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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40화 (41/176)

40화

와... 미쳤다...

나의 짧은 어휘력으로는 ‘미쳤다’는 표현보다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미쳤느냐.

박지승 선배의 활약이 미쳤다.

득점도 득점이지만 그보다 경기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방금 왼쪽 측면에서 크로스 올리던 사람이, 순식간에 풀백 자리까지 내려가 발로텔리의 드리블을 태클로 끊어낸다.

그리고 또 공격 가담해서 웨인 루니한테 스루패스를 날려대고는, 패스가 끊기자 곧바로 사네티 주장한테 붙어서 역습 전개를 저지한다.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활동량.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즐비한 잔디 위에서도 지승 선배의 움직임은 단연 돋보였다.

무릎도 안 좋으신 걸로 아는데...

이 경기에 대한 지승 선배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는, 이글거리는 눈빛만 보도 알 수 있다.

퍼거슨 영감, 작년엔 정말 잘못했어요.

이렇게 잘하는 선배를 벤치에도 못 앉게...

크흠, 지금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승 선배가 잘하는 만큼, 나도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내 마크맨은 네마냐 비디치.

훌륭한 선수임이 틀림없으나, 포츠머스에서 뛰던 시절부터 상대했을 때 좋은 기억도 많이 안겨준 선수였다.

“일단 머리에 붙여줘!”

비디치를 등진 나는 막 공을 잡은 즐라탄에게 외쳤다.

오늘처럼 즐라탄이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할 때면 자주 쓰는 로빙 패스-헤더슛 패턴을 사용하자는 신호.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수비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플레이 중 하나였다.

터엉-----

타이밍 좋고!

빙글 돌며 페널티박스 안으로 진입했다.

비디치는 공중 경합을 포기한 채 밑에서 낙하지점을 선점, 내가 제대로 점프하지 못하게 방해.

세르비아산(産) 특제 엉덩이로 슬쩍 미는데 워낙 힘이 좋은 선수라 휘청휘청한다.

AI가 심판을 본다면 파울이 불릴 법한 플레이.

그러나 인간이 불기에는 애매한 경계에 있다.

이런 더티 플레이는 ‘벽디치’의 큰 장점 중 하나.

맨유가 준비한 ‘대(對) 정백강 대처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야?”

형이 거기서 왜 나와?

어느새 공중에 날아오른 에드윈 반 데 사르 골키퍼가 여유 있게 공을 잡아냈다.

“이 녀석들이...”

예전에 나한테 두들겨 맞던 그 맨유가 아니란 말인가.

1차적으론 비디치가 버텨주고, 수문장 반 데 사르가 보다 공격적으로 페널티박스 전체를 커버한다는 발상.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또 머리 좀 굴렸네.

아무리 내 점프력이 출중해도 팔을 쓸 수 있는 골키퍼와의 단순 경합에서는 이기기 힘드니까.

거기다가 반 데 사르는 신장이 거의 2m 가까이 되는 장신 골키퍼니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수비법에는 약점도 분명 존재했다.

반 데 사르가 딱 한 번만 판단을 잘못하면 세상 허무한 실점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하시겠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날 막을 수 없을 테니 이해는 간다.

이번 시즌에도 포츠머스 시절만큼 많은 골을 집어넣고 있는 나지만, 수치와 별개로 한골 한골 넣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상대의 집중 견제도 그렇고, 파울도 어째 갈수록 안 불어주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느낌.

보다 팽팽한 경기를 위한 일종의 밸런스 패치라고나 할까?

이런 것도 슈퍼스타의 숙명이겠지.

이제 우리의 턴은 끝, 수비에 나설 차례다.

“캐릭한텐 제가 붙을게요!”

4-3-3 포메이션을 들고 나온 맨유의 역삼각형 3미들은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먼저 안데르손은 2선까지 적극적으로 올라가며 공격 지역으로의 전진과 공격수들에 대한 볼 공급을 담당, 일종의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했다.

그 옆의 대런 플레처는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을 살려 공수를 부지런히 오가는 전형적인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롤을 수행.

마지막으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위치하며 볼 순환의 중심 역할을 하는 선수가 바로 마이클 캐릭이었다.

캐릭의 선택에 따라 맨유의 공격 방식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디치랑 반 데 사르한테 뺨 맞았으니 캐릭한테 화풀이할 차례.

한 마리 모기처럼 캐릭의 주위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지승 선배만큼은 아니지만 내 체력도 꽤 훌륭한 편. 나를 따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캐릭아.

“마이클! 여기!”

캐릭과 함께 부비부비하며 뜨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아... 지승 선배...

언제 또 여기까지 내려오셨대?

캐릭이 ‘얼싸 좋구나’ 하며 지승 선배와 2대 1 패스를 주고받으며 내 압박을 손쉽게 벗겨냈다.

오늘의 지승 선배는 포지션 파괴자 그 자체.

경기장 어디로 눈을 돌려도 선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괴수 중 하나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재림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아무리 선배라도 저렇게 뛰면 힘들 텐데...

후반전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다.

퍼엉-----

캐릭의 낮고 빠른 스루패스가 오버래핑한 파트리스 에브라 쪽으로 날아갔다.

EPL 톱클래스 왼쪽 풀백인 에브라와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오른쪽 풀백 마이콘의 맞대결.

앞서 8강전에서는 필립 람을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었던 마이콘인데, 오늘은 과연 어떨지.

툭-----

또야?

에브라가 마이콘을 끌어들이며 생긴 공간으로 파고드는 검은 그림자.

지승 선배였다.

우리 4백이 오프사이드를 어필하며 일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지만, 에브라의 땅볼 패스에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좌측면을 완전히 허문 지승 선배가 골문 쪽을 쓱 보더니 오른발 크로스 시도.

그곳에는 맨유의 에이스 호날두가 서 있었다.

정점에서 내려찍은 헤더에 춤을 추는 골망.

톨도 형님이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했다.

완벽한 헤더골.

쿠와아아아아악!!!!!

이제 맨유 팬들은 거의 실성할 지경이었다.

경기 시작 후 고작 17분 만에 2골.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이탈할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치열한 접전을 예상했던 1차전이 일방적인 흐름을 타고 있었다.

* * *

삑--- 삑-----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전반전이 드디어 끝났다.

볼 점유율 49% 대 51%.

슈팅 수 4개 대 6개.

유효슈팅 수 2개 대 3개.

원정 경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맥없이 당하기만 한 경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는 골을 넣어야 하는 스포츠.

결국 의미가 있는 것은 0-2라는 스코어, 그것이 전부였다.

“질 수도 있다.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이니까.”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에 무리뉴 감독의 얼굴도 꽤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기력한 패배는 사절이다. 반드시 원정골을 넣고 밀라노로 돌아가자.”

어쩐지 움찔하게 되는 말이었다.

결국 팀의 원톱인 내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다른 포지션보다 많은 연봉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그리고 박지승은 확실하게 잡아라. 포인트는 ‘공간’이다. 박지승의 공간 이해도와 부지런함은 대단한 수준이야. 수비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해. 이반, 네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수비진의 라인 컨트롤을 담당하고 있는 이반 코르도바 형님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반전을 지배한 선수는 누가 뭐래도 지승 선배.

두 골에 모두 관여한 데다가, 헌신적인 움직임으로 수비에도 공헌하며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후반에는 나도...

“자, 우리가 어떤 팀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자.”

“네! 감독님!”

양 팀 모두 선수 교체는 없었다.

킥오프.

즐라탄이 발로텔리를 향해 공을 뿌렸다.

우리 팀 측면 공격의 핵심인 발로텔리-마이콘 라인이 오늘은 맨유의 박지승-에브라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측면이 좀 풀려야 내 머리도 빛을 발한단다.

잘 좀 해봐, 텔리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어제도 여자랑 놀았니?

전반에 그렇게 뛰었는데도, 지승 선배의 움직임에서는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승 선배를 상대로 직접 뭔가를 해보려던 발로텔리는 여의치 않을 것 같자 뒤쪽에 있던 마이콘에게 공을 돌렸다.

뻐엉-----

오오, 좋은 시야다.

역시 이콘이 형.

그래, 경기장을 좀 넓게 쓸 필요가 있어.

마이콘이 열어준 반대편 사이드에는 오늘 왼쪽 윙어로 출전한 문타리가 대기 중이었다.

에브라보다는 존 오셰이 쪽을 공략하는 게 낫지.

원래 윙으로 뛸 땐 드리블보다는 킥력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의 문타리였으나, 맨유 수비진은 크로스 기회는 절대 안 주는 방식으로 밀착 마크를 하고 있었다.

타리 형, 뭔가 보여주나?

“헤이!”

질풍 같은 스피드로 문타리의 곁을 스쳐 가는 꽃미남 한 명.

다비데 산톤이었다.

이건 120% 호날두의 잘못.

산톤에게 붙어서 마크를 해준 것도 아니고, 올라간다고 콜도 하지 않았다.

툭---

놓치지 않고 정확한 타이밍에 찔러주는 문타리의 스루패스.

퍼거슨 영감이 절대 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을 프리 크로스 찬스였다.

퍼엉---

훈련의 성과인가.

원래 오른발잡이인 산톤이지만, 왼쪽 풀백으로 기용될 때가 많다 보니 왼발 사용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했었다.

이 크로스가 그 결과물.

녀석, 진짜 파올로 말디니처럼 되어 가네.

약간 길었지만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정도였다.

퍼엉--- 까앙— 퉁- 찹-

“골! 골 아니에요?”

“노노, 라인 걸쳐서 떨어졌어요!”

“이건 무조건 골이죠!”

“아니라니까!”

찰나의 순간이었다.

비디치의 방해를 뚫고 날린 헤더슛은 크로스바를 맞고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땅에 한 번 튀긴 공은 반 데 사르의 손에 쏙 들어갔다.

공의 낙하지점이 어디였는지, 인간의 동체시력으로는 도저히 확인이 어려웠다.

양 팀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와 마시모 부사카 주심을 둘러쌌다.

심판으로서도 당혹스러운 상황이겠지.

그걸 어떻게 보냐.

“다들 잠깐만 기다려요!”

살벌한 근육질 덩치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부사카 주심이 부심들을 모두 소집했다.

오늘 경기가 어떤 경기던가.

챔피언스리그 4강전이다.

수없이 회자되며 역사에 길이 남을 판정이다.

신중한 것은 당연.

아... 이럴 때는 정말 VAR 마렵다...

앞으로 거의 10년은 더 있어야 도입될 텐데.

“어떤 것 같아?”

사네티 주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모르겠어요. 너무 순식간이라서.”

할 수 있는 건 기도뿐.

나 같은 무교인의 장점은 이럴 때 엄청나게 많은 신들에게 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옥황상제님.

제발 골을 내려주소서.

거의 5분 가까이 이어진 상의 끝에 판정이 내려졌다.

삑-----

휘슬과 함께 센터서클을 가리키는 부사카 주심.

골이었다.

“말도 안 돼!”

“그거 맞아요?”

격분한 맨유 선수들이 항의했지만 이미 내려진 판정을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외의 꿀잼 장면은 관중석에서 나왔는데, 아까는 홈팀 응원석에서 펄럭이던 태극기가, 이번에는 원정팀 응원석에서 그 자태를 뽐냈다.

어느 팀이 이기든, 진짜 최후의 승자는 직관 온 한국 팬들.

맨유 응원석에서도 태극기 흔들고 싶어 안달이 난 분들이 분명히 계실 거다.

물론 절대 안 됩니다.

곱게 못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그나저나 오늘 축구 커뮤니티들 대폭발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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