠다.”

클린스만 감독도 이를 의식한 듯, 경기 전 기자회견 시작 전 미리 못을 박고 인터뷰에 임했다.

나름 90년대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는데, 감독 커리어는 참 뜻대로 안 풀린다.

누가 그랬던가.

명선수는 명감독이 못 된다고.

그렇다면 나는 절대 감독을 해선 안 되겠군.

Lo sai per un gol---

Io darei la vita... la mia vita---

스타디오 주세메 페아차에는 응원가 ‘Pazza Inter Amala’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2002-2003 시즌 이후 6년 만의 4강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는 팬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 당시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숙적 중의 숙정, 원수 중의 원수 밀란.

전례 없는 혈전이었던 1차전과 2차전 모두 무승부로 끝이 났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결승행에 실패했더랬다.

우리를 꺾고 올라간 밀란은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만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통산 6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밀라노 사람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린 해.

당시 인테르 팬들에게는 너무나도 절망스러운 사건이었으리라.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나, 정백강이 있으니까.

“후...”

“긴장돼?”

“즐라탄은 긴장 같은 거 하지 않는다.”

“방금 한숨 쉬는 거 봤는데?”

“입에 먼지가 들어간 것뿐.”

나와 함께 킥오프를 준비하는 거구의 사나이.

즐라탄이 정말 오랜만에 챔스에서 선발 기회를 잡았다.

“감독님하고 무슨 이야기 했어?”

“뭐, 그냥, 뭐. 요즘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 난 늘 잘하니까 의미 없는 칭찬이지만.”

무리뉴 감독은 지난번 나에게 말한 대로 즐라탄과 심도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즐라탄이 주전으로 나왔다는 건 말이 잘 통했다는 뜻이겠지.

게다가 오늘은 간만의 투톱이다.

원래 나와 같이 쓸 때는 즐라탄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배치했었는데 말이다.

시즌 개막 전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녔으나 성공적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슈퍼스타 투톱 조합이 챔스 8강이라는 무대에서 다시 선을 보였다.

이 판단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킥오프.

원정팀 뮌헨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최소한 두 골이 필요한 뮌헨은 참으로 심플한 전술을 들고 나왔다.

루카 토니-미로슬라프 클로제를 최전방에 세워놓고 무한 크로스.

팀 내에서 가장 창의적인 크랙인 리베리가 빠진 마당에 잘게 썰어가는 공격은 어렵다는 게 클린스만 감독의 생각인 듯했다.

좌우 윙어로 나선 제 호베르투와 하밋 알틴톱이 볼을 공급하면, 토니와 클로제가 1차 공략, 킥력이 좋은 미드필더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가 루즈볼이나 떨궈준 공을 중거리슛으로 연결한다는 복안.

‘심플 이즈 더 베스트’란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이 공격 방식이,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꽤 위력적이었다.

특히 193cm의 엄청난 피지컬로 밀어붙이는 토니의 존재감이 장난 아니었는데, 우리 팀 최장신 센터백인 마르코 마테라치가 훈련 중 발목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결장한 공백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좋아! 잘하고 있어! 계속 밀어붙여!”

스트레스가 심한지 얼굴이 퀭했으나 목청만큼은 살아 있는 클린스만 감독이 의연한 모습으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경기력 좋아! 바스티, 더 올라가도 돼! 후방은 내가 지킬게!”

주장 마르크 반 봄멜도 목소리를 높였다.

“나이스 패스! 내가 스타트를 좀 늦게 끊었다.”

“괜찮아, 괜찮아. 수비 집중하자!”

1차전 때보다 확연하게 대화가 많아진 뮌헨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음... 그렇구만.

클린스만 감독의 경질설 보도가 우리 쪽에 이득이 될 거라는 나의 예상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성적 부진에 빠져 어수선하던 팀 분위기를 일신하면서 서로 단합하는 계기가 된 듯했다.

하긴, 때로는 충격요법이 가장 효율적이지.

“이러다가 공 한 번 못 만져보고 끝나시겠어?”

오늘도 90분 동안 붙어 다니게 된 루시우가 특유의 혀놀림을 시작했다.

“내가 1차전에서 골 넣고 어시스트하는 동안 어디서 뭐 하셨더라?”

“응, 그래서 좀 갚아주려고.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거든.”

“열심히 해보세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좀 나갔다 올게.”

“엉?”

“안녕.”

그 말을 끝으로 루시우는 정말 나갔다.

공격하러.

나중에 다비드 루이스에게 바통이 넘어가게 되는 ‘돌아오지 않는 센터백’의 원조 버전이 바로 루시우였다.

챔스 득점 선두인 나를 의식한 듯 1차전에서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평소 하던 대로 할 작정인 것 같았다.

잦은 오버래핑은 완전체 센터백에 가까운 루시우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약점을 공략하기에 우리 투톱 조합은 그리 적절하지 않았다.

나는 발이 많이 느리고, 즐라탄도 체구에 비해선 빠르지만 라인 브레이킹에 능숙한 선수는 아니라...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휙 떠나버리다니, 기분이 썩 좋진 않다.

“루시우 올라가요!”

우리 팀의 전반적인 라인 컨트롤을 맡고 있는 사네티 주장에게 고급정보(?)를 전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까지 올라가 버리는 루시우.

정신 나갔네, 정신 나갔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본업이라는 게 있는데.

공격 가담도 적당히 해야지... 응?

진짜로 정신이 나가버린 건 루시우가 아니라 우리 수비진이었다.

루시우의 갑작스런 쇄도에 대응하지 못하고 너무나 편하게 전진을 허용해 버렸다.

슈바인스타이거가 페널티박스 근처까지 거침없이 올라간 루시우에게 스루패스.

뒤늦게 커버 들어온 문타리가 공을 빼앗으려 했으나 헛다리 드리블 한방에 손쉽게 나가떨어졌다.

아니 무슨 수비수 발재간이 저래?

다급해진 문타리가 어깨 싸움을 걸어갔으나, 루시우의 파워는 문타리가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왼팔을 쭉 뻗어 루시우의 유니폼을 잡아채는 문타리.

삑---

상황을 정확히 확인한 피터 빙크 주심이 즉시 휘슬을 불며 프리킥이 선언되었다.

카드까지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 상황.

골문과의 거리는 대략 23m.

충분히 직접 슈팅이 가능한 거리였다.

원정팀의 무덤인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기대 이상의 경기력을 선보이던 뮌헨이, 그 노력을 골로 보답받을 기회를 잡았다.

파울 당한 위치가 거의 정 가운데라, 오른발 왼발 키커 가릴 것 없이 공략이 가능해 보였다.

세트피스에 대해 논의를 나누기 시작하는 뮌헨 녀석들.

뭐든 해봐라, 이 머리로 다 걷어내 줄테니.

자기들끼리 한참 속닥대다가 합의가 됐는지, 공을 사이에 두고 세 명의 선수가 자리했다.

오른발의 슈바인스타이거, 왼발의 호베르투, 그리고 한참 뒤쪽에서 슈팅을 준비하는 루시우.

시우야, 적당히 좀 해.

프리킥까지 탐내는 거야?

“심판! 벽이 너무 가깝습니다!”

토니가 우리 수비벽 위치를 지적하자 주심이 쫄래쫄래 달려와 위치를 조정했다.

“뒤로 더 물러서요. 더, 더.”

에잉, 쪼잔한 토니 녀석.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후... 반 발짝만 더... 1/3 발짝만 더...

“정백강 선수, 뒤로 더 가요.”

이런, 걸려 버렸네.

데헷.

“땅볼슛도 생각해야 돼!”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부르짖었다.

오, 라임 지렸다.

작년 9월에 있었던 밀란 더비에서 수비벽 전체가 점프했다가 허를 찌른 호나우지뉴의 땅볼에 허무하게 실점한 전력이 있었으니 좋은 지적.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워낙 많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게 타리 형, 수비 좀 잘하지 그랬어.

삑---

휘슬이 울렸다.

온다.

누구냐, 누가 차는 거야?

가장 먼저 호베르투가 공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수비벽의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그래, 너는 아닐 줄 알았어.

다음 타자는 슈바인슈타이거.

짧은 도움닫기 이후 그대로... 공을 지나쳤다.

이때 수비벽이 크게 출렁였다.

“루시우야!”

콰아아앙-----

축구공에서 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굉음과 함께 날아간 레이저 슈팅이 그대로 골문 우측 상단에 꽂혔다.

“젠장할!”

브라질 국가대표 선배에게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바닥에 드러누우며 거칠게 내뱉었다.

“공 빨리 가져와! 슈슈!”

멋진 골이 터졌지만 세리머니는 거의 없었다.

루시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슈바인슈타이거에게 명령(?).

아직 1-2로 밀리는 상태라는 걸 잊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 좀 멋있는데?

“자, 이걸로 너도 한 골, 나도 한 골. 오케이?”

자기 자리로 복귀하면서 굳이 내게 다가와 속삭이지만 않았다면, 루시우에 대해 좋은 인상이 생길 뻔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철저히 조져주마, 기대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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