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4화 (35/176)

34화

아직 합산 스코어에서는 2-1로 앞서고 있긴 했지만, 그 리드는 생각하지 않는 쪽이 합당했다.

루시우의 선제골 이후 바이에른 뮌헨 녀석들의 기세가 완전히 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얘네는 어떻게 된 게 프랑크 리베리가 있을 때보다 경기력이 더 좋냐...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추가 실점을 하지 않은 건 누가 뭐래도 줄리우 세자르 형님 덕분이었다.

한 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이후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미친 선방쇼를 펼쳤다.

삑--- 삑---

전반 45분 동안의 경기 내용은 숫자가 잘 말해주었다.

볼 점유율 42% 대 58%.

슈팅 개수 3개 대 15개.

유효슈팅 1개 대 10개.

“감독님한테 개털리겠는데?”

‘무리뉴 공포증’을 앓고 있는 문타리가 라커룸으로 돌아가면서 걱정했다.

그러나 의외로 담담한 모습의 무리뉴 감독.

선수 교체도 없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으라는 이야기겠지.”

“차라리 혼을 내줬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으니 오히려 더 무섭네.”

아무래도 문타리는 자신의 파울이 실점의 빌미가 된 것을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리디여린 사람 같으니라고.

“자, 20분이야! 후반 20분 내에 동점골을 넣는 걸 목표로 하자. 홈 팬들이 지켜보고 있어! 무기력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고!”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무리뉴 감독 대신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가 선수들을 독려했다.

20분이라.

너무 길게 주신 거 아닙니까?

그 정도면 두 골도 가능한 시간이죠, 코치님.

* * *

“어이구, 우리 약골 오셨어요?”

루시우 이 빌어먹을 짜식은 지치지도 않나.

어떻게 90분 내내 이렇게 떠들지?

이제 상대해 주기도 귀찮다.

계속 지껄여라, 알아서 여물게 만들어 줄 테니.

“나한테 줘!”

놀라운 일이다.

따로 지시가 없었는데도, 즐라탄이 알아서 2선으로 내려가며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정말 오랜만에 선발로 나온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패배한다면, 즐라탄에게 그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으리라.

즐라탄의 가세 덕분에 중앙에 3명의 미드필더가 위치하게 된 우리 팀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삼각대형을 유지하며 볼 점유율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는 뮌헨이 사용하는 4-4-2 포메이션의 최대 약점 중 하나.

우리가 볼을 갖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도 즉각 대응에 들어갔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양쪽 윙어들이 중앙으로 이동하며 미드필드 싸움에 가담하는 것.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윙어들이 사라진 자리에 아주 넓은 공간이 생겨났고, 우리 팀에는 ‘오른쪽’ 마이콘이 있었으니까.

“즐라탄! 여기야!”

뮌헨 측면 수비의 빈틈을 찌르며 슬금슬금 오버래핑한 마이콘이 손을 번쩍 들며 공을 요구했다.

즐라탄이 지체 없이 땅볼 스루패스를 전달.

왼쪽 윙어 제 호베르투가 슬라이딩 태클로 끊어내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공이 빨랐다.

“내가 막을게! 정백강 확실히 잡아!”

필립 람이 신신당부하며 마이콘을 견제하기 위해 나섰다.

자존심 강한 두 천재 풀백의 맞대결.

만만찮은 상대를 맞아 잠시 속도를 줄이며 숨을 고른 마이콘이 공을 코너 에어리어 쪽으로 툭 치고 달렸다.

스타트가 약간 늦었지만 끝까지 따라붙는 람.

이 멋진 공방의 최종 승자는 마이콘이었다.

악착같은 견제 때문에 몸의 밸런스는 좀 무너졌지만, 끝끝내 크로스를 올리는 데 성공.

나의 머리는 이미 예열을 마쳤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루시우야.

엇?

삑---

후다닥 달려온 피터 빙크 주심의 오른손 검지가 페널티박스를 콕 찍었다.

“퇴장! 퇴장이요, 심판!”

“아니, 이게 무슨 페널티킥이야?”

“장난하나, 이거 최소 경고는 줍시다!”

“억울해 죽겠네. 아니라니까요? 편파 판정 아니에요 이거? 홈콜 아니냐고!”

빙크 주심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양 팀 선수들.

경기장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파울을 당한 당사자의 입장으로 말하자면, 이건 100% 페널티킥이 맞았다.

작정하고 점프하려는 순간 뒤에서 완벽하게 껴안아 버렸으니.

루시우 녀석, 입 신나게 털더니 정작 할 줄 아는 건 더티한 파울밖에 없구만. 꼬시다, 이눔아.

“네가 차.”

“그래, 그게 좋겠어.”

“멋있게 꽂아주라고!”

키커는 거의 만장일치로 정해졌다.

즐라탄이 비장한 표정으로 페널티킥을 준비.

미하엘 렌징 골키퍼가 신의 가호를 바라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8만여 명이 운집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가 숨이 멎을 듯한 침묵 속에 빠졌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PK.

삑---

운명의 휘슬이 울렸다.

천천히 도움닫기를 시작하는 즐라탄.

렌징 골키퍼가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톡---

상대의 의표를 완벽하게 찌른 ‘파넨카 킥’이 유유히 날아가 그물에 스륵 소리를 내며 안겼다.

진짜, 페널티킥 정도는 좀 평범하게 넣어도 되지 않을까?

멋있는 건 혼자 다 해요.

“우오오오오!”

기합성을 내지르며 열광하는 팬들을 향해 달려가는 즐라탄.

골 넣고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 오랜만에 본다.

근데, 그거 알지?

내가 만들어준 골이야.

은혜 잊지 말라고.

물어물어 비싼 식당 리스트 쫙 뽑아놨으니.

* * *

바레시 코치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후반 16분 동점골을 뽑아낸 우리 팀.

이제 뮌헨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30분 동안 두 골을 더 넣지 못하면 탈락이었다.

수비수 람을 빼고 공격수인 루카스 포돌스키를 투입하며 이판사판으로 나서는 클린스만 감독.

뮌헨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손 놓고 지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에 맞서 무리뉴 감독은 발로텔리를 불러들이고 파트리크 비에이라를 넣으며 높이와 중원 수비력 강화를 꾀했다.

그리고 이 교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올해로 벌써 서른다섯 살.

예전의 괴물 같던 운동능력은 많이 상실한 비에이라였지만,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한 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4백 라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정확한 위치 선정을 통해 전방으로 공급되는 패스를 모조리 끊어내는가 하면, 우리 수비진의 가장 큰 골칫덩이던 루카 토니와의 경합을 마다하지 않으며 영향력을 확 축소시켰다.

역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다니까?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뮌헨이었으나 딱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삑--- 삑--- 삑-----

양 팀 모두 더 이상의 득점 없이 경기 종료.

합산 스코어 3-1로 우리 팀이 6년 만에 챔스 4강 무대에 복귀 신고를 했다.

“나이스 게임, 백강.”

1, 2차전 180분 동안 붙어 지냈던 루시우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뭐지? 이 우디르급 태세변환은?

“너를 너무 막기 힘들어서 평소보다 심한 말을 좀 많이 했어. 결과적으로 소용은 없었지만.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크흠, 여기서 안 받아주면 나만 쪼잔한 놈 되는 거잖아.

루시우 너,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었구나.

“나도 마찬가진데 뭘.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아, 역시 난 쿨해.

“그러면 유니폼 교환, 부탁해도 될까?”

“좋아.”

나의 이니셜 ‘B. G. JUNG’와 백넘버 10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벗어서 루시우에게 건넸다.

“잘 보관해 두라고. 2008-2009 시즌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이 입었던 유니폼이니까.”

“푸하하, 그래그래. 영광으로 생각할게.”

서로 죽일 것처럼 물고 뜯으며 싸웠지만, 축구판에는 영원한 동료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

결국 크게 보면 동종업계 종사자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야아! 4강이다, 4강!”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버린 문타리가 신이 나서 소리치며 쏘다녔다.

정말.

귀여워...

* * *

“무리뉴 감독님은 포르투갈로 직접 가셨대.”

“진짜로? 오늘 카메라에 잡힐 수도 있겠네.”

“어디 응원하시려나?”

“당연히 포르투 아니겠어? 한때 지휘했던 팀이기도 하고, 감독님도 포르투갈 사람이니...”

“의외로 맨유일 수도 있을걸요? 엄청난 영광을 함께 했던 팀인데 밟고 올라가기가 좀 그럴 수도 있죠.”

“듣고 보니 그런 면도 있네.”

이곳은 즐라탄의 홈 스위트 홈.

꽤 오랜만에 놀러 왔다.

즐라탄이 챔스에서 벤치를 달구면서 괜히 관계가 소원해졌었는데, 뮌헨전 골을 넣고 기분이 풀렸는지 동료들을 한꺼번에 초대했다.

물론 명목은 있었다.

우리의 준결승 상대가 결정될 맨유 VS 포르투, 포르투 VS 맨유 경기를 함께 보며 전력을 분석하기로 한 것.

“근데 포르투, 생각보다 잘하더라.”

세자르 형님의 말에 문타리가 동의했다.

“그러게요. 맨유가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맨유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에서 펼쳐진 1차전은 손에 땀을 쥐는 혈전이었다.

먼저 웃은 팀은 홈팀 맨유.

경기 시작 10분 만에 웨인 루니가 특유의 ‘절구통 드리블’로 포르투 수비진을 궤멸시키며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깔끔하게 성공, 1-0 리드를 잡았다.

당초 맨유의 일방적 우세가 점쳐졌던 매치업.

이른 시간에 골이 터지면서 경기가 확 기울지 않을까 싶었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채 5분이 지나기 전, 포르투의 코너킥 찬스에서 센터백 브루노 알베스가 헤더골을 작렬하며 바로 균형을 맞췄다.

천하의 에드윈 반 데 사르 골키퍼도 꼼짝없이 당할 정도로 강렬한 헤더였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홈에서 꼭 승리하고 싶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바로 라인을 쫙 끌어올리며 공격적으로 게임을 풀어갔다.

전반적으로 맨유가 경기를 주도하는 가운데, 포르투는 빠른 역습을 통해 상대 골문을 위협.

그리고 대망의 세 번째 득점을 기록한 팀은 원정팀 포르투였다.

맨유의 왼쪽 윙어로 나선 나니가 무리한 드리블을 시도하다가 동점골의 주인공 알베스에게 공을 빼앗겼고, 이 공은 루초 곤잘레스를 거쳐 최전방의 헐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리오 퍼디난드의 수비를 뚫고 감아 찬 헐크의 왼발 중거리슛이 또 한 번 반 데 사르를 무너뜨리며 역전.

무리뉴 감독의 지도하에 2003-2004 시즌 빅이어를 들어올렸던 포르투가 엄청난 저력을 과시하며 맨유의 팬들을 ‘데꿀멍’시켰다.

멘붕에 빠진 맨유 선수들은 변변한 찬스 하나 만들지 못하며 후반 20분경까지 끌려다녔고,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은 포르투가 대어를 낚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교체 투입되기 전까진 말이다.

포르투갈에 대한 애국심을 과시하며 ‘X맨’ 역할을 제대로 했던 나니를 대신해 필드를 밟은 베르바토프.

그는 ‘백작’의 위용을 한껏 뽐냈다.

투입 3분 만에 호날두의 크로스를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으로 마무리하며 동점골.

이어 후반 39분에는 루니의 스루패스를 원터치 로빙슛으로 연결, 기어이 역전을 만들어냈다.

원래 토트넘에서 뛰다가 이번 시즌 맨유 유니폼을 입은 베르바토프는, 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활약을 선보이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었다.

하지만 이 경기 한 방으로 단숨에 영웅 등극.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하필 이 경기에서 원기옥을 터뜨리다니.

“지긴 졌지만 원정에서 두 골 넣은 건 크지. 난 오히려 포르투 쪽이 유리할 수도 있다고 봐.”

비에이라 형님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보여준 경기력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면, 이변의 가능성은 충분했다.

“오, 박지승이 선발이네. 백강, 좋겠는데?”

내가 지승 선배의 광팬이란 걸 알고 있는 즐라탄이 웃으며 말했다.

“후후. 1차전에서 나니가 워낙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지.”

“우리 대표팀 후배를 너무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백강.”

“앗, 죄송합니다. 피구 형님.”

“농담이야, 농담. 진짜 더럽게 못하긴 하더라. 크리스티아누도 올해는 영 시원치 않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 같아. 진짜 레알 마드리드 가는 건가?”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지만, 조용히 하자.

“시작한다!”

잔뜩 흥분한 문타리의 목소리와 함께 킥오프.

지승 선배,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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