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잘 잤어요?”
“네. 오늘이 1차전이죠?”
“잘 아시네요.”
“그럼요, <하이, 풋볼>의 명 MC인데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드디어 정백강 대 박지승의 대결을 볼 수 있겠네요. 저도 내일 새벽에 경기 꼭 볼게요.”
“어디 응원하실 건가요?”
“음... 비밀이요.”
인테르라고 대답 안 해줘서 더 귀엽다.
비밀 있는 여자라.
매력적이지 않은가.
“아, 맞아. 지난번 인터뷰한 거 방송됐거든요. 인터넷에서도 보실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바로 보죠 뭐.”
“그럼 저는 씻으러 갈게요. 매번 감사해요.”
제가 더 감사하죠, 나연 씨.
당신의 목소리와 함께라면 아무리 고된 훈련도 이겨낼 수 있답니다.
통화를 종료한 후 GBS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나연 씨 말대로 나와 지승 선배의 인터뷰 영상이 편집되어 올라와 있었다.
어디... 잘 나왔나 볼까?
큭!
문타리가 나연 씨에 대한 내 감정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이제야 알겠다.
붉게 상기된 얼굴.
평소보다 훨씬 높은 톤에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냥 꿀도 아닌 로열젤리가 뚝뚝 떨어지는 하트 모양 눈동자까지.
- 그렇게 포지션 변경 후에 첫 골을 넣게 된 거죠. 흐흐흐.
‘흐흐흐’라니.
저 음흉하고 천박하게 들리는 웃음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와중에 나연 씨는 왜 이렇게 못 나왔지?
화면이 실제 미모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담고 있다.
- 밥 딜런의 책이 참 좋더라고요.
나는 이 대목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창을 닫아 버렸다.
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어쩐지 싸한 기분에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돌아보았다.
- 정백강ㅋㅋㅋㅋ 축구는 졸라 잘하는데 여자한텐 말도 안 되게 약한듯ㅋㅋㅋㅋㅋㅋ
- 얼굴 빨개진 거 핵개귀엽.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음 ㅇㅇ
- 바짝 얼어가지고 발끝 모으고 다소곳이 앉은 게 킬링포인트 ㅋㅋㅋㅋㅋ
- 원래 정백강 별로 안 좋아했는데 급호감됨 ㅋㅋ 하지만 그래도 최나연은 건들지 마라 ㅡㅡ
- 저 정도면 썸씽 있는 거 아닌가? 우리 백강이 축구에 집중해야 되는데 걱정...
- 최나연이 뭐가 이뻐 ㅋㅋㅋ 이탈리아에 미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ㅋㅋㅋㅋㅋ
- 찐따가 이탈리아 가본 것처럼 지껄이네... 이탈리아라고는 이태리 타올밖에 모르는 ㅂㅅ이 ㅋㅋㅋ
악플도 몇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귀여웠다’로 정리되는 분위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뭐해? 곧 집합인데. 얼른 가자.”
느려 터진 와이파이와 사투를 벌이며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있던 나를 문타리가 불렀다.
“오케이, 가보실까?”
나연 씨가 경기 본다고 했다.
맨유 녀석들 오늘 목 닦고 기다려라.
아, 물론 지승 선배는 빼고요.
* * *
“여기 오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지.”
올드 트래포드의 웅장한 외관을 바라보며 문타리가 중얼거렸다.
“동감이야.”
올드 트래포드나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같은 유서 깊은 경기장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서려 있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우리 홈구장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로 원정 오는 다른 팀들도 그런 기분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 네놈들! 절대 쉽게 이기진 못할 것이다!
경기장이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한국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선발 명단은 이미 공개가 된 상태.
나는 4-2-3-1 포메이션의 원톱.
지승 선배는 4-3-3 전형의 왼쪽 윙으로.
기대해 마지않던 ‘코리안 더비’가 성사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유럽축구 국내중계 역사상 최고 시청률은 떼어 놓은 당상이 아닐까 싶다.
다른 대회도 아니고 ‘챔피언스리그’이며 시시껄렁한 경기가 아닌 ‘준결승전’이니까.
이런 대결을 언제 또 보겠는가.
“자, 슬슬 컨디션 끌어올리자!”
워밍업을 지시하는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인테르의 레전드인 바레시 코치의 선수 시절 유럽대항전 우승 기록은 UEFA컵 1회가 전부.
동생인 프랑코 바레시가 최대 라이벌 밀란에서 뛰며 빅 이어를 3번이나 들어 올린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축구인의 인생은 길다.
현역 시절 못다 이룬 챔스 우승의 꿈을 지도자가 되어 성취해 낸다면 그것 또한 값진 일이겠지.
“쟤네도 나왔네.”
우리보다 한발 늦게 맨유 선수들도 나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여유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표정도 그렇고 몸놀림도 그렇고 가볍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긴, 3년 연속 4강에 지난 시즌에는 우승컵까지 거머쥐었으니.
팀의 주축 멤버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만도 하지.
음... 경험이라.
이건 변수가 될 수도 있겠다.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어, 백강아.”
잠시 짬을 내어 지승 선배에게 인사를 드렸다.
“오늘은 너무 큰 경기라 살살 하라고 못 하겠네. 하하, 피차 열심히 하자.”
“네, 선배님. 파이팅하죠.”
지승 선배에게도 오늘 경기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지난 시즌 챔스에서 눈에 띄는 활약으로 맨유의 결승 진출에 큰 공헌을 했던 지승 선배.
하지만 결승전에서는 ‘명단 제외’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나중에 주워들은 얘기로는, 본인 커리어보다 한국 팬들이 느꼈을 실망 때문에 크게 괴로워했다고.
올해 그 한을 제대로 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님.
저에게도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답니다.
* * *
Glory! glory, Man United---
As the reds go marching on! on! on!!!
맨유의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열띤 응원으로 기선제압에 나섰다.
자리는 당연히 만석.
이런 빅매치를 어찌 놓칠 수 있으리오.
암표상들만 노났지 뭐.
조별리그, 16강, 그리고 8강.
모두 긴장되는 경기들이었지만 확실히 4강은 느낌이 확 다르다.
내가 이 정도면...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역시는 역시였다.
앞에 서 있는 문타리가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힘내자, 타리 형.
웅장한 식전 행사가 끝나고 양 팀 선수들이 필드 위에 들어섰다.
보슬비가 짧게 내린 탓에 잔디가 적당히 젖었다.
축구 하기에는 이상적인 조건.
인테르 이적 후 간만에 보는 얼굴들과 한 명 한 명 악수를 나눴다.
리오 퍼디난드, 네마냐 비디치 센터백 콤비는 오늘도 어김없이 선발 출전.
내가 떠난 후로 꿀 많이 빨았지?
간만에 뚝배기 맛 좀 보여줄게.
“자! 기합 넣고 가자!”
사네티 주장이 전에 없이 힘찬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축구선수로 18년, 인테르의 일원으로 14년이라는 적잖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까지 그의 이력에는 ‘챔스 우승’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우승은커녕 결승 무대도 밟아본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노릇.
딱 한 번의 4강 경험이 있었지만, 하필이면 영혼의 라이벌 밀란에게 패하며 분루를 삼켰었다.
삑-------
휘슬이 길게 울리며 준결승 1차전이 그 성대한 막을 올렸다.
미리 연습해둔 패턴이 있었을까.
후방에서 공을 잡은 마이클 캐릭이 별 고민도 하지 않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쪽을 향해 대지를 가르는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호날두는 가슴 트래핑으로 공을 받아놓은 뒤 전진 드리블.
문타리가 즉시 달라붙었으나 아직 몸이 덜 풀린지라 동작이 영 빠릿하지 못했다.
가운데를 슬쩍 쳐다보며 눈으로 페이크를 준 호날두가 오른발로 공을 툭 치고 나가며 문타리를 손쉽게 따돌렸다.
퍼어억-----
“나이스 태클!”
오늘 확성기 모드 ‘On’인 사네티 주장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멋진 슬라이딩 태클로 호날두의 돌파를 저지한 주인공은 요새 슬슬 포텐을 만개하고 있는 다비데 산톤.
왼쪽 풀백 자리에는 막스웰이라는 만만찮은 경쟁자가 버티고 있었으나, 시즌 후반기로 치달을수록 산톤의 주전 출장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챔스 준결승에서도 무리뉴 감독의 선택을 받을 정도니 말 다했지 뭐.
1990년생인 발로텔리가 인테르의 공격진을 이끌어갈 차세대 유망주라면, 1991년생인 산톤은 수비에서 존재감을 발휘할 원석이었다.
거기에 아직 만 22세에 불과한 정백강까지 있으니, 우리 팀의 미래는 아주 창창했다.
“호날두! 호날두 철저히 잡아!”
우리 4백 라인의 지휘를 맡은 이반 코르도바 형님이 소리치는 사이,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한 맨유의 ‘만능 땜빵’ 존 오셰이가 스로인을 준비했다.
경계대상 1순위인 호날두는 산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밀착 마크 중.
호날두에게 볼 투입이 여의치 않자 대신 안데르손 쪽을 향해 공을 던져넣는 오셰이.
오른발등으로 공을 받으며 살짝 띄워 놓은 안데르손이 왼발 발리로 기습적인 크로스를 시도했다.
녀석, 잔재주 좀 부릴 줄 아는데?
“마이 볼!”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수비진을 향해 콜하며 공을 잡아내기 위해 뛰쳐나왔다.
그 순간.
삐빅--- 삑- 삑- 삑- 삑-
마시모 부사카 주심이 휘슬을 마구 불어대며 다급하게 골문 쪽으로 달려갔다.
“가... 가슴이... 으... 으...”
신음성을 흘리는 세자르 형님.
옆에는 웨인 루니가 함께 쓰러져 있었다.
크로스를 차단하려는 골키퍼와 머리를 갖다 대려는 스트라이커의 충돌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두 사람의 상태를 보아하니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신속히 의료진 투입.
상태는 안 좋아 보였지만 루니는 어찌어찌 제 발로 일어나긴 했다.
그러나 세자르 형님은 여전히 누워서 고통을 호소하는 중.
의료진은 벤치를 향해 교체 사인을 보냈다.
경기 시작 5분도 안 돼서 주전 골리의 부상 이탈이라니.
전혀 예상 못 한 시나리오였다.
급하게 장갑을 끼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프란체스코 톨도 형님.
이 형님도 이탈리아 국대 출신에 세리에 A를 대표하는 당당한 레전드이고 클래스 있는 골키퍼였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경기 감각이 심각하게 떨어져 있다는 것.
이번 시즌 통틀어서 출전한 경기가 고작 3게임에 불과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뒤로 한 채 경기 재개.
아까의 충돌 과정은 루니의 파울로 지적되어 우리에게 프리킥이 주어졌다.
“아이고야...”
우려가 현실로 확인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분명 나를 겨냥하고 찬 것 같은 톨도 형님의 장거리 킥은 멀리 뻗지 못하고 캐릭의 발 앞에 맥없이 떨어졌다.
차라리 짧게 수비진한테 연결해 주시지.
허무하게 공격권을 내주자 맥이 탁 풀렸다.
캐릭은 대런 플레처에게, 플레처는 다시 안데르손에게.
앞서 화려한 개인기와 날카로운 감각을 선보였던 안데르손이 직접 공을 몰고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좋은지 플레이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호날두 쪽이다!”
코르도바의 외침과 동시에 산톤을 따돌리며 페널티박스 안쪽으로 진격하는 호날두.
우리 수비진이 오른쪽 방향으로 확 쏠림과 동시에 안데르손의 전진 로빙 패스가 작렬했다.
공의 행선지는 호날두가 아닌 지승 선배.
호날두에게 어그로가 왕창 끌리면서 무주공산이 된 페널티박스 왼쪽 공간으로 지승 선배가 득달같이 달렸다.
타악----
첫 번째 트래핑이 약간 길었지만, 지승 선배가 슬라이딩 태클을 하듯 미끄러지며 끝까지 공에 발을 갖다 댔다.
톨도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골문 안쪽으로 굴러 들어가는 공.
그물에 닿기 전에 코르도바가 밖으로 걷어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주심과 부심 모두 의견 일치.
공이 명백히 골라인을 넘어갔다는 판정이었다.
이예예예예예------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함성 속에서 팬들 앞으로 달려간 지승 선배가 유니폼에 새겨진 엠블럼을 두드렸다.
간지라는 것이 폭발했다.
Ji--- Seung--- Park!!!!!
장내 아나운서와 수만 명의 팬들이 한목소리로 지승 선배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름 돋는 광경.
하... 선배... 멋있긴 한데...
하필이면 우리 팀 상댑니까.
말도 안 되는 프리킥으로 공을 헌납하고,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슈팅에 알까기를 당한 톨도 형님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챔스 결승 가는 길, 쉽지는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