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44화 (45/176)

44화

후우... 후우...

십 년 감수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의 선택은 정 가운데.

괜히 되도 안 되게 구석을 노렸다가 빗나갈까 봐 중앙을 노렸는데 이게 먹혔다.

의욕적으로 몸을 날렸던 반 데 사르 골키퍼는 괜히 헛심만 쓴 꼴이 되었다.

에드윈 아저씨,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네요.

“잘했어! 백강!”

키커로서의 임무를 100% 완수하고 돌아온 나를 문타리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제 스코어는 2-3.

아직까지 희망은 있다.

맨유의 네 번째 키커는... 박지승 선배.

선배,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죄송한데 실축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이 못난 후배를 위해 제발... 아...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땅볼슛을 성공시킨 선배가 가볍게 주먹을 쥐며 센터 서클로 돌아왔다.

하긴, 월드컵에서 승부차기 성공 경험도 있는 선배가 놓칠 리 만무하다.

이제 승부는 아주 단순해졌다.

일단 무조건 넣고, 그 다음엔 무조건 막아야 한다.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

엄청난 부담감을 등에 지고 나서는 마이콘.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 때문에 숨도 쉬기 힘들 막중한 상황.

그러나 떡 벌어진 어깨와 그 밑에 새겨진 ‘MAICON’이란 이니셜이 알 수 없는 믿음을 주었다.

뻐엉-----

“좋았어!”

약간 새가슴 기질이 있어서 승부차기 순번에는 밀린 문타리지만 응원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했다.

역시는 역시고 마이콘은 마이콘.

완벽하게 반 데 사르를 속이며 침착하게 골문 오른쪽 구석을 공략했다.

그리고 등장하는 맨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키커.

네마냐 비디치의 엉덩이와 함께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한 명인 폴 스콜스였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올해는 좀 쉬시죠.

눈치도 없이 거기서 버저비터를 넣으시면 어떡합니까.

자비 좀...

벤치 쪽을 슬쩍 보니 언제부턴가 무릎을 꿇고 있는 무리뉴 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겠지.

이윽고 스콜스의 도움닫기가 시작되었다.

* * *

축제는 끝났다.

인테르의 챔피언스리그 우승 도전 여정은 딱 4강까지였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아직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홈 관중들은 깊은 침묵에 휩싸인 채 멍하니 필드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허망함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으랴.

우리는 정말정말 강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다.

하지만 빅 이어의 꿈은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축한 사람이 하필이면 사네티 주장이라는 게 가혹할 정도의 아이러니.

그를 비난할 수 있는 네라주리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깨 펴라! 다들 고생 많았다. 정말 잘해주었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여기까지 온 건 너희들의 공이다. 지금 무릎 꿇은 건 온전히 나의 잘못이다.”

무리뉴 감독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켰다.

“크흑... 끅... 끅...”

감정이 복받친 사네티 주장이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고,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가 다가가 아무 말 없이 주장을 꼭 안아 주었다.

인테르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레전드의 포옹은 지켜보기 너무나도 힘든 장면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문타리도 금방 전염되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런 시발... 정말 좆같은 기분이군...”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거친 욕설을 뱉어댔지만, 눈물을 참으려는 게 얼굴에 다 씌어 있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이런 게 축구 아니겠니.”

은퇴 시즌.

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웠던 루이스 피구 형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후배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가 정말 졌구나.

이번 시즌 처음으로 맛보는 기분.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졌다는 말이지.

유럽 최고의 팀 32개가 경합하는 무대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들었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업적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패배의 아픔을 경감시켜주는 건 또 아니었다.

그리고 미디어의 집중 포격이 시작되는 데는 채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 *

[맨유, 승부차기 끝에 인테르 꺾고 2년 연속 챔스 결승 진출]

[결국 올해도 똑같았다... 인테르의 실패한 시즌]

[‘챔스 우승 실패’ 주제 무리뉴 경질설 ‘솔솔’]

[‘충격’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 후임 감독 물색 들어가]

불과 3일 전만 해도 리그 우승을 조기 확정짓고 찬양받던 인테르와 무리뉴 감독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2008-2009 시즌은 ‘실패한 시즌’이 되었고, 명장 무리뉴는 경질 대상이 되었다.

아무리 장사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상황.

챔스 탈락과 그 이후에 불거진 경질설을 두고 한국 팬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 정백강 졸라 억울할 듯 ㅋㅋ 2경기 3골 박고 탈락 ㅋㅋㅋㅋㅋ

- 그냥 쩡백 그릇이 그 정도인 거임 ㅇㅇ

- 그릇 같은 소리 하네 ㅂㅅ이 ㅋㅋㅋ 스트라이커가 경기당 1.5골 넣었으면 할 거 다 한 거지 뭘 더 바람?? 쿨병 종자 개시름 ㅡㅡ

- 닥치고 무링요 잘라야 되냐 남겨야 되냐?

- 잘라야지, 만치니도 리그랑 코파는 먹었었음

- 지랄하네 경질은 말도 안됨. 겨우 한 시즌 기회 주고 자르면 후임으로 누가 오겠냐? ㅋㅋㅋ

- 그거 맞다. 그리고 만치니랑 비교하면 안 되는 게 걔는 챔스 성적 8-8-16-16임. 레알 리그 깡패 챔스 병신이었음 ㅋㅋㅋㅋ 4강도 대단한 거지

- 4강이든 8강이든 16강이든 우승 못했으면 똑같은 거 아님?

- 뭐래 ㅋㅋㅋ 그럼 2002 월드컵 4강도 우승 못했으니까 무시당해야 함? 말이 처 되는 소리를 하세요 ㅋㅋㅋㅋㅋ

- 그냥 정백강 이적하자! 맨유로 오자! 맨유가 오라면 와야지!

- 아 진짜 맨유팬들 극혐이네 ㅡㅡ 그러지 말고 그냥 바르샤로 오자!

- 염병들을 하네 ㅋㅋㅋ 근데 현실 가능성은 없는데 이적하면 몸값 얼마 나올지 궁금하긴 함 ㅋㅋㅋ 1000억 가능?

- 아무리 정백강이라도 1000억은 무리지 ㅋㅋㅋㅋ

한국에서 이 정도였으니 현지에서는 어땠겠는가?

난리도 이런 생난리가 없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추측성 보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 보도에 대한 보도까지 더해 소문은 점점 증폭되어만 갔다.

이 거지 같은 사태의 여파는 이후 열린 리그 경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리그 17위인 키에보를 홈에서 맞아 충격적인 0-1 패배.

이미 우승을 확정했기 때문에 동기부여 문제도 있었고 1.5~2군 멤버들로 라인업을 구성하긴 했지만, 무승부도 아닌 패배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이로써 무패우승의 꿈도 물거품.

엎친 데 덮치고 거기에 메치기까지 당한 꼴이 되었다.

팀 분위기는 당연히 최악.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을 앞두고 라치오의 델리오 로시 감독은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골리앗이 늙고 지치고 병든 상태라면 어떨까? 우리는 돌팔매 한 방으로 골리앗을 쓰러트릴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 아주 재밌는 경기가 될 것이다.”

물론 무리뉴 감독이 언론 플레이에서 밀릴 리는 없었다.

“로시 감독의 인터뷰를 봤다. 라치오가 다윗이고, 인테르가 골리앗이라고 표현했던데,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성경 속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치오는 절대, 절대로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 * *

2009년 5월 13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 위치한 유서 깊은 경기장 스타디오 올림피코.

이번 시즌 코파 이탈리아의 피날레가 이곳에서 곧 장식될 예정이었다.

결승에 오기 위해 우리는 제노아, 로마, 그리고 삼프도리아를 물리쳤고 라치오는 밀란, 토리노, 유벤투스를 만났다.

대진운만 따지면 라치오가 더 빡세긴 했다.

어쨌든 라치오 덕분에(?) 세리에의 대표적인 명문 구단인 밀란과 유벤투스는 무관 확정.

만약 세리에 챔피언인 우리까지 무찌른다면 라치오에게 ‘자이언트 킬러’라는 별명을 붙여도 괜찮으리라.

“너희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입장 전,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무리뉴 감독.

“사실상 오늘 결승이 이번 시즌의 마지막 경기다. 리그 몇 게임이 남아있긴 하지만 별 의미는 없지. 개막 전에는 트레블을 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조금은 꼴이 우습게 되었어. 고백하자면, 내가 허언증이 좀 있어서 말이야.”

좀처럼 보기 힘든 무리뉴 감독의 유머에 몇몇 동료들이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나는 얼마든지 비웃어도 좋다. 그러라고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순간, 무리뉴 감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너희들이 속한 인테르라는 클럽을 남들이 비웃게 만들진 않길 바란다. 나가서 저 오만한 로마 놈들의 콧대를 꺾어주고 오도록. 상대가 다윗이든 골리앗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짓밟아버리면 그만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무리뉴 감독의 안색이 아주 나빠 보였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크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최근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는 것이겠지.

“자... 나가자...”

여기 기운 없는 사람 한 명 추가요.

밝은 미소를 패시브로 장착하고 몸에서 늘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던 사네티 주장은 이제 없다.

시일이 꽤 지났건만, 승부차기 실축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힘을 내요, 주장.

이걸로 괜찮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코파를 품에 안겨드릴게요.

우오오오오오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경기장의 열기.

관중석은 살짝 스캔했는데, 대충 봐도 라치오의 응원단이 훨씬 눈에 많이 띄었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은 무조건 이 경기장에서 펼쳐지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우리에겐 썩 유쾌하지 않은 조건이었다.

라치오의 홈구장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

말이 중립 경기지, 엄밀히 보면 원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뭐 어쩌겠는가, 규정이 그렇다는데.

양 팀 감독은 흥미롭게도 클래시컬한 4-4-2 포메이션을 서로 들고 나왔다.

우리는 당연히 정백강-즐라탄 조합.

상대는 고란 판데브와 마우로 사라테가 호흡을 맞춘다.

삼프도리아를 코파 4강으로 이끈 게 안토니오 카사노-잠파올로 파치니 투톱이었다면, 라치오 돌풍의 핵심은 판데브-사라테라고 볼 수 있었다.

판데브는 5골 1어시스트, 사라테는 3골 2어시스트를 각각 기록 중.

아직 결정되지 않은 득점왕 자리에는 대략 세 명의 후보군이 있었다.

1위는 파치니.

팀은 탈락했지만 여전히 6골로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그 밑으로는 나와 판데브가 공히 5골을 기록하며 바짝 쫓는 중이었다.

“자! 다들 고개 들고! 정신 바짝 차리자!”

잔뜩 풀이 죽은 사네티 주장을 대신해, 부주장인 이반 코르도바 형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킥오프.

이번 시즌 딱 하나 남은 우승컵을 건 양 팀의 대격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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