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8화 (39/176)

38화

후반전 시작에 앞서 전광판에 양 팀 팬들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이 잡혔다.

목에 멋들어진 스카프를 둘러멘 중년 신사 로베르토 만치니가 그 주인공.

63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삼프도리아의 역대 레전드를 꼽을 때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 바로 만치니였다.

흔히 디에고 마라도나를 ‘나폴리의 신’이라고 부르는데, 만치니에게는 ‘삼프도리아의 신’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삼프도리아에서 뛰었으며, 구단 역대 최다 출장 기록과 최다 득점 기록은 둘 다 그의 몫이었다.

이번 시즌 가장 중요한 경기에 친히 강림한 신에게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팬들.

만치니가 일어나서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한편 그는 내가 이적해오기 전, 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네라주리를 이끌었던 감독이기도 했다.

재임 중 3번의 스쿠데토, 2번의 코파 이탈리아를 품에 안으며 매우 훌륭한 성적을 거뒀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흠이 있었으니...

이상하게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했었다.

감독 버전의 즐라탄이라고나 할까?

결국 챔스 우승을 원하는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에 의해 물러나게 됐으니, 개인적으로는 좀 억울한 심정도 있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삼프도리아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후반전 킥오프.

“천천히 가자!”

상대 수비형 미드필더인 안젤로 팔롬보의 기합 소리와 함께 후방에서 볼을 돌리기 시작하는 삼프도리아 녀석들.

급할 게 없다는 자세였다.

아주 그냥 여유가 넘치는구만.

기분 나쁘게.

“페이스에 말리면 안 돼! 아직 시간 많아!”

사네티 주장의 지당한 말씀.

이런 상황에서 조급하게 달려드는 건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밖에 안 된다.

서두르지 않고 팀 단위로 착실하게 압박을 가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크아악!”

삐빅-------

사주장의 말을 어디로 들어 처먹었는지, 감정 잔뜩 실린 깊은 태클로 옐로카드 적립해주시는 마리오 발로텔리 씨.

전반전 동안 완전 엉망이었던 본인의 퍼포먼스 때문에 화가 많이 난 듯싶다.

“진정해, 진정. 너 퇴장당하면 우리 탈락이야.”

당장 말리지 않으면 심판한테 달려들 기세라, 얼른 달려가 발로텔리를 끌어안았다.

더러운 성깔 좀 죽이고, 훈련 좀 열심히 하고, 노는 것 좀 줄이면 대성할 재목인데 말이지...

발로텔리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멘탈도 재능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경기 재개, 정확히 말하면 볼 돌리기가 재개되었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공은 기어이 골키퍼인 안토니오 미란테에게까지 연결되었다.

기회는 찬스.

느린 발로나마 최선을 다해서 미란테에게 들러붙었다.

바로 뻥 걷어내지 않고 발재간을 부리며 나를 제치려 드는 미란테.

미쳤어? 이 사람이 나를 뭘로 보고.

나, 수비로 EPL 갔던 남자야.

미란테가 오른쪽으로 공을 차내는 모션을 취하면서 왼쪽으로 한 번 접었지만 그런 뻔한 페이크에 속을 내가 아니었다.

툭---

정확하게 공만 따내는 스탠딩 태클.

수비 교본 영상을 만든다면 이 장면을 교보재로 써도 될 만큼 완벽한 태클이었다.

“안돼!”

돼!

미란테의 치명적인 실책.

내가 아무리 발을 못 써도 이건 넣을 수 있다.

아마 우리 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

후반 12분.

말 그대로 천금 같은 동점골이 터졌다.

Grande!!! Testa!!!

Grande!!! Testa!!!

돌림 노래를 하듯 내 애칭인 ‘위대한 머리’를 연호하는 원정팬들.

손 닿을 거리까지 달려가 내가 먼저 선창했다.

“Grande!!!”

“Testa!!!”

슈퍼스타의 멋진 팬서비스에 미쳐 날뛰는 인테르 팬들.

너무 좋아서 눈물을 흘리는 미모의 여성팬들도 몇 보였다.

나연 씨만큼은 아니지만...

리그에서의 골도 물론 짜릿하지만 토너먼트 경기에서 터뜨리는 골은 뭔가 더 각별한 맛이 있다.

“백강! 꽁으로 먹었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축알못 귀요미 문타리에게 일침을 날려 주었다.

“꽁이라니! 이것도 다 실력이야!”

* * *

1993-1994 시즌 이후 15년 만의 결승 진출을 목전에 뒀던 삼프도리아가 이제는 쫓기는 입장이 되었다.

수비수 미르코 피에리를 빼고 192cm의 장신 스트라이커 에밀리아노 보나촐리를 투입하며 승부를 걸어오는 발테르 마차리 감독.

무리뉴 감독도 즐라탄을 불러들이고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에게 보나촐리 봉쇄 특명을 내렸다.

경기 시작 전에는 ‘힘의 차이’ 드립을 치면서 완전히 밟아 버릴 기세였는데, 의외로 상대의 저항이 거세자 곧바로 실리적인 선택을 한 무리뉴 감독이었다.

이런 뻔뻔함(?)이야말로 무리뉴의 트로피 수집을 서포트하는 힘일 테지.

몸싸움과 고공 플레이에 능한 마테라치가 중심을 잡는 우리의 5백은 그야말로 철옹성.

기대를 모았던 보나촐리는 마테라치와의 헤더 싸움에서 철저하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공중에서 마테라치 형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으니...

삼프도리아의 유일한 크랙인 안토니오 카사노가 개인전술로 균열을 주려 했으나, 전반전 큰 실수 이후 완벽하게 각성한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몸을 던지며 악착같이 막아냈다.

쉼 없이 계속되는 공방전.

후반 30분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자 삼프도리아 선수들의 몸놀림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두드려도 두드려도 꿈쩍 않는 수비벽을 상대하다 보니 제풀에 지쳐 버린 것이다.

파앙---

사이드로 빠진 카사노가 보나촐리의 머리를 향해 올려준 크로스를 마테라치 형님이 다시 한 번 헤더로 걷어냈다.

이 공을 잡아낸 선수는 문타리.

기동력을 상실한 삼프도리아의 수비 전환 속도가 매우 느렸다.

아주 좋은 역습 기회.

“바로 줘!”

척하면 척.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

문타리가 지체 없이 로빙 패스를 시도했고, 나를 마크하고 있던 다니엘레 가스탈델로가 다급한 마음에 점프한 나를 슬쩍 밀쳤다.

삐비빅-----

드디어 불어주는구나.

하프타임 때 니콜라 리촐리 심판에게 했던 ‘사바사바’가 늦게나마 그 효험을 드러냈다.

여지없이 올라가는 옐로카드.

완전히 고의였고 부상 위험이 있는 플레이였기 때문에 당연한 판정이었다.

그러나...

“아니 시발, 이게 어떻게 경고야? 손도 안 댔단 말이야!”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탈락은 눈앞에 있고, 경기는 죽어라고 안 풀리고, 막아야 할 정백강은 잘해도 너무 잘하고.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가스탈델로가 그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 순간 리촐리 주심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지며 곧바로 주머니에 손이 갔다.

두 번째 옐로, 그리고 빨간 거.

심판의 권위를 중시하는 리촐리의 성향을 생각했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어리석은 녀석...

우우우우우우------

형언할 수 없는 야유 속에서 가스탈델로가 벤치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멘탈도 재능이라고.

한 명 보내면서 경기는 더더욱 우리 쪽으로 기울었고, 프리킥 찬스는 보너스였다.

골문과의 거리는 약 28m.

약간 멀었지만 발로텔리의 킥력이라면 뭔가가 나올지도 몰랐다.

뻐엉-----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무회전 프리킥.

수비벽을 넘긴 공이 마치 너클볼처럼 춤을 추며 미란테 골키퍼를 현혹했다.

장갑을 살짝 스치면서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공.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골이었다.

“막아! 당장 막아! 저 미친놈이 진짜!”

평소 신사다운 언행으로 존경받는 사네티 주장이 험한 말을 내뱉었다.

이미 경고가 있는 발로텔리가 또 상의 탈의 세리머니를 펼치려고 했기 때문.

마테라치 형님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발로텔리의 유니폼을 움켜잡으며 제지했다.

어떻게든 벗으려고 버둥거렸지만 힘으로 마테라치 형님을 이길 순 없었다.

무슨 노출증이라도 있나?

왜 이렇게 못 벗어서 안달이야?

* * *

[인테르, 삼프도리아 꺾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 선착... 상대는 라치오 또는 유벤투스]

[또 정백강... 4강전 두 경기서 3골 폭발!]

[점점 높아지는 트레블 가능성, ‘스페셜 원’의 아주 스페셜한 시즌]

결국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1차전 3-2, 2차전 2-1.

우리 팀은 종합전적 2승으로 깔끔하게 결승전에 진출하며 이탈리아 최강팀다운 면모를 뽐냈다.

그러나 두 경기 모두 접전까지 끌고 간 삼프도리아의 저력은 정말 엄청났다.

내년 토너먼트에서 꼭 피하고 싶은 팀이 생겼다.

차라리 밀란이나 유벤투스가 낫지.

어휴...

애니웨이.

군소(?) 대회인 코파 이탈리아 준결승을 마치자 곧바로 메인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망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무려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이번 시즌 EPL에서도 선두를 질주 중이었으니, ‘최강의 상대’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챔피언스리그 개편 이후 2년 연속 우승한 팀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우리 입장에선 좋은 징크스다. 아마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인테르는 분명 강하다. 어쩌면 이번 시즌 전 유럽에서 가장 강한 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50년 동안 축구판에 있다 보니, 저절로 깨닫게 된 진리가 하나 있다. 가장 강한 팀이 늘 우승하는 건 아니다.”

양 팀 감독들은 언론을 통해 이미 전초전에 들어갔다.

1차전 장소는 올드 트래포드.

포츠머스를 떠난 이후 잉글랜드 땅을 밟는 건 처음이었다.

“오우, 안개 봐. 그래, 이게 잉글랜드지.”

맨체스터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이동하면서 문타리가 중얼거렸다.

거의 1년 만이구나.

왠지 모르게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부와 명성의 출발점이 바로 잉글랜드 아니겠는가.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겠다.

- 인테르 선수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우리가 묵을 호텔 로비에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

이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 중 우리를 정말 환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맨체스터의 축구 열기는 말해 입 아픈 수준.

음식에 설사약이라도 안 타면 다행이다.

“일단 오늘은 푹 쉬도록.”

휴식하라는 감독님의 지시가 떨어졌지만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다.

이럴 땐 역시...

“응? 그거 뭐야?”

방을 같이 쓰게 된 문타리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냐니, 책 처음 봐?”

“책을 처음 보는 건 아닌데, 네가 책을 읽는 건 처음 보지.”

예전에 이거랑 똑같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입장은 반대였지만 말이다.

“<크로니클스(Chronicles)>? 밥 딜런이라... 이 사람 유명한 가수 아냐?”

아니?

머리털 나고 이런 굴욕은 처음이다.

심지어 문타리도 밥 딜런이 가수라는 사실을 아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그래도 나연 씨와의 인터뷰 이후 공부를 미리 해놔서 다행이다.

“유명한 정도가 아니지.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중 하나라고. 음악으로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만능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엣헴.”

“그렇구나.”

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대답한 문타리가 가방을 부스럭거리며 비디오 게임기를 꺼냈다.

“같이 피파나 하려고 했더니... 나도 열혈 독서인인데 방해할 순 없지. 아무래도 게임은 나 혼자 해야겠다. 책 열심히 읽어.”

크흠.

제법 강력한 일격이다.

하지만 소용없다.

사랑의 힘으로 유혹을 이겨내겠어.

다음에 나연 씨를 만나게 되면 책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하는 거다.

“골! 이 맛이지. 오늘따라 컨트롤 기가 막히네.”

저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하다.

나연 씨, 제게 힘을!

“백강! 와... 완전 노마크였는데 이걸 놓치냐. 게임에서도 개발이네 정말. 헤더 말고는 쓸 수가 없어... 크레스포랑 교체해야겠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

그러나 효과는 굉장했다.

더 이상은 못 참아.

“네가 못 다뤄서 그래. 발로도 게이지 조절만 잘하면 해트트릭도 하겠다.”

“에이, 그건 무리지.”

“내기 고?”

“콜.”

나연 씨, 이것만은 잘 알아두세요.

절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게임은요.

남자의 자존심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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