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6화 (37/176)

36화

2009년 4월 18일 오후 3시 30분.

스타디오 올림피코 그란데 토리노.

경기장을 신축하는 동안 사용 중인 유벤투스의 임시 홈구장에는 25,000여 명에 달하는 팬들이 모여들었다.

세리에 A 32라운드, ‘데르비 이탈리아’를 보기 위한 인파였다.

리그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현재, 부동의 1위는 우리 인테르.

28승 3무, 승점 87점.

시즌 초반부터 압도적인 모습을 쭉 이어가며 단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아직 7번의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사실상 우승을 확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위는 오늘 상대하게 될 유벤투스.

25승 3무 3패로 승점 78점을 마크하고 있었다.

예년 같았으면 유벤투스 역시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한 성적이었으니...

좀 억울할 만도 했다.

“모두가 리그 경쟁은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라도 발생할 수 있는 게 바로 축구 아니겠는가.”

유벤투스를 이끄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결연한 자세로 말했으나, 리그 순위가 뒤집힐 거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기장을 찾은 홈팬들 역시 정말 우승을 바라기보단, 그저 꼴 보기 싫은 인테르에게 1패라도 안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훨씬 크리라.

“백강, 오늘은 무조건 골 넣어야지? 사랑스런 여자친구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라커룸에서 문타리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인터뷰했던 그 아나운서 말이야. 네 여자친구잖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죄송하지만 잘못 짚으셨네요, 문타리 씨.”

“여자친구가 아니라면, 짝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아주 그냥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그... 그래 보였어?”

“어지간히 멍충이가 아니라면 다 알걸?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있나. 귀엽더라, 아주.”

이럴 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타리한테 귀엽다는 말을 듣다니 충격이다.

진중하고 댄디한 이미지를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혹시 나연 씨도 눈치를 챘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막 화끈거린다.

“어쨌든 잘해 봐. 패스 쫙쫙 넣어줄 테니.”

고... 고맙다.

역시 타리 형밖에 없어.

경기장에 입장한 후 기자석 쪽을 바라보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나연 씨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실은 현실이구나.

영화나 드라마에선 기가 막히게 딱 찾던데.

양쪽 눈 시력이 모두 2.0인 내 눈에 안 보이면 안 보이는 게 맞다.

몽골 사람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에야...

애니웨이.

오늘 빅매치에는 나연 씨가 보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큰 의미가 또 있었다.

“기분이 엄청나게 이상한데?”

“그러게나 말이야. 더 만날 일이 없다니.”

“고생 많았어.”

“너도.”

경기 전 악수 타임에서 진한 포옹을 나누는 두 명의 발롱도르 위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를 보내며 세계 축구계를 쥐락펴락했던 위대한 미드필더들.

바로 루이스 피구와 파벨 네드베드가 맞붙는 마지막 경기였다.

피구 형님은 시즌 개막할 때 이미 은퇴를 공언했었고, 네드베드 역시 얼마 전에 현역 생활을 끝낸다고 밝힌 바 있었다.

레전드들의 투샷은 언제나 감동.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는데...

“존나 멋있네. 시발.”

옆에 서 있던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의 묵직한 한방에 밀려오던 습기가 쑥 들어가 버렸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만난 사람 중에 욕 차지게 하는 걸론 단연 넘버원이다.

마테라치 형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경기에 집중할 수 있겠네요.

* * *

전반 초반은 탐색전 양상.

양 팀 모두 조심스럽게 경기를 운영했다.

비겨도 충분히 만족인 우리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고, 유벤투스 입장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대조적인 양 팀의 상황은 벤치의 풍경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무리뉴 감독이 평온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반면, 라니에리 감독은 시종 일어선 채로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양반도 팀 내 입지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처음 지휘봉을 잡은 지난 시즌 무관.

이번 시즌 절치부심의 자세로 달려들었으나 우리에게 밀리면서 리그는 힘들어졌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첼시에게 패해 16강 탈락.

그나마 하나 남은 대회는 코파 이탈리아였는데, 홈에서 열린 준결승 1차전에서 라치오에게 패점을 안으며 전망이 매우 어두운 상태였다.

어디 어설픈 중하위권 팀도 아니고,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는 유벤투스가 2년 연속으로 트로피 하나 못 건진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라니에리 감독의 경질 가능성은 90% 이상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예상보다 비교적 잠잠하게 흘러가던 경기.

그러나 슬슬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발단을 제공한 건 즐라탄과 조르조 키엘리니.

패스를 받으러 달려가는 즐라탄의 유니폼을 키엘리니가 거칠게 잡아채며 발을 걸었고, 이에 즐라탄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시비가 붙었다.

“축구 진짜 더럽게 하네.”

“뭐, 뭐, 어쩌라고.”

“한 판 붙을까?”

“그러시든가.”

작년에 맞붙었을 때도 두 사람이 유독 자주 부딪쳤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지.

근데 리니야, 적당히 해.

즐라탄, 태권도 배운 남자야.

“워워, 그만해.”

험악한 인상의 거구들 틈을 뚫고 들어가 즐라탄을 뜯어말렸다.

나연 씨가 보고 계셔.

추한 싸움은 하지 말자고.

충돌은 있었지만 덕분에 좋은 프리킥 기회를 얻었다. 결과론적으로는 키엘리니가 쓸데없는 파울을 범한 셈.

키커는 즐라탄.

골대와의 거리는 약 25m.

즐라탄의 성향상 무조건 직접 슈팅이었다.

삑---

휘슬이 울리고, 즐라탄이 키엘리니에 대한 분노를 오른발에 담아 강력한 캐논 슈팅을 날렸다.

뻐어어엉---

수비벽을 넘겼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맞았다면 부상을 입었을 지도...

그만큼 힘이 실린 슈팅이었다.

MSG 좀 치자면 볼 주변 공기 흐름이 바뀌는 게 느껴졌을 정도.

너무 과장 아니냐고?

옆에서 안 봤으면 말을 마세요.

지난번 데르비 이탈리아에서 무려 4골이나 실점하며 체면을 구겼던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공을 옆으로 쳐냈다.

이번에는 코너킥 찬스.

잉글랜드 진출 초창기만 하더라도 ‘세트피스의 황제’로 불렸던 나지만, 요즘엔 데드볼 상황에서 득점이 거의 없었다.

최소 2명, 경우에 따라서는 3명이나 나한테 붙어서 점프를 못 하게 방해하기 때문.

남자답지 못한 녀석들 같으니...

피구 형님이 즐라탄의 이마를 겨냥하며 시도한 코너킥을 수비 가담한 스트라이커 빈첸초 이아퀸타가 헤더로 걷어냈다.

그러나 공은 멀리 가지 못하고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대기타던 문타리의 품에 안겼다.

“막아야 돼!”

문타리 역시 왼발 한방이 있는 친구.

부폰의 외침에 따라 중거리슛을 견제하기 위해 유벤투스 수비진들이 뛰쳐나갔다.

토옹---

- 어쨌든 잘해 봐. 패스 쫙쫙 넣어줄 테니.

한 번 한 약속은 지키는 남자 중의 상남자.

그 찬란한 이름은 문타리.

순간적으로 전열이 허물어진 유벤투스 수비진의 머리 위로 정교한 로빙 패스가 날아들었다.

부폰이 팔을 허우적대며 달려들었으나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툭---

힘을 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쭉 뻗은 부폰의 손끝을 피해 슬쩍 밀어 넣은 헤더가 바닥에 한 번 맞은 뒤 골라인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으아악!”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빼내려던 키엘리니가 골포스트에 머리를 부딪혀 비명을 내질렀다.

어떡해? 많이 아프겠다.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면 편한 것을.

세리머니는... 너무 경박해 보이지 않게 양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갈무리했다.

나연 씨, 내 골을 어떻게 봤을까?

고개를 돌려 기자석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지만 역시 나연 씨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아... 안 보고 계신 건 아니겠죠?

* * *

“자,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정백강 선수의 결승골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이곳은 토리노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식당.

<하이, 풋볼> 제작진의 회식 장소였다.

사실 내가 올 필요는 없는 자리지만, 고생한 제작진에게 한턱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따라왔다.

마침 오늘 내 헤더골로 1-0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었지만.

“오랜만에 한국어 실컷 쓰니까 좋네요.”

옆에 나연 씨가 있으니 더 좋고요.

이 식당은 테이블 하나가 4인 기준이었는데 나름 초특급 게스트인 나는 담당 PD인 정민석, 메인 작가인 박화윤, 그리고 나연 씨와 함께 앉게 되었다.

자리 배치를 누가 했는지, 나연 씨가 바로 옆자리다. 아주 나이스.

“짠 할까요?”

아이고, 당연히 해야죠.

향수인지 샴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연 씨의 기분 좋은 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백강 씨는 본관이 어디에요?”

아이고 정 PD님, 무슨 그런 구시대적인 질문을 하십니까.

하지만 답변은 친절하게.

“좀 희귀해요. 광산 정씨라고...”

“이야! 집안사람을 여기서 다 만나네! 어쩐지 돌림자가 익숙하다 했어. 항렬로 하면 내가 아저씨, 아니지. 할아버지뻘 정도 될 거야.”

“아... 네... 하하...”

으으... 이런 거 제일 싫다.

은근히 반말 섞는 것도 거슬린다.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거든요.

“어유, PD님도 참. 귀한 손님 모셔놓고 뭐 그런 얘길 하세요. 아직 마흔도 안 되신 분이. 술이나 마셔요, 여기 와인 좋네요. 향도 좋고, 산미도 딱 좋고. 계속 들어가네.”

어찌 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술이 몇 순배 돌고 취기가 오르자 정민석 PD와 박화윤 작가가 자기들끼리 프로그램 편집 방향에 대해서 이견을 보이며 다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연 씨와 딥 토크 분위기.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분위기 좋아.

“아나운서 일은 어때요? 겉으로 보이는 거랑은 많이 다를 것 같은데. 힘들지 않아요?”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는 직장 이야기가 최고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 일터에 불만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다른 건 다 괜찮아요. 재미도 있고, 사람들도 몇몇 빼면 대체로 좋구요. 근데 아침 라디오가 너무 힘들어요. 아무리 늦어도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제가 아침잠이 좀 많거든요. 다행히 아직 지각한 적은 없지만 생방 30초 전에 겨우 들어간 적은 몇 번 있어요. 이러다 조만간 시말서 한 번 써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제가 모닝콜 해드릴까요? 서울이 새벽 5시면 밀라노는 밤 9시밖에 안 되거든요.”

말을 내뱉고 나니 아차 싶다.

정백강 이 미친놈아, 벌써 취했냐?

만난 지 이제 겨우 사흘째인데...

이상하게 나연 씨 앞에서는 컨트롤이 안 된다.

“정말요? 그래 주시면 너무너무 고맙죠.”

내가 지금 뭘 들은 건가.

나연 씨도 취했나?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요?”

“국제전화 요금이 엄청 많이 나올 텐데요.”

귀엽다, 귀여워.

“음... 확실히 심각한 문제네요. 근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생각보단 좀 버는 편이거든요. 보기엔 이래도.”

“풋!”

나의 능청에 나연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네요. 저도 모르게 제 벌이 기준으로 생각했나 봐요. 민망하네요.”

“그럼 모닝콜 콜?”

“콜! 핸드폰 주세요.”

나연 씨가 내 핸드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 주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사실 하나.

심지어 손가락까지 예쁘다.

“나, 백강 씨 믿고 알람 안 맞춰도 되죠?”

“물론입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경기 시간이랑 겹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필드 위에서 전화하면 되죠, 뭐.”

“어머, 진짜 믿음직스럽네요.”

“짠 할까요?”

“짠!”

우리 둘이 꽁냥대는 중에도 정 PD와 박 작가의 언쟁은 계속 되었다.

너무 싸우지 마세요들.

이렇게 훌륭한 프로그램은 오래오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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