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45화 (46/176)

45화

뻐어엉-----

“아오! 아깝다!”

결승전 시작을 알리는 첫 슈팅은 전반 5분 즐라탄의 오른발에서 나왔다.

나를 향한 스루패스를 의식한 상대 수비진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틈을 노려 30m 밖에서 중거리포 작렬.

오른발등에 제대로 얹힌 공이 크로스바를 살짝 스치듯 넘어갔다.

이른 시간대의 실점 위기를 넘긴 페르난도 무슬레라 골키퍼가 천천히 골킥을 준비했다.

오늘 경기의 키맨 중 하나인 무슬레라는, 개차반이라고 평가받는 라치오 수비진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세리에에서 가장 높은 67%의 선방률(유효 슈팅 대비 선방 비율)을 기록하며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

결정적인 순간마다 미친 선방을 보여준 무슬레라가 없었다면 라치오의 이번 시즌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을 거란 평가가 많았다.

나와 즐라탄에겐 우승을 위해 넘어야 할 산 중의 하나인 셈.

하지만 반사신경에 비해 킥력은 좋지 않은 모양인지, 무슬레라의 골킥은 에스테반 캄비아소에 의해 가볍게 ‘컷’당했다.

왼쪽 측면으로 공을 전개하는 캄비아소.

윙어로 출장한 문타리가 공을 받자마자 내 머리를 겨냥하고 얼리 크로스를 시도했다.

직접 슈팅하기에는 좀 먼 거리.

즐라탄에게 떨궈주는 쪽을 택했는데...

뻥-----

어라? 그걸 또 쏜다고?

첫 번째 슈팅은 충분히 일리 있었지만 방금 플레이는 정말 아니었다.

수비가 바짝 붙은 상태에서 억지로 시도한 슈팅은 상대 센터백 슈테판 라두의 몸에 맞고 멀리 튕겨 나가 자연스럽게 라치오의 역습 기회로 연결되었다.

중앙 미드필더 크리스티안 레데스마가 속도감을 살려 장거리 스루패스.

오른쪽 측면으로 돌아 들어가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깬 마우로 사라테가 훌쩍 뛰며 높게 날아온 공을 발 안쪽으로 잡아냈다.

“헤이!”

손을 번쩍 들며 쇄도하는 고란 판데브.

완벽한 크로스 찬스였다.

파아앙-----

우리 입장에선 굉장한 위기였으나, 사라테는 직접 슈팅을 선택했다.

하지만 골문을 노리기엔 부적절한 각도였고, 라치오는 절호의 득점 기회를 날렸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올려 줘야지!”

불만에 가득 찬 판데브의 목소리가 최전방까지 생생히 들려 왔다.

사라테가 본인도 민망한지 혓바닥을 쑥 내밀며 판데브를 향해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무래도 결승전이다 보니 골 욕심이 좀 나는 모양이다.

영웅이 될 기회라는 게 그리 자주 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다 올라가!”

사뭇 비장한 모습의 프란체스코 톨도 형님.

이 형님도 선수 생활 황혼기인데.

줄리우 세자르 형님이 불의의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참 험한 꼴 많이 당하고 있다.

톨도 형님의 골킥은 마리오 발로텔리에게로.

발로텔리는 다시 즐라탄에게 전진 패스.

터어엉-----

또 한 번 허공을 향해 치솟는 중거리포.

해도 해도 너무한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즐라탄! 공 좀 돌려! 지나치게 성급해!”

아니 근데 저 녀석이?

내가 소리치는 걸 분명 들었을 텐데 대꾸는커녕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즐라탄.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내가 뭐 잘못하거나 실수한 게 있는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아니지, 그런 게 있다손 치더라도 경기 중에 이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라탄이 형, 무슨 생각인 거야?

* * *

삑--- 삑-----

휘슬과 함께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의 45분이 득점 없이 지나갔다.

전반전에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간 선수는 누가 뭐래도 즐라탄.

애석하게도 나쁜 의미로 말이다.

무지막지한 탐욕을 선보이며 무려 7개의 슈팅을 때려댔고, 그중 유효슈팅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즐라탄을 붙잡았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할 얘기 없는데.”

“있을 것 같은데?”

“미안한데 건들지 말아줄래?”

“뭐라고?”

“간다.”

“허...”

적반하장에 안하무인이 따로 없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린 나를 남겨둔 채 터벅터벅 먼저 들어가는 스웨덴 사나이.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였으니 교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이한 점은 무리뉴 감독이 따로 질책을 하거나 타이르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는 것.

즐라탄 역시 아무 말 없이 교체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미처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즐라탄 대신 필드를 밟게 된 인물은 백전노장 루이스 피구 형님.

자연스럽게 발로텔리가 투톱 자리로 올라왔다.

사실 이름값 빼고 보면 나랑 제일 합이 잘 맞는 친구가 바로 발로텔리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힘이 넘쳐서 잘 뛰어다니고, 결정력도 괜찮고, 패스까지 수준급이다.

가끔 보여주는 이상한 돌발행동과 문란한 사생활만 빼면, 필드 내에서 공격수로서는 육각형에 가까운 선수.

교체된 이상 경기 따위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즐라탄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일단 오늘의 승리가 가장 중요했다.

라치오는 선수 교체 없이 그대로 나왔다.

“큭큭, 쟤 아무래도 감독한테 한 소리 들은 모양인데? 소문이 진짜인가 봐?”

발로텔리가 음흉하게 웃으며 사라테를 가리켰다.

전반전 아주 좋은 기회를 말아먹었던 사라테는 정말로 델리오 로시 감독에게 크게 혼난 모양인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발로텔리가 말하는 ‘소문’이란 제법 심각한 내용이었는데, 로시 감독이 선수들에게 심심찮게 ‘몸의 대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한국에서 학창 시절에 축구 하면서 남 못지않게 많이 맞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폭력은 용납할 수 없는 일.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바로 언론에 뿌려서 기사화를 시켜버릴 것이다.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보여줘야지.

건들기만 해봐라.

아주 그냥 회생 불가능한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테니.

애니웨이.

새로운 마음으로, 후반전 킥오프!

* * *

이거지, 이게 축구지!

즐라탄이 발로텔리로 바뀐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굉장했다.

간만에 스트라이커로 뛰게 된 발로텔리는, 무리뉴 감독에게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폭발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그 결과는 후반 시작 10분 만에 1골 1어시스트.

내가 헤더로 떨궈준 볼을 다이렉트 발리슛으로 연결하며 선제골을 넣더니, 이어지는 공격에서 내 머리를 겨냥한 칼날 크로스로 도움까지 기록했다.

뭐야, 무슬레라 골키퍼 개쩐다더니, 생각보다 별 거 아니잖아?

전반전에는 즐라탄 덕분에 꿀 빨았지?

이게 진정한 세리에 챔피언의 공격력이란다.

원정 온 밀라노 대표팀(?)의 행패에, 라치오를 응원하러 온 수많은 로마 시민들은 일제히 멘붕에 빠졌다.

하프타임 동안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알 수 없는 사라테는, 잔뜩 기가 죽어서 특유의 시원스런 플레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파트너의 부진 속에 전방에 고립된 판데브가 개인 능력으로 뭘 만들어보려 했으나, 오늘 유난히 이를 악문 코르도바 형님의 수비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후반 44분.

이미 승부가 기운 상황에서 얄밉게 발재간을 부리던 발로텔리의 정강이를 라두가 걷어차면서 경기장은 순식간에 콜로세움으로 탈바꿈했다.

폭행 당사자인 라두는 당연히 다이렉트 퇴장.

쓰러진 발로텔리에게 욕설을 퍼부은 라치오 선수들 5명에게 일괄 경고.

관중들의 엄청난 야유 속에, 다소 깔끔하지 못한 모습으로 코파 이탈리아의 여정이 끝나게 되었다.

성깔 더럽기로 소문난 감독을 닮아서 그런가.

어째 다들 매너가 영...

다른 나라의 컵 대회에 비해 규모나 운영의 질, 위상 면에서 많이 부족하단 평가를 받는 코파 이탈리아지만, 어쨌든 우승은 우승.

더블을 달성하며 이탈리아 최강팀임을 팬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로써 충격적인 챔스 탈락의 아픔을 딛고 2008-2009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나 싶었는데...

그러나 이 우승 소식은 ‘내부의 적’에 의해 순식간에 묻히고 말았다.

* * *

[인테르의 스타 공격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전격 이적 요청!]

코파 결승 다음 날 터진 대형 이슈.

요즘 즐라탄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했는데, 바로 이것이었나.

기사를 보자마자 바로 즐라탄에게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다.

대신 문자 메시지 한 개가 도착.

- 통화할 기분은 아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백강.

느낌이 확 온다.

이거, 단순한 루머는 절대 아니구나.

즐라탄 집에 찾아가 볼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정말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연인 사이도 아니고.

떠난다면 떠나는 거지.

단지 자초지종이 궁금하긴 하다.

혹시 나 때문일까.

아니면 무리뉴 감독과의 갈등?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나의 궁금증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되었다.

최초 보도 후 오래지 않아 사건의 내막에 대한 추가적인 기사들이 연이어 쏟아진 것.

“저절로 알게 될 거”라는 즐라탄의 메시지는 사실이었다.

보도의 대부분은 즐라탄의 인터뷰 내용을 재구성한 것들.

진즉에 작성된 기사가, 구단 요청에 의해 엠바고(보도 시점 제한)에 걸려 있다가 사실상의 시즌 종료와 함께 터져 나오는 모양이었다.

시즌 막판 큰 경기들을 앞두고 선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까 봐 구단 측에서 언론에 힘을 쓴 것 같았다.

어쨌든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1. 처음으로 이적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시기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2. 나름대로 적응하긴 했지만, 나는 태생이 스트라이커. 그라운드 위에서 100%를 발휘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음.

3. 이후 무리뉴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톱 자리에 복귀했으나 위치만 옮겼을 뿐. 팀 전술상의 이유로 공격진의 중심보다는 보조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불만은 계속됨.

4. 맨유와의 챔스 준결승에서 조기 교체됐을 때 이적에 대해 확고하게 마음을 먹었고, 무리뉴 감독에게 전달함.

5. 무리뉴 감독은 처음에 만류했지만, 종국에는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고, 앞날을 응원해줌.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엔 나 때문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인터뷰에서 탁 까놓고 내 이름을 넣지 않은 건, 즐라탄 나름대로의 배려겠지.

어지간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다 알겠지만.

자존심 강한 두 남자, 즐라탄과 무리뉴 감독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중재자 역할을 잘 해냈다고 자평했었는데, 내 생각보다 갈등의 골이 훨씬 깊었던 모양이다.

저간의 사정을 알고 나니 코파 결승전에서 즐라탄이 보여준 플레이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이제 곧 떠나는 마당에 마지막 큰 경기에서 얼마나 골을 넣고 싶었겠는가.

물론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즐라탄이 이번 시즌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건 팩트.

그러나 즐라탄만한 클래스의 공격수가 흔하지 않다는 것 또한 팩트.

영입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군침을 흘릴 팀은 유럽에 널렸다.

즐라탄이 떠난다라...

그럼 우리 팀의 다음 시즌은 어떻게 되려나...

간만에 심도 있는 고민을 좀 하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따르릉---

“무슨 일이야?”

“백강! 큰일 났어! 즐라탄이 이적한대! 전화해도 안 받아!”

“문자로 답장 못 받았어?”

“아무것도 안 왔는데. 그냥 안 받아.”

문타리 형.

즐라탄하고 더 친한 건 아무래도 나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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