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맨유, 인테르 2:1로 꺾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 승리]
[유럽축구 지배한 한국인들... 박지승 1골 1도움, 정백강 1골]
[새벽을 밝힌 ‘코리안 데이’... 시청률도 대박, 6.7%로 역대 최고 기록 경신]
나의 만회골을 신호탄으로 후반전에는 우리 팀이 맨유를 압도했다.
그러나 유서 깊은 올드 트래포드는 딱 한 골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골포스트에 맞은 슈팅만 해도 5개.
골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공은 에드윈 반 데 사르가 모조리 잡거나 쳐냈다.
신들린 듯한 선방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늘을 원망하는 것뿐이었다.
챔스 조별리그 1위를 확정하고 주전 없이 펼쳤던 베르더 브레멘전 이후 무려 142일 만의 패배.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양 팀 감독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다.
먼저 무리뉴 감독이 마이크 앞에 앉았다.
-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패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때로는 이런 승부도 벌어지곤 한다. 축구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굳이 원인을 찾자면 집중력, 그리고 운이었다고 생각한다.”
- 박지승에게 호되게 당했다. 예상했나?
“솔직히 말하겠다. 전혀 생각 못 했다. 박지승은 훌륭한 선수지만, 맨유에서는 주로 수비적인 롤을 맡아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경기 시작 전에 그를 막는 데 대해서 따로 지시는 하지 않았었다. 그 결과는 뭐, 여러분도 봤을 거다. 후반전에는 박지승에게 공간을 주지 말라고 얘기했고, 효과가 있었다.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 녹아웃 스테이지 들어 첫 패배다. 2차전에서 후유증이 있을까?
“딱 하나만 말씀드리겠다. 밀라노에서는 전혀 다를 것이다.”
다음은 승장(勝將) 알렉스 퍼거슨 감독.
- 사실 인테르 쪽에 베팅한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뒀는데?
“내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강한 팀이 꼭 이기는 것은 아니라고.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 그리고 90분 동안 함성을 멈추지 않은 팬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 무리뉴 감독에게 했던 질문이지만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박지승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
“나는 박지승을 영입할 때부터 항상 그가 월드클래스라고 생각해 왔다. 정작 본인이 잘 모르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도 그의 수준에 맞는 좋은 플레이를 펼쳤고, 정말 환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 2차전은 어떻게 준비할 생각인가?
“정백강에게 원정골을 허용했기 때문에 마냥 유리하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인테르는 리그 우승을 거의 확정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사실상 승리에 따른 어드밴티지는 없다고 보고 경기 구상을 해야 할 것 같다.”
예상대로 한국의 축구 관련 커뮤니티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몇몇 사이트는 접속 시도와 게시물 수가 폭증하는 바람에 서버 마비 사태를 겪기도 했을 정도.
- 솔직히 오늘 국경일로 지정하자!!!
- 해축 인생 5년 동안 최고의 경기였다 ㅋㅋㅋㅋ
- 2002년 월드컵급 감동 ㅠㅠ
- 월드컵은 개오버 ㅋㅋㅋ 그땐 전 나라가 들썩였음 비교불가임
- 박지승>>>>> 정백강 ㅋㅋㅋㅋㅋㅋㅋ
- 챔스 득점 선두랑 수비 따까리 박지승이 비교됨? 맨유 팬들 수준 ㅉㅉ
- 정백강이 제일 존경하는 게 박지승인데 따까리라니 미쳤나 ㅋㅋㅋㅋ
- 그거 그냥 립서비스 아님??
- ㄴㄴ 맞음. 정백강이 최나연 볼 때랑 박지승 만날 때 표정이 똑같아 ㅋㅋㅋㅋ 레알 사랑함 ㅋㅋ
- 이 ㅂㅅ들은 오늘 같은 날에도 싸우냐 ㅡㅡ 답이 없다 진짜
- 그냥 닥치고 위아더월드나 외치셈~~~
온라인에선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지만, 알고 보면 다 멀쩡한 분들이겠지.
늘 열렬한 응원 감사합니다.
* * *
“오! 마이! 갓!”
시트콤 <프렌즈>의 재니스 같은 대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나연 씨의 전화라니.
먼저 연락이 온 건 처음이다.
자, 너무 경박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너 슈스 정백강이야.
자신감을 가져.
“네! 나연 씨!”
윽! 반가워하는 티를 너무 냈다.
“어머, 생각보다 목소리가 밝네요? 침울해 있을까 봐 전화했는데.”
이런 따뜻하고 사려 깊은 여자 같으니라고.
“아직 완전히 탈락한 건 아니니까요. 밀라노에서 뒤집으면 되죠.”
“자신감이 넘치는데요?”
“저희가 홈에서는 엄청나게 강하거든요. <하이, 풋볼>의 명 MC니까 잘 아시겠죠?”
“후후. 지금 놀리는 건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순도 100% 진심입니다. 서울은 지금... 저녁 7시 좀 넘었겠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지금 먹으려고요. 오늘 스케줄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이제 겨우 짬이 났어요.”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제때 챙겨야죠. 그러다가 몸 상해요.”
더러운 GBS 놈들.
아무리 나연 씨 능력이 출중해도 밥은 먹이면서 일을 시켜야지.
“명심하겠습니다, 백강 씨. 그럼 잘 추스르고 2차전 준비 열심히 해요. 아, 그전에 라치오전이 먼저네요? 어쨌든... 오늘 경기 정말 멋있었어요. 박지승 선수한텐 미안하지만, 2차전에서는 백강 씨 응원할게요. 파이팅하세요.”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끊고 다시 걸었어야지, 이 멍충아.
국제전환데.
나의 센스 없음이 좀 아쉽긴 하지만 나연 씨 응원을 들으니 없던 힘도 불끈 난다.
이렇게 먼저 연락까지 해왔다는 건 대단한 그린라이트.
어장관리가 아니고서야 관심 없는 남자한테 굳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빨리 결판을 내고 싶은데, 시즌 종료 때까지는 유럽에 묶여 있는 몸이라 답답하기만 하다.
나연 씨, 딱 한 달만 더 기다려주세요.
우승컵 세 개 품에 안고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 * *
2009년 5월 2일.
라치오와의 세리에 A 34라운드가 열리는 날.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는 경기 시작 전부터 묘한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앞서 리그 2위 유벤투스가 이미 강등이 확정된 레체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기 때문.
오늘 라치오를 상대로 우리가 승리를 거두면 남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리그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라치오는 강등권은 진즉에 탈출했고, 유럽대항전 진출도 이미 무산된 상태.
이기든 지든 큰 상관이 없는 경기였다.
전력이 더 강한 팀이 동기부여도 더 잘 되어 있는 데다가 홈이었으니...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전반전에만 3-0을 만들며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은 우리 팀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두 골을 더 넣으며 5-0 완승을 거뒀다.
리그 4연패와 통산 17번째 스쿠데토를 자축하는 멋진 승리였다.
경기 종료 후 무리뉴 감독 이하 전체 선수단이 필드를 한 바퀴 돌면서 팬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장 공손한 태도와 우렁찬 목청을 자랑한 건 사네티 형님.
역시 인테르의 ‘위대한 주장’다운 모범적인 모습이었다.
“우승이다아!!!”
귀여운 문타리는 넘치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폴짝폴짝 뛰며 소리를 질렀다.
문타리가 성인 무대에 2002년에 데뷔했으니 7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리그 우승.
신이 날 만도 했다.
“흥, 이런 게 뭐 대수라고. 당연한 우승이지.”
발로텔리의 목소리는 냉정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입은 웃고 있었다.
좋으면 그냥 좋다고 해, 텔리야.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어쩐지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 루이스 피구 형님에게 다가갔다.
은퇴 시즌에 차지한 우승컵이라, 얼마나 감회가 새로우실까?
“백강, 마침 잘 왔어.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은데 좀 불어줄래? 눈물이 계속 나네.”
“...”
짧은 비공식 세리머니가 끝난 뒤,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가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오늘 저녁은 구단주님이 사겠다고 하셨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참가하도록! 특히 마리오, 어디 도망갈 생각 하지 마라.”
노골적으로 지명된 발로텔리가 허를 찔렸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클럽 가서 노느니 우리끼리 회식하는 게 너한텐 더 건전하겠다.
* * *
“정말 행복한 날입니다. 마음껏 즐깁시다.”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의 짧은 건배사가 끝나고 모두가 잔을 맞부딪쳤다.
모라티 구단주는 이 자리를 위해 밀라노에서 손에 꼽히는 최고급 식당을 통째로 빌려 버렸다.
역시 석유재벌 클라스... 화끈하다.
“내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온 게 있지.”
옷차림과 잘 안 어울리는 구찌 손가방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드는 문타리.
“그게 뭐야?”
“백강은 뭔지 알 것 같은데. 한국에서 팬들이 보내준 선물 중 하나야.”
“초코파이?”
“아냐, 바로 이거!”
문타리가 부스럭거리며 선보인 물건은 바로...
“으잉? 완도 돌맛김?”
“발음이 어떻게 된다고?”
“완. 도. 돌. 맛. 김.”
“반. 두. 토. 마. 킴?”
내가 몇 번 경험해봐서 아는데, 이거 교정해 주려면 3시간 잡아야 한다.
“응, 잘했어. 발음이 거의 한국인이네. 근데 그건 왜 들고 온 거야?”
“왜라니? 이거 진짜 끝내주는 음식인데. 백강은 안 좋아해?”
“아니, 안 좋아하나 마나 그런 문제가 아냐. 그냥 너무 흔한 거라서...”
“이 천상의 음식이 흔하다니...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구나.”
문타리가 감탄하며 포장을 뜯었다.
“이봐 문타리, 그 빌어먹을 물건은 뭐야?”
옆에 앉아 있던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이 상냥한 말투로 관심을 표명했다.
“반두토마킴이라는 한국 음식이에요. 한 번 먹어보세요.”
“뭐가 뿌려져 있는데... 소금인가? 냄새는... 별로인 것 같은데.”
킁킁대던 마테라치 형님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김 한 장을 입에 넣었다.
“뭐야? 시발! 존나 맛있잖아? 이런 맛은 처음이야. 망할 바다가 느껴지는데?”
“그죠? 끝내주죠?”
“미친! 이거 어디서 났어?”
“한국 팬들이 페덱스로 보내준 거예요.”
“백강, 이 반도퇴뫄킘은 비싼 건가?”
그 동안 발음이 더욱 기묘해졌군.
“정확한 시세는 모르겠는데, 저런 묶음이면 한국에서 한 2~3유로 할 걸요?”
“시발 존나 말도 안 돼! 그렇게 싸다고?”
“한국에선 흔한 음식이에요.”
맛김에 이렇게까지 환장할 줄이야.
마테라치 형님이 하도 오버하는 통에 호기심이 동한 동료들이 한 장씩 맛보고는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차가운 발로텔리마저 동공이 흔들렸을 정도.
“이게 그렇게 맛있어요?”
신기한 마음에 물어보자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응, 진짜 끝내줘.”
“한국 음식 중 이게 최고인 것 같아.”
“문타리야, 선물 받는 비법 좀 알려주라.”
흐음... 그렇다면?
“자, 다들 주목해 보세요. 이걸 어떻게 먹는 건지 알려드릴게요.”
동료들이 존경과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골 넣었을 때나 좀 이렇게 해주지.
“한국식 밥이 없어서 좀 아쉽긴 한데, 아쉬운 대로 리소토로 해보죠. 좀 질어서 맛은 덜하겠지만. 자, 숟가락에 리소토 약간 올리고, 그 위에 김 한 장을 얹어서, 앙. 음, 괜찮네요.”
짝짝짝짝짝---
김과 리소토 조합을 맛본 친구들이 일제히 일어나 나를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모라티 구단주와 무리뉴 감독도 어리둥절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보았느냐, 이게 한국의 맛이다.
근데 기립박수는 좀 넣어둬... 민망하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