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이 따가울 정도다.
이곳은 인천국제공항.
시즌 종료 후 휴가를 받아 한국에 돌아왔다.
즐라탄의 이적 요청과 사네티 주장의 은퇴 선언이라는 대사건들이 쌓여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저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잘 풀리길 기원하는 수밖에...
한국 축구 최고 스타의 입국 소식은 기자들에게 좋은 기삿거리.
빽빽한 취재진들 속에서 미니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 세리에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지난 1년을 자평한다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놓친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더블을 했으니 팀 성적은 어느 정도 만족한다. 개인 성적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리그와 챔스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적 당시만 해도 수비가 강한 세리에의 특성 때문에 우려도 있었는데.
“EPL이 좀 더 피지컬한 수비라면, 세리에는 수비가 전술적으로 더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같이 호흡을 맞추는 즐라탄, 루이스 피구, 마리오 발로텔리 등이 워낙 좋은 찬스를 많이 제공해 주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 한국에서의 일정이 빡빡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씀하신 대로 이것저것 일이 많다. 광고 촬영도 있고, 다큐멘터리도 찍는다고 하고... 과분한 관심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 올해 유력한 발롱도르 후보 중 하나다. 만약 수상한다면 한국 축구 역사에 또 한 번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셈인데?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지만, 글쎄. 아무리 그래도 발롱도르는 트레블 팀인 바르셀로나에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주신다면 감사히 넙죽 받도록 하겠다. 하하하.”
- 다음 시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이번에 못 다 이룬 트레블이다. 두 번 좌절은 겪지 않도록 오프시즌 동안 더 노력하겠다.”
* * *
- 개인 사정으로 오늘 휴업합니다.
오잉? 이게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래 드리려고 일부러 연락 없이 <백강분식>에 찾아왔더니 A4 용지에 꾹꾹 눌러 쓴 휴업 공지가 떡 붙어 있다.
세상 부지런한 엄마가 휴업이라니.
우리 김영순 여사님께 무슨 일이 있나?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아들...”
엄마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어디 편찮으세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네.”
“몸살이 났는지 영 안 좋네... 오늘 가게 문도 못 열었어...”
“안 그래도 지금 가게 앞인데 놀라서 전화했어요. 병원은 가 보셨어요?”
“몸살에 병원은 무슨...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으이그... 일단 집으로 갈게요.”
무리해서 일하다가 언젠가 병날 줄 알았다.
식당 일이 보통 힘든가.
좀 쉬시라고 해도 ‘쉬면 더 아프다’며 고집을 부리시더니 기어코 탈이 난 모양이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 죽집에 들렀다.
가게를 못 열 정도로 편찮으시면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을 테니...
“전복죽 하나 포장이요.”
“네, 알겠... 어머? 어머머? 혹시 그 축구...”
“맞습니다. 제가 정백강입니다.”
“TV에서 봤어요. 어머어머,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다~ 반가워요, 정말. 내가 서비스로다가 전복 많이 넣어드릴게.”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사인...”
“해드릴게요. 종이하고 펜만 주세요. 사진은 안 필요하신가요?”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죽집 사장님까지 내 얼굴을 알 정도니, 한국에서의 내 유명세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내 사인은 이제 죽집 벽에 떡하니 붙겠지.
“저 왔어요!”
포장한 죽을 들고 내가 엄마에게 선물한 아파트 ‘1004호’에 도착했다.
“왔니...”
안방 문을 열며 등장하는 엄마.
땀에 흠뻑 젖은 얼굴에 움푹 들어간 양쪽 볼이 눈에 확 들어온다.
“아이고, 누워 계시지 뭐하러 나왔어요.”
“아들이 간만에 집에 왔는데 나와 봐야지...”
“죽 좀 사 왔어요. 전복죽 괜찮죠?”
“오~ 우리 아들 이제 다 컸네. 이런 것도 챙길 줄 알고.”
“너무 커서 문제죠. 나도 아직 밥 안 먹었으니까 같이 먹어요.”
엄마랑 같이 마주 앉아 식사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남자도 좀 만나고 그래요. 이렇게 아프면 외롭고 서럽잖아.”
“얘가 이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남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니? 엄마도 바쁘단다.”
“식당 일 좀 줄이면 되죠. 용돈 모자라신 건 아니잖아요.”
“네가 보내준 돈은 한 푼도 안 썼어. 아직 두 다리 두 발 멀쩡한데 벌써 용돈 받아 쓰고 그러면 못 써. 벌 수 있을 때까진 벌어야지.”
정말 못 말리는 엄마다.
“말이 술술 나오는 걸 보니까 이제 안 아프신가 봐요?”
“그러게. 아들이 와서 그런가?”
무심히 내뱉은 말에 가슴 한쪽이 아프다.
엄마를 모시고 살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 이야기를 안 나눠본 건 아니었으나, 곧 50을 바라보는 엄마가 이제 와 외국 생활에 적응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럴 땐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다는 게 너무 크게 느껴진다.
“내 걱정은 말고 네 청춘사업이나 신경 써. 엄마는 이탈리아 여자든 영국 여자든 괜찮아. 네 마음에만 들면 무조건 오케이야. 요새는 또 글로발 시대 아니겠니?”
“에이, 엄마도 참...”
엄마의 역공(?)에 잠시 나연 씨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저는 한국 여자가 좋아요, 엄마.
* * *
이튿날, ‘정백강 효과’로 완전회복한 엄마는 새벽부터 식당에 나가셨다.
오늘은 한국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몇 안 되는 자유시간.
내일부터 빽빽한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흐음... 그렇다면...
- 혹시 오늘 저녁에 바빠요?
조심스럽게 보낸 문자메시지 한 통.
수신자는 물론 나연 씨다.
애초에 아무 예고도 없이 연락했으니 거절당해도 괜찮다, 백강아.
쿨하게 알았다고 하면 돼.
너 슈퍼스타 정백강이야.
하지만 쿨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 재방송이 나오는 중이다.
제목은 <집사람의 유혹>.
크, 추억 돋네.
이 당시에 시청률 40% 넘겼었지 아마?
포츠머스에서 방출당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드라마 정말 많이 봤었다.
우웅-----
답장이 왔다!
- ♧김미영 팀장입니다. #고객님께서는 최저 이율로 최대 3천만원까지 대출 가능하십니다. §30분 내 입금 가능♠
우와, 정말 대단해요!
근데 그거 아세요?
제 주급이 2억이 넘어요.
스팸 문자를 받으니 한국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확 난다.
우우웅-----
이번엔 진짜다.
- 어머, 한국 왔다곤 들었는데 이렇게 연락할 줄은 몰랐네요. 근데 어쩌죠? 오늘 저녁은 선약이 있어서 ㅠㅠ 오랜만에 어머니하고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럼 그렇지.
역시 인생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비록 만남은 실패했지만, 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연 씨, 자취하는 여자였어.
- 괜찮아요 ^^ 어머님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답장을 하고 나니 공허하다.
오늘은 남자랑 보내야겠구나.
- 나 한국.
- ㅇㅇ 알아.
- 오늘 바쁨?
- ㄴㄴ 오늘 쉬는 날.
- 집으로 놀러와. 삼겹살에 소주나 한 잔 하자.
- 콜.
- 내가 다 살 테니까 설거지 좀 해줘 ㅋㅋㅋ
- 안 감 ㅅㄱ
- 알았어, 미안하다 제발 와줘 심심해 죽겠다
- ㅇㅇ 이따 봐 ㅋㅋㅋ
천하의 정백강을 막 대하는 이 녀석은 나의 망할 ‘베프’ 김석중.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으니 10년이 훌쩍 넘은 인연이다.
발도 빠르고 킥력도 출중해서 꽤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 스트라이커였던 녀석.
하지만 신은 그에게 부실한 신체도 함께 주었다.
십자인대, 고관절, 발목, 허리 등 부위도 다양하게 심각한 부상이 이어지면서 기량을 완전히 상실한 녀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를 포기했다.
아오, 근데 막상 장 보려니까 되게 귀찮네.
그냥 석중이한테 사 오라고 하고 돈을 줘야지.
가진 거라곤 돈과 명예뿐이니.
* * *
딩동--- 딩동---
“너도 되게 심심했구나? 빨리도 왔네.”
“아니 이 형님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오셨는데! 이런 반응이면 나 갈래.”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짐은 이리 주시고요. 불판은 벌써 세팅해 놨습니다.”
“입이 두 개라서 고기도 2kg 샀는데, 모자라진 않겠지?”
“집에 라면 있어서 괜찮아.”
치이익--- 치익---
삼겹살이 익어가는 소리가 영롱하다.
“크으... 쥑이네.”
“한 달에 수십억씩 버는 애가 고작 삼겹살 가지고 호들갑이냐.”
“고작 삼겹살이라니. 그런 서운한 말씀을. 이탈리아에선 이렇게 먹기 힘들단 말이야.”
“그르냐. 고건 미처 몰랐네. 이탈리아를 가본 적이 있어야지.”
“됐고 짠이나 해.”
“그래, 짠!”
고기 지방의 느끼함을 씻어주면서, 알코올이 목구멍을 짜르르 간지럽히는 느낌이 좋다.
이 맛에 산다 진짜.
“한국에 언제까지 있냐?”
“6월 말까지. 7월부터는 미국 투어 있어서 합류해야 돼.”
“그래도 한 3주는 있네?”
“근데 내일부터 바뻐. 하도 부르는 데가 많아가지고.”
“어이구, 그러시구나.”
한 잔, 또 한 잔.
세계적인 축구선수들과 마시는 4천만 원짜리 와인도 좋지만, 불알친구와 즐기는 소주도 그에 못잖게 훌륭하다.
물론 마음은 훨씬 편하고.
“어머니는 출근하셨어?”
“어, 나 일어나니까 벌써 나가셨던데.”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네.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너 몰랐어? 와... 너희 어머니 진짜 독하시다. 너 걱정할까 봐 숨기셨나 보네.”
“뭔데? 빨리 말해 봐.”
행복한 순간을 만끽 중이었는데, 기분이 확 나빠졌다.
엄마한테 나쁜 일이 생긴 걸까.
“가게 말이야. <백강분식>. 너 덕분에 거기 장사가 워낙 잘 되잖아. 그거 보더니 건물주가 갑자기 월세를 두 배로 올렸거든. 근데 아무리 손님이 많아 봐야 분식집 아니냐. 벌어야 얼마나 번다고 두 배를 달래. 상도덕이 없는 거지.”
“시발, 개 같은 새끼네 그거.”
욕지거리가 단박에 튀어나왔다.
서울에 건물 한 채 가질 정도로 머리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백강분식> 매출액 정도는 어림짐작이 가능할 터다.
월세 인상을 통보할 때 그 새끼의 속내는 이런 거였겠지.
- 아들내미 돈 많잖아? 지 에미가 못 내면 정백강이가 대신 내주겠지, 뭐.
하지만 바보 같은 우리 엄마는 자기 가게에 대해선 자기 손으로 책임을 지고 싶으셨던 거다.
내가 달마다 보내드리는 용돈도 차곡차곡 은행에 쌓아두고만 계신 분 아닌가.
“그 건물주란 새끼, 내가 조져 버린다!”
“조질 땐 조지더라도 내일 가든가 해. 술 취해서 사람 때리면 인생 종친다. 너 정도면 거의 공인(公人) 아니냐 공인.”
인정하긴 싫지만 매우 일리 있는 지적이다.
석중이 녀석, 생각보다 침착한걸?
“술 좀 따라주라.”
“얼마든지.”
“그리고 말해줘서 고맙다.”
“고맙기는 뭘. 그나저나 알고는 있었지만 너희 어머니 정말 대단하시다. 그걸 속에 품고만 계셨다니... 그런 어머니니까 너 같은 아들이 나왔겠지.”
“오... 나를 인정해주는 거냐?”
“좀 빙구 같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 최고의 축구선수 아니냐. 나도 한때는 축구인이었고.”
“아오, 오글거린다. 그만 하자.”
“오케이, 술이나 마셔.”
다시 한 번 건배.
건물주 자식아, 너 사람 잘못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