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43화 (44/176)

43화

대체 하프타임 동안 라커룸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온 것일까.

맨유 녀석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거의 살의마저 느껴지는 섬뜩한 표정.

잘못 건드렸다간 한 대 맞을 것 같다.

알렉스 퍼거슨 영감님, ‘헤어드라이어’도 적당히 좀 하시지.

이거 어디 무서워서 축구 하겠어요?

“다들 전반전처럼만 하자!”

생애 첫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앞둔 사네티 주장이 킥오프에 앞서 들뜬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좋은 생각입니다, 주장.

전반전처럼 한 골 더 넣어보도록 하죠.

일단 양 팀 모두 선수 교체는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맨유 양쪽 풀백의 오버래핑 빈도가 높아졌다는 것.

파트리스 에브라는 물론 평소 수비적 성향이 강한 존 오셰이조차도 거의 하프라인 부근까지 올라와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결국 수적 우위가 있는 측면에서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맨유 입장에선 힘든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패스해!”

다비데 산톤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중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다시 공을 요구했다.

그 정도 당했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도전 정신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쪽으로 오지 말고 가운데 공간 잡아주세요!”

호날두를 상대하는 산톤의 자신감은 대단하다.

도움 수비 따위는 필요 없다는 선언.

원래 호날두의 천적으로는 첼시의 왼쪽 풀백인 애슐리 콜 정도가 꼽혔는데, 오늘 경기 이후로 산톤의 이름을 추가해도 될 듯하다.

기본적인 주력과 민첩성에서 밀리지 않다 보니, 영 고전을 면치 못하는 호날두였다.

돌파가 여의치 않자 루니의 발을 겨냥하고 낮은 크로스를 날렸으나, 산톤이 끝까지 들러붙으며 끊어냈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얻어낸 코너킥 찬스.

마음 급한 맨유는 반 데 사르 골키퍼와 에브라를 뺀 모든 선수가 공격에 가담했다.

우리 역시 즐라탄만 최전방에 남겨둔 채 전부 수비하러 내려왔다.

키커는 오늘 실망스러운 모습을 연거푸 보여주었던 안데르손.

과연 이번 기회를 통해 반전 드라마를 쓸 수 있을지...

긴장되는 순간.

높게 띄워 찬 안데르손의 왼발 킥이 바람을 가르며 리오 퍼디난드의 머리카락을 살짝 스쳤다.

의도했던 세트피스보다 조금 높게 영점이 잡힌 모양새.

갈 곳을 잃은 공은 나의 레이더망에 딱 걸렸다.

“마이 볼!”

뻐어엉-----

이마에 공을 맞추는 순간 나의 눈은 이미 즐라탄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달려! 역습 가자!”

한 골을 더 넣으면 맨유 녀석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릴 수 있다.

너희가 그렇게 역습을 잘한다지?

근데 우리도 만만치 않을걸?

174cm의 에브라와 195cm의 즐라탄의 공중볼 다툼은 해보나 마나.

힘에서 에브라를 완전히 제압한 즐라탄이 살짝 점프해서 가슴으로 트래핑.

떨어지는 공을 오른발등으로 툭 쳐서 에브라의 키를 넘겨 버렸다.

우오오오오-----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의 관중들을 열광시키는 멋진 솜브레로 플릭(Sombrero Flick).

완전히 허를 찔리며 개망신을 당한 에브라가 즐라탄을 잡기 위해 쫓아갔으나, 가속도가 붙은 즐라탄과 부딪치며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20여kg에 달하는 두 선수의 체중 차이를 생각하면 거의 덤프트럭에 충돌해 날아가는 기분이었으리라.

삽시간에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

반 데 사르가 미친 듯이 뛰쳐나왔다.

이런 상황에서의 원더골은 즐라탄의 전문 분야.

톡---

즐라탄이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멈추더니 공의 밑동을 툭 차서 골키퍼 키를 넘기는 로빙슛을 시도했다.

이건 골이다 싶은 순간.

“안돼!”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골문으로 달려간 에브라가 공이 골라인을 넘기 직전에 시저스킥으로 걷어냈다.

본인의 수비 실패를 훌륭히 만회하는 100점짜리 수비.

그러나...

차낸 공은 야속하게도 뒤늦게 공격에 합류한 나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수문장 반 데 사르는 아직 원위치 복귀 전.

에브라는 넘어져 있는 상태.

거리는... 대략 30m쯤 될까?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날아가 골문 정중앙을 꿰뚫는 통쾌한 헤더슛.

Grande--- Testa!!!!!

Grande--- Testa!!!!!

경이적인 초장거리 헤더골에 미쳐 날뛰는 홈 관중들.

후반 25분.

나의 이번 시즌 챔스 15호 골.

1962-1963 시즌 숙적 밀란의 호세 알타피니가 기록한 14골을 경신하며 챔스 한 시즌 최다골 득점자로 이름을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무려 46년 만에 새로 쓰여진 대기록.

인테르가 자랑하는 ‘위대한 머리’가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 * *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퍼거슨 감독이 실점 이후 곧바로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개똥 같은 크로스로 공격의 맥을 끊기 일쑤였던 오셰이와 1차전 맹활약이 뽀록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한 안데르손을 벤치로 불러들였다.

대신 8강전 포르투 격파의 선봉장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 백전노장 폴 스콜스를 투입하며 반전을 꾀했다.

상대가 공격수를 한 명 더 투입함에 따라, 무리뉴 감독도 즐라탄을 빼고 수비수인 왈테르 사무엘을 배치했는데...

“뭐야, 나? 내가 교체라고? 젠장!”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교체 사인을 받은 즐라탄의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뭐 씹은 듯한 얼굴로 터덜터덜 필드 위를 빠져가는 즐라탄.

챔스 토너먼트 들어 페널티킥으로 한 골 넣은 게 전부였으니.

명색이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로서 속이 상할 만도 하지.

오늘도 두 번째 골은 자신이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놓치고 말았으니 그 안타까움은 더욱 크리라.

그래도 너무 기죽지 마, 라탄이 형.

이러다 결승에서 골 넣으면 또 영웅 되는 거야.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

맨유는 이제 이판사판 공사판.

0-2로 지나 0-5로 지나 탈락인 건 매한가지니 오직 공격, 또 공격이었다.

“백강! 페널티박스까지 내려가!”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듦에 따라, 맨유는 일단 롱패스로 붙여놓고 세컨드 찬스를 노리는 단조로운 공격 패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빌드업 한답시고 공 돌려봐야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는 꼴이니 당연한 선택.

이에 대한 무리뉴 감독의 대응은 나를 수비수로 기용하여 공중볼 싸움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비디치나 퍼디난드까지 우리 골문 앞에 진을 치며 노골적으로 개싸움을 노렸지만, 내가 가세한 우리 수비진의 높이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추가시간 4분이다! 마지막까지 집중하자!”

1차전 역캐리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버린 채 훌륭한 선방으로 골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프란체스코 톨도 형님이 끝까지 독려를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4분 후면 결승행 확정!

접전 끝에 원정 다득점 규칙에 의해 첼시를 누르고 먼저 올라간 바르셀로나와 유럽 최강팀 자리를 다투게 된다.

지승 선배가 마이콘을 상대로 얻어낸 진짜 마지막 코너킥 기회.

결국 반 데 사르까지 올라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미어터지는 페널티박스.

“자기 마크 확실히 잡아! 이거 막으면 끝이야!”

마이클 캐릭이 팀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졌다.

깊게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그대로 킥.

“퍼디난드 쪽이야!”

아까 안데르손이 시도했다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플레이와 똑같은 세트피스였다.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캐릭의 킥이 보다 정교하다는 것.

파앙---

바깥에서부터 골 에어리어로 쇄도해 온 퍼디난드가 절묘하게 잘라먹은 회심의 헤더슛.

톨도 형님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손을 뻗으며 야신 사각지대를 노린 공을 겨우 쳐냈다.

뒤따라 들어온 사무엘이 공을 걷어내려 뻥 찼으나 호날두의 더러운 발끝에 스치면서 속도가 많이 죽었다.

멀리 가지 못한 공은 가장 위험한 인물에게 전달되었다.

페널티박스 바로 앞쪽에서 루즈볼을 노리며 대기하고 있던 스콜스.

뻐어어어엉-------

방금 환상적인 선방을 선보인 톨도 형님이 어느새 벌떡 일어나 공의 방향을 잡고 먼저 몸을 날렸지만...

툭---

호쾌하게 날아가던 공이 그냥 서 있던 비디치의 엉덩이에 맞고 엉뚱한 궤적을 그리며 텅 빈 골문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게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가장 극적인 순간, 가장 황당한 방식으로 허용한 실점이었다.

우리 수비진이 황망한 표정으로 일제히 부심 쪽을 바라보았지만 깃발은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크와아아아악!!!”

득점을 확인한 스콜스가 괴성을 지르며 맨유 벤치 쪽을 향해 미친 듯 질주했다.

추가시간의 추가시간에 터진 동점골.

농구로 치면 버저비터.

야구로 치면 9회 말 투아웃 상황 적시타.

챔스 결승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나 험난하단 말인가.

하... 인생...

* * *

99.999% 손아귀에 붙잡았던 승리를 허무하게 놓쳐 버린 우리 팀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용궁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한 맨유는 방심 없는 타이트한 수비로 우리의 예봉을 꺾었다.

결국 연장전은 별다른 위협적인 장면 없이 다소 지루하게 마무리되었다.

무리뉴 감독은 경기 종료 직전 산톤을 빼고 발로텔리를 투입하며 겸허히 승부차기를 준비했다.

삑--- 삑--- 삑-----

어쩐지 야속하게 들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최후의 결전에 돌입하는 인테르와 맨유.

“양 팀 주장, 모이세요.”

연장전까지 초과근무(?) 뛰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클라우스 보 라센 주심이 사네티 주장과 퍼디난드를 호출했다.

많은 것이 걸린 동전 던지기 결과는?

애석하게도 퍼디난드의 승리였다.

“먼저 차겠습니다.”

승부차기에서 선축 팀이 유리하다는 건 상식.

상당히 기분 나쁜 출발이다.

센터 서클에 양 팀 선수들이 일렬로 모여 섰다.

과연 어느 쪽의 심장이 더 클 것인가.

맨유의 1번 키커는 베르바토프.

“아아, 너무 아깝다...”

문타리가 이마를 탁 치며 한탄했다.

과감하게 가운데를 공략한 베르바토프의 슈팅이 왼쪽으로 몸을 날린 톨도 형님의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성공.

조금만 낮거나 높았으면 실축이었는데... 까비.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는 가운데 등장한 발로텔리가 페널티 스폿에 공을 내려놓았다.

“저건 안 봐도 골이지 뭐.”

심드렁하게 내뱉은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예언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다른 건 몰라도 페널티킥 능력만큼은 팀 내에서 압도적 1등인 발로텔리.

도무지 긴장할 줄 모르는 대담성과 유려한 킥 스킬 덕분에,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킥 실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었다.

톨도 형님, 이제 하나만 막아주... 쳇.

1, 2차전 내내 캐릭에게는 인간미가 없다.

이런 알파고 같은 녀석...

현재 상황은 인테르 1-2 맨유.

“냅다 꽂아버려요! 주장!”

우리의 2번 타자는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사네티 형님.

네라주리의 혼(魂)이자 위대한 주장.

축구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결점이 없는...

아아...

“이예에에에!!!”

포효하는 반 데 사르.

왼쪽 아래를 노리고 찬 사네티 주장의 슈팅은 너무 가운데로 쏠렸고, 반 데 사르는 거의 제자리에서 팔을 슉 뻗어 공을 쳐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필이면 주장이...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유리한 고지에 오른 맨유의 다음 키커는 호날두.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더럽게 잘 차네 진짜.

시리즈 내내 삽질하던 호날두라 살짝 기대했으나, 코스나 세기 모두 완벽한 슈팅이 골문 우측 상단을 꿰뚫었다.

이제 1-3, 다음 기회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백강! 침착하게 차, 침착하게!”

등 뒤로 깜찍한 문타리의 응원을 받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킥력은 전혀 특출나지 않았으나, 무리뉴 감독은 나의 침착함과 대범함을 높게 평가하고는 승부차기의 중책을 맡겼다.

어우, 반 데 사르가 이렇게 컸었나?

197cm이 아니라 무슨 297cm처럼 보인다.

머리를 쓸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군.

간다!

뻐엉---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인사이드로 밀어 찬 공이 골문을 향해 무심히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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