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46화 (47/176)

46화

삑--- 삑--- 삑-----

2009년 5월 31일.

아탈란타 원정 경기를 끝으로 인테르의 2008-2009 시즌이 공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 이후 치러진 리그 3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한 우리 팀은 대기록 하나를 추가할 수 있었다.

한 시즌 최다 승점 기록이 그것.

33승 4무 1패로 103점을 마크하며 세리에 역사상 최초로 승점 100점을 돌파했다.

즐라탄의 이적 요청 발표 이후 오히려 더 하나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이며 나쁘지 않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시즌을 보낸 우리.

하지만 정작 유럽 최고의 팀은 따로 있었으니...

바르셀로나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맨유를 2-0으로 꺾고 기어이 트레블을 달성했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리오넬 메시가 주축이 되어 완성한 위대한 업적.

트레블은 1998-1999 시즌 이후 딱 10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그 당시 트레블의 주인공이었던 맨유가 조연이 되어 바르셀로나의 영광을 완성시켜 준 것도 참 묘했다.

세상사는 그렇게 돌고 도는 법.

한편 유럽 최고의 골잡이에게 주어지는 ‘유러피언 골든 슈’는 다시 한 번 나의 손에 들어왔다.

무리뉴 감독의 지나친(?) 관리 덕분에 리그 6경기를 결장했지만, 출전한 경기에서는 경기당 1골 이상을 집어넣었다.

최종 기록은 리그 32경기 33골.

최후의 최후까지 좋은 경쟁자가 되어 주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포를란은 끝내 32골에 그치며 아깝게 수상 기회를 놓쳤다.

를란이 형, 거참 미안하게 됐수다.

제가 잘난 걸 어쩌겠어요.

* * *

“백강, 네가 또 1등이네.”

“늘 그렇죠, 뭐. 제가 또 부지런함의 화신 아니겠습니까.”

하도 자주 와서 이제는 내 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사네티 주장의 대저택.

선후배들 초대해서 식사하는 걸(물론 선배는 거의 없지만) 워낙 좋아하는 양반이라, 내가 인테르에 처음 합류했을 때부터 참 뻔질나게 드나든 곳이다.

오늘 회식의 콘셉트는 일종의 종무식.

“한 시즌 동안 다들 고생했는데,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해야지?”

사네티 주장이 초대하면서 던진 멘트였다.

“아, 뭐야. 백강이 또 1등이야?”

“여자친구가 없어서 그런가,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네.”

“축구장에서는 제일 느린데 이런 건 제일 빠르다니까? 정말 신기한 노릇이지.”

나에 이어서 속속 도착한 동료들이 한 마디씩 건네 왔다.

말 속에 뼈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지?

웬일로 40분밖에 늦지 않은 발로텔리를 끝으로 모든 멤버가 다 모였다.

“즐라탄도 초대는 했는데... 정중히 거절하더라고. 뭐, 그런 거지.”

호스트인 사네티 주장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나마 주장이라서 정중히 거절한 거랍니다.

우리 문타리는 답장도 못 받...

하여간에 이적 요청 보도 이후 즐라탄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훈련에도 안 나오고, 남은 경기에서도 명단 제외였으니...

하긴, 이미 팀에서 마음이 떠났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선수이니 당연한 처사겠지.

“오늘을 위해 아주 특별한 와인을 준비했어. 내 비장의 컬렉션 중 하나지. 무려 1945년산.”

60년이 넘은 와인이라니.

저런 건 얼마나 하려나?

“그런 와인은 얼마나 해요?”

궁금했지만 속물처럼 보일까봐 차마 묻지 못했던 가격을 시원스럽게 물어보는 문타리.

새가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럴 땐 상남자구나?

“2만 2천 유로 정도 줬던 것 같은데.”

끄억.

우리 돈으로 하면 거의 4천만 원 돈이다.

정말 그런 귀한 걸 마셔도 되겠습니까.

“이거, 가득 따라줄 양은 안 되니까 조금씩 맛만 보자고.”

사네티 주장이 돌아다니며 직접 와인을 따라 주었다.

“이 술이 만들어진 1945년은 백강의 나라 한국이 식민지배를 벗어난 때이기도 해.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해지.”

나는 그만 놀라서 제대로 사레들리고 말았다.

“컥컥, 켁켁!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별 것 아니라는 듯 씩 웃어 보이는 주장.

“오랜 습관인데. 새로운 친구가 팀에 들어왔는데 내가 잘 모르는 나라 출신인 경우가 있잖아? 그러면 조금 찾아보곤 해.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헐... 감동이야.

라이벌인 밀란 팬들조차 인정하는 위대한 주장 하비에르 사네티.

정말 존경스러운 남자다.

“자, 건배할까?”

“네! 주장!”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생각해 보면 참 놀라운 일이다.

은퇴를 종용받던 퇴물 축구선수가 세계적인 명문 구단에서 축구 역사에 남을 선수와 술 한 잔을 나누고 있다니.

백강아.

이 축복을, 이 기회를 절대 놓지 말자.

“그나저나 즐라탄은 어디로 가려나?”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혀가 살짝 꼬인 에스테반 캄비아소가 코끝을 찡긋하며 말했다.

알코올이 좀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도마 위에 오른 즐라탄의 행보.

“백강, 너 뭐 들은 얘기 없어? 친하기도 했고, 에이전트도 같잖아.”

문타리의 의심은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대답은 아니올시다였다.

“몰라. 밖에서 보기엔 라이올라 이미지가 좀 망나니 같겠지. 근데 맺고 끊는 건 확실히 프로페셔널한 구석이 있어서. 업무적으로 나를 상대할 땐 오로지 나에 대한 이야기밖에 안 해.”

내 대답은 순도 100%짜리 참트루였다.

인테르에 온 이후 광고 계약 건 등으로 라이올라를 자주 만났지만, 본인의 다른 고객들에 대한 정보는 일절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미래를 알고 있는 나라서, 짚이는 구석은 분명 있지만 말을 조심하기로 했다.

“갈 새끼 얘기는 해서 뭐해? 술이나 먹지. 피구, 노래나 한 곡 하지 그래? 분위기도 바꿀 겸.”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이 이탈리아 전통주인 ‘삼부카’를 컵에 가득 따르며 말했다.

와, 저거 40도가 넘는 건데.

거친 입심만큼이나 ‘간심’도 대단하다.

루이스 피구 형님보다 딱 한 살 어린 마테라치 형님은, 동료들 중에서 피구라는 축구계의 거목을 어려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

“노래라. 혹시 기타 있나?”

“갖다 줄게.”

집주인인 사네티 주장이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통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몇 번 퉁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피구 형님.

“조율이 잘 돼 있네. 가끔 치나 봐?”

“너만큼 고수는 아니지만 조금 배웠었지.”

“좋았어. 오늘 같은 날엔 무슨 노래를 불러야 어울리려나.”

고민하는 척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퀸(Queen)’ 노래 하시겠지 뭐.

피구 형님의 퀸 사랑은 말해 입 아픈 수준.

이윽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I′ve paid my dues time after time--- I′ve done my sentence--- But committed no crime---”

크, .

핵명곡이지.

스포츠인이라면 가슴이 절로 뜨거워지는 노래다.

이왕이면 트레블 하고 들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We are the champions my friends--- 자, 다 같이!”

가장 음이 높은 파트에서 청중들을 향해 ‘에브리바디’를 외치는 노련함,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능구렁이 그 자체.

우레 같은 박수와 함께 피구 형님의 특별 공연은 막을 내렸다.

앙코르 요청은 없었다.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다 보니 어느새 새벽 1시.

“이제 슬슬 가야지?”

“클럽 가자! 클럽!”

“저는 집에 먼저...”

“그런 게 어딨어! 남자가 말야. 끝을 봐야지.”

“그런 구시대적인 말씀을?”

2차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네티 주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곧 파할 것 같으니 원래 하려던 얘기를 할게. 흥을 깰까 봐 좀 미뤄뒀는데.”

평소와는 많이 다른 주장의 분위기에 소란스럽던 실내가 확 조용해졌다.

“나... 은퇴하려고 해.”

* * *

“오! Grande Testa(위대한 머리)! 작년에 키에보랑 붙었을 때 직관하러 갔었죠. 그때 당신이 해트트릭해서 아주 박살을 내줬었는데. 당신 온 뒤로 골수 밀란 팬인 친구 놈이 얼마나 역정을 내는지. 아주 고소해요. 하하하.”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유명하다는 건 때로 굉장히 불편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머리가 아파서 좀 쉬고 싶지만 기사님이 계속 말을 걸어대는 통에 그럴 수가 없다.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은 정말 아까웠죠. 거기서 하비에르가 실축을 할 줄이야. 순간 욕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비에르를 비난할 순 없는 거 아니겠어요? 다음 시즌에 두 배로 갚아주길 바라며 응원할 생각이에요. 분명 그럴 거라 믿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기사님.

지금 차를 돌려 주장네 집에 갈까요?

기사님 말씀을 들으면 주장이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겠네요.

은퇴라니.

당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아, 또 머리가 지끈거린다.

시계를 돌려 1시간 전 주장의 집.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주장의 동갑내기 친구인 마테라치 형님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하하. 그렇게 엉뚱한 소리인가?”

“말이 말 같아야 말이지. 설마, 그 망할 실축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런 건 아냐.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몸 상태도 예전 같지 않고, 팀에 좋은 선수들도 많잖아? 내가 계속 뛰는 게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라져.”

“우라질!”

목이 타는지 삼부카 한 잔을 원샷 때려버리는 마테라치 형님.

“주장, 아무리 생각해도 은퇴는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마음 약한 문타리는 거의 울상이었다.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문타리 너도 있고, 에스테반도 아주 잘해주고 있고. 수비진에도 마이콘에 다비데에, 이반에... 어쩌면 나 때문에 기회를 못 받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나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즐라탄마저 자기 뜻대로 쓰다가 기어이 떠나게 만든 게 무리뉴 감독님이에요. 주장이 주전으로 뛰는 건 그만큼 실력이 출중하다는 뜻인 거예요. 이름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너무 과대평가 받는 것 같은데?”

“주장...”

“백강, 네가 있어서 더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우리 팀에 있는데 뭐가 두렵겠어?”

그... 그 말은 맞습니다만...

잠자코 듣고만 있던 피구 형님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이 얘기, 또 아는 사람이 있나?”

“아직. 오늘 처음 얘기한 거야. 나 은퇴하면 같이 놀러나 다니자고. 그러고 보니 포르투갈도 안 가본지 오래 됐네, 루이스, 네 고향에 있는 그리스도상.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가이드 좀 해줄 수 있을까?”

“거기 참 좋은 곳이지. 당연히 해주고말고.”

아니, 이 형님들아.

은퇴 후 계획 같은 거 세우지 말라고요.

귀여운 문타리가 눈물로 호소하는데.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었습니까?

후배들의 간곡한 설득이 이어졌지만 끝내 주장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집을 나서 택시를 기다렸다.

즐라탄도 없고... 사네티도 없고...

모 야구 감독의 유행어가 떠오르는 상황.

다음 시즌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겠구먼.

착잡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피구 형님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백강, 내가 예언 하나 할까?”

형님의 예지력은 챔스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 뽑았을 때 이후로 맞은 적이 없지 않습니까...

라는 말을 억누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언이요? 어떤...”

조금은 음흉하게 웃어 보이는 피구 형님.

“하비에르 말이야. 절대 은퇴 못 해.”

저희 방금 같은 공간에 있었던 거 맞나요?

“그럴까요? 생각이 엄청 확고해 보이던데...”

“구단에서는 아직 소식을 모르잖아. 두고 보라고, 다음 시즌에도 개막전부터 멀쩡히 뛰고 있을 테니...”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하나.

“그럼 가이드 얘기는 왜 수락하신 거예요?”

“그거야 뭐.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가보지 않겠어? 너도 같이 놀러와.”

나는 심각한데 피구 형님은 천하태평이다.

무슨 자신감인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피구 형님의 말을 믿어보고 싶다.

가지 마세요 주장, 같이 트레블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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