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42화 (43/176)

42화

“1차전 패배는 100% 나의 실책 때문이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대신 더 좋은 경기력으로 증명하겠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을 앞두고 가장 기합이 들어간 선수는 프란체스코 톨도 형님이었다.

아무리 경기 감각이 떨어져 있었다지만, 허용한 두 골 모두 ‘톨도’라는 이름값을 생각하면 막아줬어야 하는 실점.

1차전 시작과 동시에 웨인 루니와의 격한 충돌로 부상을 당했던 줄리우 세자르 형님은 갈비뼈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실상의 시즌 아웃 선언.

4백 라인과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춰 온 주전 골키퍼의 갑작스런 이탈은 심대한 타격이었다.

그래도 믿습니다, 톨도 형님.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잖습니까.

애니웨이.

오늘도 관중석 여기저기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인테르와 맨유의 2차전이기도 했지만, 정백강과 박지승 선배의 재대결이기도 한 경기.

과연 주모는 언제쯤 휴식할 수 있을 것인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1차전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포메이션, 그리고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반대로 무리뉴 감독은 이번 시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전술을 파격적으로 시도했다.

따로 윙어를 두지 않는 4-3-1-2 전형이 그것.

무(無) 윙어 전술의 대가인 밀란의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종종 사용하는 전술이었다.

이 포메이션은 중앙에 힘을 빡 준 만큼 미드필드 지역 장악에는 용이했지만, 측면에서는 다소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측면을 책임져야 하는 마이콘과 다비데 산톤의 어깨가 다소 무거워지는 부분.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이런 선택을 한 무리뉴 감독의 배짱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물론 결과가 나쁘다면 그저 철없는 만용이 될 뿐이겠지만 말이다.

우와아아아아아---

네라주리의 승리를 염원하는 함성 속에서 맨유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1차전과 마찬가지로 첫 공격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맡겨보는 마이클 캐릭.

지난 경기에서 지승 선배의 등기 크로스 덕분에 헤더골을 하나 넣긴 했지만, 호날두의 전반적인 퍼포먼스는 기대치에 비해 아쉬운 편이었다.

EPL 최고 윙어가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꼬꼬마 산톤에게 틀어막혔으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원래 자존심 빼면 시체인 녀석이 바로 호날두 아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산톤에게 일대일을 걸어갔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눈이 어지러워지는 현란한 헛다리와 발바닥 드리블.

그러나 산톤이 섣부르게 발을 뻗어주지 않아서 크게 실속은 없었다.

진짜 포인트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치달.

호날두의 돌파는 기술보다는 주력과 순간적인 민첩성에 기대는 부분이 더 컸다.

툭---

열심히 간을 보던 호날두가 오른발로 크로스할 것처럼 페이크를 준 뒤 왼발로 공을 옮겨 중앙으로 짓쳐들어갔다.

하지만 페이크에 반응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며 견제하는 산톤.

호날두가 결국 등쌀에 못 이겨 공을 뒤쪽에 있는 존 오셰이에게로 돌렸다.

산톤의 아주 좋은 수비가 나왔다.

의욕적으로 올라온 오셰이의 크로스는 그대로 골라인을 벗어났다.

“좋아, 좋아! 상대도 바짝 얼었어!”

부리나케 공을 주워 온 톨도 형님이 손뼉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본인의 긴장을 풀려는 의도가 더 커 보이는군요, 형님.

아무래도 얼른 골을 넣어서 우리 형님을 편하게 만들어 드려야겠다.

뻐엉---

이를 악물고 찬 톨도 형님의 골킥이 이번엔 내 머리를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골킥 실수의 트라우마는 벗어버리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더 붙어 있으면 정들 것 같은 네마냐 비디치 녀석은 오늘도 같이 뛰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

내가 머리로 떨궈준 공은 오늘 공미로 출전한 데얀 스탄코비치의 발 앞에 예쁘게 떨어졌다.

후속 동작을 막기 위해 바로 압박 들어가는 대런 플레처.

스탄코비치는 서두르지 않고 문타리에게 패스.

문타리는 다시 캄비아소에게로.

수적 우위를 앞세워 중원에서 볼 점유율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퍼거슨 감독이 지적했던 원정골의 위력이 바로 이런 것.

실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딱 한 골만 넣으면 결승 진출이었다.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시간은 길었고 급하게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맨유의 3톱 중에서 지승 선배와 루니는 거의 중앙선 부근까지 내려와서 수비에 가담했고, 호날두 혼자만 최전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 이거 표절 아닌가?

즐라탄과 내가 하던 공-수 포지션 체인지와 똑같은 전술이다.

“백강!”

볼 돌리기에 매진하던 캄비아소가 기습적으로 장거리 로빙 패스를 시도했다.

예상되는 낙하지점은 페널티 라인보다 약간 앞쪽이었다.

지금쯤 경기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쿠아아앙-----

이번에는 동료에게 떨궈주는 대신에 직접 슈팅을 택했다.

지구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헤더 중거리슛’.

목표지는 골문 왼쪽 상단.

내 생각보다도 코스가 상당히 날카로웠다.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에드윈 반 데 사르 골키퍼가 화들짝 놀라며 손끝으로 공을 걷어냈다.

아오, 아깝다.

망할 사르... 정말 눈엣가시라니까.

아아-------

골을 예감했던 팬들이 아쉬운 마음에 격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코너킥 찬스.

후방에는 톨도 형님과 마이콘, 산톤만 남겨둔 채 전 인원이 다 공격에 가담했다.

큰 경기일수록 오히려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우당탕탕 골’이 승부를 결정짓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오는 법.

내게는 비디치와 루니가 붙었다.

둘씩 붙는 건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 너무 밀착하지만 말아줬으면 좋겠다.

가운데 껴서 압사당할 것 같다.

루니 얘는 키도 작은 애가 힘이 뭐 이리 장사야?

이러니까 우리 불쌍한 세자르 형님 갈비뼈가 부러졌지.

무자비한 녀석 같으니라고...

키커는 문타리.

오른손을 한 번 들어 신호를 하고는 그대로 왼발 킥을 날렸다.

뻐엉---

가까운 포스트 쪽을 겨냥한 낮고 빠른 코너킥.

훈련 때 여러 번 맞춰봤던 패턴이었다.

이 코너킥의 행선지는 크리스티안 키부.

유니폼을 붙잡고 늘어지는 캐릭을 따돌리며 좋은 자리를 선점한 키부가 기술적인 헤더로 공의 방향만 살짝 돌려놓았다.

아주 좋은 슈팅이었으나 하필이면 그 코스에 파트리스 에브라가 딱 지키고 서 있었다.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후 걷어내는 에브라.

그런데 급하게 차다 보니 공이 그리 멀리 뻗지 못했다.

“다 비켜!”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중거리 찬스를 보고 있던 스탄코비치가 이 어설픈 볼 처리를 목격하곤 득의의 미소를 흘리며 달려들었다.

공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그대로 오른발 하프발리슛.

파앙-----

발등에 제대로 얹힌 슈팅이었으나 아쉽게도 골키퍼 정면이었다.

그러나 슈팅이 워낙 강하다 보니 반 데 사르도 미처 잡아내진 못하고 펀칭.

공이 높게 떠올랐다.

“마이 볼!”

이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은 즐라탄.

그대로 날아올라 몸을 한 마리 새우처럼 접으며 환상적인 시저스 킥을 날렸다.

타이밍 이즈 나우!

연이어 골문을 위협하는 살벌한 슈팅 세례에 나에 대한 마크가 허술해진 틈을 타 무작정 골대 앞으로 달려갔다.

한국의 유명 야구선수 양모씨는 내야 땅볼에도 1루까지 전력 질주를 한다지.

비록 종목은 다르지만 참 배울 만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래, 일단 달리고 보는 거다.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빨리 걷어내!”

정말 말도 안 되는 반사신경.

이번에는 왼발을 쭉 뻗어 즐라탄의 슈팅까지 막아낸 반 데 사르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인이 없는 공을 향해 동시에 달려드는 나와 리오 퍼디난드.

간발의 차로 내가 더 빨랐다.

퍼어엉----------

내 이마에 새겨지는 기분 좋은 공의 감촉.

혼신의 힘을 다한 다이빙 헤더슛이 퍼디난드의 축구화 끝을 스치듯 지나가며 그물을 흔들었다.

전반 28분 만에 터진 선제골.

백!!!!! 강!!!!! 정!!!!!!!!!!

수만명의 관중들과 장내 아나운서가 한목소리가 되어 나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거지, 이게 나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진 선방을 연이어 하고도 실점을 허용한 반 데 사르는 망연자실해서 하늘만 바라볼 뿐.

기술보다는 집념이 만들어낸 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 거기서도 머리부터 들이미냐.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문타리가 싱글벙글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좋은 지적이다.

발로도 충분히 넣을 수 있는 장면이긴 했다.

이젠 머리 없이 축구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린 것일까.

“잘했다, 정말 잘했어. 백강.”

사네티 주장이 내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었다.

감정 주체가 잘 안 되는 모양.

흥분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장! 우리 결승 가요. 챔피언스리그 결승!”

“그래, 가보자. 임마!”

* * *

이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골을 넣지 못하면 맨유의 챔스 여정은 여기서 끝.

킥오프를 준비하는 루니와 호날두의 표정이 완전히 썩어 있었다.

우리 감독님이 말씀하셨었지.

밀라노에선 전혀 다를 거라고.

맛이 어떠냐, 이놈들아.

“자! 다들 집중하자!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톨도 형님이 동료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옳으신 말씀.

디펜딩 챔피언의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즐라탄, 내가 내려갈게! 역습 기회 봐줘!”

내가 수비에 가담하면서 우리 팀의 전형은 자연스럽게 4-5-1로 바뀌었다.

문타리와 사네티 주장이 좌우 측면 수비에 힘을 실어주고, 중앙은 나와 스탄코비치, 캄비아소가 함께 커버.

내 동료들이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미드필더진의 활동량과 수비력만큼은 전 유럽에서 우리를 따라올 팀이 별로 없었다.

리그에서 35경기 동안 단 14골만 실점한 경악스러운 수비력의 원천.

지승 선배와 안데르손은 1차전과 같은 컨디션을 보여주지 못했고, 호날두 역시 산톤을 상대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맨유에서 뭔가를 기대해볼 수 있는 선수는...

까앙------

루니의 벼락같은 중거리포가 오른쪽 골포스트를 강타했다.

세컨드 찬스를 주지 않기 위해 황급히 달려와 공을 멀리 걷어내는 키부.

와... 간 떨어질 뻔했네.

1차전 때는 세자르 형님과의 충돌 여파 때문인지 무기력했었는데, 방금 슈팅만 보면 우리가 알던 그 루니의 모습이었다.

계속되는 맨유의 공격.

이번에도 루니가 공을 잡았다.

“내가 막을게!”

앞서 공간을 너무 많이 허용해 실점 위기를 자초했던 캄비아소가 이번에는 아주 바짝 붙었다.

그러자 직접 돌파를 감행하는 루니.

분명 캄비아소가 어깨를 먼저 넣었으나 힘에서 밀려 버렸다.

루니가 얼마나 장사인지는, 붙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르리라.

“뒤쪽 조심해! 호날두다!”

사네티 주장의 절규와 거의 동시에 루니가 우리 수비진의 빈틈을 찌르며 절묘한 땅볼 스루패스를 전달했다.

산톤한테 관광 당하며 기회만 엿보던 호날두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대위기.

하지만 톨도 형님이 과감하게 몸을 날려 공을 먼저 덮쳤다.

아주 좋은 판단.

0. 5초만 반응이 늦었어도 이미 동점이 됐을 것이다.

이게 바로 노익장인가?

“파울! 파울 아니에요?”

공에 발도 못 대보고 필드 위를 데굴데굴 굴러 온몸이 잔디 투성이가 된 호날두가 특유의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페널티킥을 어필했다.

어유, 꼴 보기 싫어.

10년 뒤에 벌어질 ‘그 사건’을 미리 경험하고 온 나는, 호날두가 뭘 해도 밉상이다.

클라우스 보 라센 주심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얼른 일어날 것을 지시했다.

나이스 심판.

갑작스런 루니의 각성으로 인해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우리 수비진은 결국 무실점으로 전반전을 마쳤다.

바르셀로나 놈들, 딱 기다려라.

우리가 박살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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