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7화 (38/176)

37화

57분... 아직 아니야.

응? 왜 시간이 안 가지?

핸드폰 시계가 고장 났나?

아, 이제 58분이군.

원래 1분이라는 게 이리 긴 시간이었나 싶다.

59분... 9시! 드디어 9시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벨소리의 바이브만큼이나 내 심장도 요동치며 부르르 떨린다.

“여... 여보세요...”

나연 씨다.

잠에서 막 깬 듯 조금은 거친 목소리.

방송 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물론 그래서 훨씬 더 매력적이고.

“일어나요. 라디오 하러 가야죠.”

“정말 해줄 줄은 몰랐는데, 모닝콜.”

“난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어요.”

“후후... 고마워요, 백강 씨. 이제 씻으러 갈게요.”

“네, 방송 잘해요.”

뚝-

너무 짧다.

설렘이 밀려가고 아쉬움이 몰려온다.

엄밀히 따지면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통화를 더 길게 이어나가기는 어렵다.

회귀 전, 잉글랜드에서 적응에 실패하고 망나니처럼 살던 인생을 떠올려 본다.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몇 개월.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즐겼던 여자는 많았지만 ‘진지한 연애’라는 걸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얻은 이번 기회에서는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대상이 나연 씨라면 좋겠다.

“거참, 웃기네.”

30대를 훌쩍 넘긴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던 나다.

지금도 그때의 경험 덕분에 순탄하게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고.

그런데 지금의 연애 감정은 딱 20대 초반에 느낄 만한 뜨거움 그대로다.

정신이 육체에 적응해 가는 거냐.

에이, 모르겠다.

이것저것 생각하기 귀찮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때보다 조건은 훨씬 좋으니까.

* * *

엄밀히 말하면 지금 내가 여자 문제에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유벤투스전 끝나자마자 바로 삼프도리아와의 코파 이탈리아 4강 2차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발테르 마차리 감독이 이끌고 있는 삼프도리아는 리그에서 14위로 강등만 겨우 면한 처지였으나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전혀 달랐다.

16강에서 2부리그 팀인 엠폴리를 상대로 5-0, 8강에서는 세리에 A 멤버인 우디네세를 4-0으로 관광 보내며 파죽지세로 4강에 올랐다.

경기당 4.5골에 달하는 경이적인 득점력의 중심에는 ‘악마의 재능’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카사노와 ‘나름 만능 스트라이커’ 잠파올로 파치니가 있었다.

코파 이탈리아에서 두 선수의 기록은 경이적이었다. 카사노가 3골 4어시스트, 파치니가 5골 2어시스트.

팀이 기록한 모든 골이 두 사람의 발이나 머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었다.

이 투톱은 우리 홈에서 열린 4강 1차전에서도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며 완전히 물이 오른 득점 감각을 뽐냈다.

다행히 내가 두 골을 똑같이 갚아주고, 세트피스에서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의 헤더골이 터지면서 3-2로 진땀승을 거두긴 했지만, 2차전이 원정이라는 게 살짝 부담스러운 상황.

“로테이션은 없다.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

시즌 개막 전 트레블을 공언했던 무리뉴 감독 역시 핵심 주전을 전부 투입하며 필승의 각오를 내비쳤다.

삼프도리아의 홈구장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에는 3만 5천여 명의 관중이 운집하며 거의 매진 사례였다.

세간의 예상은 아무래도 우리 쪽에 좀 기울긴 했으나, 이변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축구를 오래 봐온 올드팬일수록 삼프도리아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리에 A 16번, 코파 이탈리아 5번.

세리에 A 1번, 코파 이탈리아 4번.

위는 우리 팀, 아래는 삼프도리아의 우승 횟수.

비단 이번 시즌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코파 이탈리아에서만큼은 명문 구단 못지않은 저력을 자랑하는 팀이 바로 삼프도리아였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원래 어떤 스포츠든 ‘절대강자’는 인기가 없는 법 아닌가.

사실상 네라주리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모든 축구팬들이 삼프도리아를 응원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뭐, 때로는 악당이 되는 것도 재밌지.

“힘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자.”

“네, 감독님!”

생각보다 치열했던 1차전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무리뉴 감독은 오늘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개인적으로도 오늘 경기는 반드시 이길 필요가 있었다.

이번 시즌 유일하게 내가 득점 랭킹 1위를 못하고 있는 대회가 바로 코파 이탈리아였던 것.

나도 3경기 4골이라는 빼어난 활약을 하고 있었지만, 파치니의 무지막지한 퍼포먼스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컵 대회 득점왕이 뭐 별거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득점 1등을 먹는다면 일종의 ‘득점왕 트레블’을 기록하는 셈.

명실상부한 이탈리아 최고의 골잡이라는 뜻이니 기록에 탐이 나는 게 사실이었다.

킥오프.

우리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 우-----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폭풍처럼 쏟아지는 엄청난 야유.

밀라노 더비에서 밀란 팬들에게 듣던 소리와 흡사한 느낌이다.

이거, 우리 탈락을 기원하려고 밀라노에서 제노바까지 원정 온 팬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백강!”

사네티 주장이 우리 진영에서 볼을 잡자마자 내 머리를 겨냥하고 높은 패스를 날렸다.

빠르게 양쪽 옆을 스캔.

동료들의 현재 위치를 확인한 후 날아올랐다.

나의 선택은 즐라탄.

챔피언스리그 8강을 전후해서 다시 투톱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즐라탄은 최근 시즌 초반에 비해 오프더볼 무브를 활발히 가져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결과 예전보다는 콤비 플레이가 잘 맞아들어가고 있는 중.

물론 기본적인 스타일이라는 게 있으니 ‘영혼의 단짝’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말이다.

머리로 떨궈준 공을 받은 즐라탄이, 착지하자마자 돌아 들어가는 내 발 앞으로 절묘한 땅볼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다.

허를 찌른 플레이에 삼프도리아의 오프사이드 트랩은 무력화.

완벽한 찬스에서 날린 회심의 왼발 슈팅이 골대를 훌쩍 넘어 관중석을 향해 날아갔다.

아... 오른발이었으면 혹시 몰랐는데...

“발로 주면 어떡해! 머리로 줘야지! 아직도 모르겠어? 무조건 높게! 오케이?”

즐라탄을 호되게 질책하고 나선 건 내가 아니라 오른쪽 윙어로 선발 출전한 발로텔리였다.

좋은 지적이긴 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거참 이상하네...

* * *

오늘 삼프도리아의 경기 콘셉트는 명확했다.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역습 한방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

점유율이고 나발이고 포기한 채 내려앉아 파울을 불사한 수비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단, 수비라인을 많이 끌어내리진 않았는데 이는 물론 나의 높이를 의식해서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페널티박스 밖으로 밀어낸 후 유니폼을 잡든, 걷어차든, 어깨를 붙잡든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 내 헤더를 견제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렇게 자신 없어? 정정당당하게 붙어보자고.”

내가 불만을 표시하며 심기를 살살 긁었으나 상대 수비수들은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묵비권 전략이라...

이런 어른스러운 녀석들 같으니.

주심을 맡은 니콜라 리촐리 심판이 좀만 엄격했어도 벌써 카드 몇 장은 나왔을 텐데 조금 아쉽다.

“아오... 진짜 미치겠네!”

내가 거친 파울성 수비에 시달리는 동안 발로텔리가 또 한 번의 슈팅 찬스를 골문 옆으로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

발로텔리는 2009년 들어 우리 팀에서 가장 폼이 좋은 선수 중 하나였는데, 오늘 상태는 영 시원치 않았다.

삼프도리아 수비진이 사이드를 철저히 틀어막고 중앙을 완전히 열어주는 극단적인 수비법을 들고나온 것이 주효했다.

나에 대한 크로스 시도가 차단되니 중앙으로 파고들며 직접 슈팅을 날리는 빈도가 높아졌는데, 어쩐지 영점도 잘 안 맞았고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이 녀석... 상태가 메롱인 걸 보니 어젯밤에 그렇고 그런 밤을 보낸 거 아니야?

발로텔리 너, 요즘 클럽 죽돌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단다.

형이 지난 생에 방탕하게 살아봐서 아는데 그러다가 너 금방 훅 가.

젊을 때 미리미리 관리해.

어차피 내 말 따위는 듣지도 않겠지만.

“젠장할!”

발로텔리가 매가리 없는 상태라면, 즐라탄은 힘이 너무 넘쳐서 문제였다.

오늘 ‘베수비오산 대폭발 슛’만 4개째.

아무래도 감독님이 얘기한 ‘힘의 차이’를 보여줄 생각에 몸이 굳어버린 듯하다.

넣을 수 있을 때 넣지 못하면 꼭 카운터 펀치를 맞는 게 축구라는 스포츠의 생리.

삼프도리아의 투톱이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딱 한 번의 기회였다.

즐라탄의 돌파 시도를 저지하며 공을 탈취한 수비형 미드필더 안젤로 팔롬보가 무작정 앞 공간으로 때려 넣은 장거리 패스.

우리 수비가 충분히 걷어낼 수 있는 공이었으나,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낙하지점을 잘못 잡으며 너무 성급하게 점프를 했다.

뒷공간으로 흐른 공을 캐치한 카사노가 골문을 향해 진격을 시작.

사고를 친 부르디소가 죽을힘을 다해 쫓아가 옐로카드를 각오하고 과감하게 백태클을 시도했다.

하지만 공은 이미 카사노의 발끝을 떠나 있었다.

모두가 카사노에게 신경이 팔린 사이, 어느새 골문 앞으로 쇄도하며 자리를 선점한 파치니에게 연결된 정확한 크로스.

수비의 방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줄리우 세자르 형님의 위치를 확인한 파치니가 방향만 살짝 돌려놓은 헤더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우오오오오오-----

광란의 도가니가 된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

시계는 전반 31분을 가리켰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우리 팀의 탈락.

벤치에 앉아 있던 무리뉴 감독이 버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을 돌려세웠고, 밀란과 유벤투스를 갖고 놀던 우리가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끌려다닐 줄이야.

공이 무지하게 둥그네, 진짜.

리그에서 만났을 땐 이렇게 잘하지 않았는데...

만일 ‘코파 이탈리아의 신’이 있다면 분명 삼프도리아는 분명 그 가호를 받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삑--- 삑---

답답했던 전반전이 종료되었다.

경기 내용을 보면 소위 ‘안티 풋볼’의 대가라는 무리뉴 감독이 상대의 안티 풋볼에 제대로 당한 셈이었다.

“지금 상대가 너무 거칩니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부상당하거나 싸움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후반전엔 좀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반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요.”

이탈리아 진출 후 지금까지 축적한 데이터에 따르면, 리촐리 주심은 심판의 권위를 상당히 중시하는 인물.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동방예의지국 출신다운 예의와 약간의 비굴함을 섞어서 판정에 대해 어필을 했다.

어디서 돈을 먹었거나 우리 팀에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미세한 효과라도 있으리라.

내가 수비수 출신이라 좀 아는데, 경고 한 장 있고 없고가 정말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밝은 표정으로 걸어가는 삼프도리아 수비진을 바라보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

녀석들, 기고만장해 가지고.

파울 빡세게 불어주기 시작하면 너네 다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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