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 와인 더 있어? 맨정신엔 도저히 못 볼 경기다.”
루이스 피구 형님이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술을 찾았다.
정녕 1차전 때 명승부를 펼쳤던 그 두 팀이 맞단 말인가.
이스타디우 두 드라강에서 펼쳐지고 있는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잔뜩 기대했건만 전반전은 엄청나게 지루했다.
앞서 포르투의 역습에 호되게 당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수비적인 4-5-1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는데, 이를 공략해야 할 포르투 공격진의 상태가 영 병맛이었다.
홈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 것일까.
기본적인 트래핑에서도 실수 연발.
패스는 짧거나 너무 길었다.
맨유는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공을 뺏어도 빠른 역습 대신 천천히 돌리는 쪽을 선택.
결국 화끈한 슈팅 한 번 제대로 안 나온 채 전반전이 마무리되었다.
우--- 우---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우리랑 붙을 때 딱 저 상태였으면 좋겠다.”
문타리의 말에 즐라탄이 고개를 저었다.
“즐라탄은 싫다. 상대가 좋은 플레이를 해야 재미가 있지. 안 그래? 백강.”
갑자기 나한테 화살이 돌아왔다.
흠... 쉽지 않은 질문인걸.
그래도 굳이 대답한다면...
“나는 문타리랑 같은 생각. 우리는 프로고, 프로라면 이기는 게 장땡이지.”
“흥, 재미없게.”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후반전의 막이 올랐다.
공이 울리자마자 위협적인 중거리슛으로 크로스바를 강타하며 포문을 여는 헐크.
“진짜 이름 잘 지었어. 저 근육 좀 봐. 헐크란 말이 딱 어울리지.”
사네티 주장이 감탄했다.
우락부락한 거구에서 터지는 가공할 만한 킥력이야말로 헐크의 정체성.
맨유 수비진들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방에 골로 갈 수 있었다.
“후반전은 그나마 좀 볼 만하네. 포르투 녀석들, 이제야 정신 차렸군.”
피구 형님 말마따나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풀리면서 포르투의 공격 전개가 활발해졌다.
천하의 맨유를 거의 가둬놓고 패는 수준.
1차전의 결과가 절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맨유가 너무 웅크리는 거 아냐? 수비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닐 텐데...”
문타리의 말에 즐라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러다 역습 한 번에 골 넣는 팀이 맨유지.”
우리가 말하는 걸 듣기라도 한 것일까.
하울 메이렐레스가 전방으로 연결한 패스를 대런 플레처가 끊어내면서 맨유가 자랑하는 역습이 시작되었다.
중앙엔 박지승 선배, 왼쪽엔 웨인 루니, 그리고 오른쪽엔 호날두.
플레처의 최초 선택은 지승 선배였다.
공을 몰고 질주하다 왼쪽을 흘끗 본 지승 선배가 루니의 발 앞에 정확히 떨어지는 스루패스를 전달.
바통을 이어받은 루니가 드리블을 두어 번 친 뒤,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쇄도하는 호날두에게 왼발로 낮은 크로스를 날렸다.
센터백 브루노 알베스가 사력을 다해 쫓아갔으나 한발 늦었다.
호날두가 넘어지면서 공에 오른발을 갖다 댔고, 이 슈팅은 뛰쳐나오던 에우통 아루다 골키퍼의 키를 넘기며 골문 왼쪽 구석에 꽂혔다.
침묵에 빠진 이스타디우 두 드라강.
결정적인 실점이었다.
“이야, 즐라탄. 거의 예언자 수준인데?”
사네티 주장이 즐라탄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즐라탄이 예언 하나 더 하죠. 이 골로 경기 끝입니다. 더 이상 득점은 안 날 거예요.”
그리고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 * *
인테르 VS 맨유의 챔스 4강 대진이 완성되자,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축구 커뮤니티는 폭발했다.
- 정백강 VS 박지승 대결 성사!
- 미쳤다 미쳤어 ㅋㅋㅋ 살다살다 이런 경기를 다 보네 ㅋㅋㅋㅋㅋㅋ
- 어디 응원해야 되냐 ㅠㅠ 행복한 고민이다 ^^
- 난 그래도 해버지 박지승 간다 ㅋㅋㅋ
- 정백강이 골 넣고 맨유가 이기는 게 베스트!!
- 뭘 모르네 ㅋㅋㅋ 인테르가 우승해야 정백강이 발롱도르를 받지 ㅋㅋㅋ
- 그건 그럼 ㅇㅇ 나도 그래서 인테르 응원할 거임
- 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응원합시다!!!!!
- 똥을 싸네 ㅋㅋㅋㅋ 정백강은 한국인 아니냐??
- 싸우지 좀 말고 즐겨~ 우리 입장에선 축제잖어~
언론에서 이런 호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신문, 방송 가릴지 않고 인터뷰 요청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중에는 GBS의 축구 전문 프로그램인 <하이, 풋볼>도 포함되어 있었고.
‘공중파에 나오면 또 엄마가 좋아하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정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최나연입니다.”
오, 신이시여.
“아... 네... 축구선수... 정... 백강입니다.”
심박수가 위험 수위로 치솟았다.
이탈리아의 금발 미녀들이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현해올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었건만.
내 이상형이 여기 있었네.
역시 내 취향은 한국인... 신토불이...
“제가 <하이, 풋볼> 진행을 맡은 지 얼마 안 돼서요. 좀 미숙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워낙 슈퍼스타셔서 많이 떨리네요.”
“저도 떨립니다, 나연 씨. 아니, 아나운서님? 진행자분? 제가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친... 뭐 하냐?
너 정백강이야.
자신감을 가져.
“나연 씨, 좋네요. 사실 제가 두 살 더 많긴 하지만요.”
연상.... 연상녀가 또 매력이 넘치지.
“정말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세요. 전 당연히 저보다 한참 어릴 줄 알았네요.”
“어머, 감사합니다.”
멘트 좋았다, 백강아.
최나연 아나운서라...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내가 왜 처음 보지?
회귀 전에 텔레비전을 많이 안 보긴 했는데...
키는 한 170cm 정도 될까?
연청 스키니진에 흰색 운동화, 상의로는 내 백넘버가 새겨진 인테르 레플리카를 입었다.
크게 멋 부리지 않은 스타일인데도 비율이 워낙 좋아서 꼭 모델 같다.
거기다 티 없는 새하얀 피부... 어우...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은 완전 취향저격...
표정 관리가 너무 힘들다.
“5분 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사인에 맞춰 매무새를 가다듬는 나연 씨의 모습은 선녀 그 자체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5분이 5초처럼 지나갔다.
드디어 떨어지는 큐 사인.
“축구팬의 밤을 책임진다! <하이, 풋볼>의 최나연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챔피언스리그 8강전! 정말 많은 분들이 밤잠을 설쳐 가며 지켜보셨을 텐데요. 준결승에서 아주 대단한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오늘은 그 주인공 중 한 명인 정백강 선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게요.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정백강입니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달콤한지.
옥구슬 굴러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어.
홀린 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하마터면 대답하는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꿈의 무대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박지승 선수와 만나게 되었어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제가 지승 선배의 엄청난 팬이에요. 우상과 함께 뛴다는 건 언제나 영광이죠. 이번 4강전도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승 선배 인터뷰는 안 하시나요?”
“맨체스터에는 제 파트너 배선재 아나운서가 가 있어요. 박지승 선수하고 친분이 있어서요.”
아아,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나연 씨를 만날 수 있었네요.
사랑합니다.
“지난 시즌 포츠머스에서 뛸 때 맨유를 상대로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3경기에서 무려 4골이나 넣으셨는데요. 비결이 있을까요?”
“하하. 운이라면 운이겠죠. 다만 맨유가 포츠머스보다 강팀이다 보니 공격적으로 경기에 임했고, 덕분에 제게 좋은 찬스가 나지 않았나 싶네요. 4강전에서도 좋은 징크스가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축구 관련 질의응답이 몇 차례 더 이어졌고, 슬슬 이야기가 개인 신상으로 빠졌다.
“이탈리아에서 혼자 지내시는데 적적하실 것 같아요. 훈련이나 경기가 없을 땐 보통 뭘 하세요?”
축구게임 많이 하고, 가끔 술 마시죠.
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이 여자 앞에선 정직하기 싫어.
“책을 주로 읽는 편입니다.”
옆에 문타리가 있었다면 뒤통수를 맞았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생각해 낸 게 독서냐.
“요즘 읽고 계신 책이나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세요?”
두뇌 풀가동.
노벨문학상 받은 사람 책이면 대충 되겠지?
신문에서 엄청 떠들었었는데...
밥... 밥 뭐시기였어...
아 맞아!
“밥 딜런의 책이 참 좋더라고요.”
순간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다.
뭐지? 내가 실언을 했나?
“네. 정백강 선수의 선택은 밥 딜런입니다. 가수로 더 유명하긴 하지만 책을 여러 권 쓴 작가이기도 하죠. 밥 딜런의 자서전인 <크로니클스(Chronicles)>는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이에요.”
이런, 밥 딜런이 가수였어?
노벨문학상 받았다 그래서 그냥 유명한 작가인 줄 알았지.
나연 씨의 적절한 수습이 아니었다면 매우 곤란할 뻔했다.
그나저나 우리 나연 씨는 뇌까지 섹시하네.
하긴 아나운서니까 당연한 건가.
쓸데없는 거짓말 때문에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나연 씨의 리드 덕분에 무사히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백강 선수.”
“감사합니다. 이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뇨. 이왕 멀리까지 왔는데 뽕은 뽑고 가야죠? 세리에 최고의 빅매치가 곧 열리잖아요. 인테르와 유벤투스의 경기까지 취재한 후에 돌아갈 예정이에요.”
“아나운서가 ‘뽕 뽑는다’ 이런 표현 써도 돼요?”
“어머, 죄송해요. 카메라 꺼지면 원래 성격이 나오는 편이라... 좀 민망하네요.”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똑똑한데 성격까지 털털하다?
소설 속 캐릭터라도 이렇게는 안 만들겠다.
그나저나 유벤투스전이면 모레.
아직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꽤 남았다.
“그럼 내일 팀 훈련 때 오시죠. 다른 동료 선수들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정말요? 그게 가능할까요?”
“훈련 장면 촬영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간단한 인터뷰는 가능할 겁니다.”
“너무 감사드려요. PD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네요. 이탈리아에 온 보람이 더 커졌어요. 사실 정백강 선수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지만요.”
어쩜 말도 이리 예쁘게 하는지.
PD 나부랭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습니다.
나연 씨가 좋다면 좋은 거죠.
“그리고 ‘정백강 선수’ 대신 ‘백강 씨’로 불러주세요. 호칭은 공평해야죠.”
“그럴까요? 백강 씨.”
싱긋 웃는 모습이 눈부시다.
이 감정, 사랑일까?
* * *
다음날, 나연 씨는 한층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하루 만에 사람이 바뀔 리는 없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정백강의 친구들’ 인터뷰 1번 타자는 루이스 피구 형님.
“송정국. 그 이름을 7년 동안 잊지 않고 있다.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에 진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말 끈덕지고 훌륭한 수비수였다. 2002 월드컵 이후로 우리를 탈락시킨 한국을 좀 미워했었는데, 지금은 아주 좋아한다. 백강 덕분이다.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아주 훌륭한 선수다. 백강 덕분에 은퇴 시즌을 아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위트와 반전과 나에 대한 칭찬이 적절히 섞인 아주 훌륭한 멘트였다.
역시 연륜이란 건 무시할 수 없다.
“말해 뭐하겠는가. 우리 팀에서 가장 믿음직한 공격수다. 즐라탄에겐 비밀로 해달라. 14년 동안 인테르에서 뛰었는데, 백강만큼 뛰어난 스트라이커는... 호나우두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 이 말도 즐라탄에겐 비밀로 해달라. 호나우두 광팬이라 내게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하하.”
사네티 주장도 예의 인자한 미소로 흔쾌히 취재에 응해 주었다.
다음은 문타리.
“백강보다는 한국에 계신 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포츠머스 시절부터 택배로 선물을 엄청나게 받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선물은 ‘가나초콜릿’과 ‘가나파이’다. 내가 가나 사람 아닌가. 나중에 백강한테 얘기를 듣고 엄청나게 웃은 기억이 난다. 정말 센스 넘치는 선물이었다.”
문타리 너, 그런 인터뷰 하면 나처럼 집에다가 창고 따로 만들어야 될 거야.
‘입 벌려라, 가나파이 들어간다’ 이런 거 모르지?
마지막으로 즐라탄이 나섰다.
“백강, 나보다 축구는 좀 못하지만 괜찮은 녀석이다.”
당연히 농담인 줄 알고 나연 씨와 제작진이 빵 터졌다.
여러분, 저거 진심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