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한 번만 더 가겠습니다!”
이곳은 CF 촬영 현장.
사람 살려!
이러다가 정말 쓰러지겄다.
맨유랑 풀타임에 연장전까지 치렀던 챔피언스리그 4강전보다 이쪽이 두 배는 힘들다.
저 ‘한 번만’이 대체 몇 번째냐.
콰아앙-----
세어 보진 않았지만, 체감상 헤더를 한 50번은 한 것 같은데...
이러다 머리 나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정백강 선수! 표정을 좀만 더 밝게 부탁드릴게요! 뭐라고 해야 하지? 맞아, 근심을 막 해결한 듯한 그런 표정이요!”
밝은 표정이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프로답게.
스마일~
“웃는 게 약간 어색합니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가능할까요?”
저는 배우가 아니라 축구선숩니다만.
역시 먹고사는 일이 쉽지 않다.
“이... 이렇게요?”
“얼굴 근육이 너무 경직되어 있으세요. 음... 그러면 즐거웠던 일을 한 번 떠올려보시겠어요?”
즐거웠던 일이라...
나연 씨와 인터뷰 하던 그날?
“오, 지금 표정 아주 좋아요. 그런 느낌으로 가면 되겠습니다.”
이게 효과가 있을 줄이야.
“오케이! 좋았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촬영이 끝났다.
물론 완전히 끝난 건 아니고 내레이션 녹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오늘 일정은 아니다.
살다 살다 변비약 광고를 찍게 될 줄이야.
카피가 ‘정백강의 헤딩처럼 시원하게 뚫어드립니다.’라니.
처음에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칠까 봐 고민하기도 했지만,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수락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운동선수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기 때문에,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놔야 한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오후 6시.
촬영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약속 시간에 늦진 않을 것 같다.
* * *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하니, 유명 브랜드의 아웃도어 룩으로 중무장한 중년 남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남필성 씨?”
“어이구, 맞어 맞어.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정백강이를 이렇게 만나는구먼.”
“저희 초면이죠? 죄송한데 반말은 접어두셔도 될 것 같네요.”
“...”
일단 기선제압 성공.
나이가 어리다고 만만히 보는 거냐.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정말 세상에서 제일 싫다.
게다가 그 사람이 엄마를 괴롭게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다행히 손님이 우리뿐이라, 위장용(?) 모자는 벗어 버렸다.
주머니에 든 선글라스도 쓸 일이 없을 듯하다.
“커... 커흠... 근데 어쩐 일로 나를 보자고 했을까...요?”
“남필성 씨가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나요?”
188cm, 90kg의 거구에 근육질인 남자가 자신을 노려본다고 상상해 봐라.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주눅 들기 마련.
남필성이라는 작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꼴이 우습다.
“난 잘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임대료를 두 배 올려달라고 하셨다죠?”
“그... 그건 사정이...”
“좋습니다. 어차피 대화하려고 온 거니까요. 들어보죠, 그 사정. 저 시간 많아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여유롭게 커피 한 모금.
오, 이 집 원두 괜찮네.
딱 적당한 산미야.
“뭐... 뭐냐 그... 세금도 많이 올랐고...”
“아, 그러셨구나. 세금. 제가 미처 그 생각은 못 했네요. 건물주는 참 좋겠어요. 세금 오르면 월세 두 배 받아서 그 돈으로 내면 되니까. 그죠?”
“...”
아,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재미없는데.
힘 좀 내봐요, 왜 말을 못해요, 아저씨.
이런 새끼 때문에 엄마가 가슴앓이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돈이 없어서 못 내는 건 당연히 아니에요. 제가 누군지는 아실 테니.”
“네...”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냥 <백강분식> 있는 건물을 사 버릴까? 근데 생각해 보니 그건 남필성 씨한테만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 변두리 건물 사봐야 가격이 오르기나 하겠어요? 애초에 가게 구할 때 제가 같이 돌아다녔거든요. 우리가 거기 들어간 이유는 딱 하나에요, 싸니까. 근데 임대료를 올린다? 그럼 나가드려야죠, 뭐.”
“...”
“사람 하나 없던 골목 상권 살려놓은 게 <백강분식>인데, 건물주한테 쫓겨났다고 하면 주민들이 남필성 씨 참 곱게도 보겠습니다. 아, 물론 저도 욕먹겠죠. 돈을 그렇게 버는데 어머니 월세 하나 못 내주냐고. 근데 그거 아세요? 제가 드리는 한 달 용돈이면 임대료 내고도 남아요. 그래도 그 돈은 안 쓰시겠대요. 아들한테 손 벌리기 싫다고.”
“...”
“남필성 씨가 그렇게 독하게 사셨으니 건물주가 되셨겠죠. 인정합니다. 근데 우리 어머니를 건드린 건 실수하신 거예요.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릴게요. 첫째, 임대료 원래대로 돌려놓고 예전처럼 지낸다. 둘째, 고집부리다가 계약 파기한다. 어떻게 하실래요? 저희는 나가도 그만이에요. 널린 게 건물인데 뭐. 이참에 빌딩 하나 장만해도 되고요.”
“아니 저기, 백강 선수... 그...”
“어.떻.게. 하실래요?”
“처... 첫 번째로...”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시네요. 현명한 선택 감사합니다.”
더럽다.
내가 유명 축구선수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테지만, 반대로 내가 유명 축구선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해결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빌빌대며 제발 사정 좀 봐달라고 빌고 있었겠지.
돈이란 게 참 무섭다.
“더 할 말 있으세요?”
“아... 아뇨... 없습...”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네... 네?”
남필성은 여전히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오늘 저 만났단 이야기, 우리 어머니 귀에 안 들어가게 해주세요. 아셨죠? 똑똑하신 분이니 알아서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럼 이만.”
남필성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아주 상쾌하다.
누구든 김영순 여사를 건들면 주옥되는 거예요.
아주 주옥되는 거야.
* * *
생각보다 시시하게 <백강분식>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또 정신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축구선수였던 내가 한국에서는 톱 연예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
하이라이트는 용산구 모처에서 진행한 사인회.
행사 당첨자 외에도 혹시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싶어 몰려든 인파 때문에 인근 교통에 지장이 생길정도였으니.
애니웨이.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서 당초에 한국에 올 때 생각했던 일을 전혀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일이냐고?
뭐긴 뭐야.
엄마 표현대로 하면 ‘청춘 사업’이지.
김석중이랑 삼겹살 먹은 날 이후로 열흘이 지나도록, 나연 씨한테 제대로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한국에 머무르는 날은 점점 줄어만 가는데...
정말 엄마 말대로 이탈리아 여자 쪽으로 알아봐야 하는 걸까.
이 타이밍에 귀신처럼 울리는 핸드폰.
지이잉---
- 지난번엔 미안했어요. 오늘 밤엔 시간이 될 것 같은데요.
오, 신이시여.
나연 씨다.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
어디 보자, 내일 일정이...
오전 10시부터 촬영이 있긴 한데 그 정도는 거뜬하지 뭐.
들뜬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다.
- 저도 시간 괜찮아요 ㅎㅎ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요? 뭐 좋아해요?
이때는 아직 ‘까톡’이 나오기 전.
메시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고, 설렘도 더욱 크다.
- 녹화가 있어서 저녁 먹기는 너무 늦을 것 같고... 술은 어때요?
헐...
나연 씨 생각보다 과감한 분이었군요.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예에스!”
만날 약속을 정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추임새가 나왔다.
그리고 불쑥 찾아오는 걱정거리 하나.
뭐를 입고 나가야 하지?
간만에 인터넷 검색 좀 해봐야겠다.
남자 데이트 복장...
2009년엔 데이트할 때 어떻게 입고 다녔더라?
* * *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남녀 간의 고전적인 대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40분 정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지 뭐.
<하이, 풋볼> 회식 때 같이 술을 마신 적은 있지만 이렇게 단둘이 보는 건 처음.
어쩐지 긴장된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연 씨는 오늘도 엄청나게 아름답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스키니진에 레플리카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왔다.
하긴... 옷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미 얼굴이랑 몸매가 다 했는데.
우리가 만난 곳은 개별 룸 형태로 되어 있는 조용한 술집.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나연 씨 역시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장소 선정에 신경 좀 썼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 선정은 전적으로 맡길게요.”
“그래요? 음... 그럼 일단 오뎅탕 하나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어라? 의왼데?
“소주, 괜찮아요? 여기 와인도 파는데.”
“에이... 오늘 술 먹기로 했잖아요. 와인은 술이 아니죠.”
역시 털털하다.
“아, 맞아. 할 얘기 있었는데. 모닝콜, 이제 안 해줘도 돼요. 제가 하던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바뀌었거든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백강 씨 덕분에 시말서 안 쓰고 마무리할 수 있었네요.”
음... 자연스럽게 연락할 핑계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 기쁜 소식은 아니군.
이런저런 ‘근황 토크’를 하는 사이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왔다.
먼저 한 잔 따라주고 나한테도 따르려고 하는데, 별안간 고함치는 나연 씨.
“잠깐!”
와우, 귀가 다 먹먹하다.
이게 바로 공중파 아나운서의 발성인가.
방음이 잘 된다곤 하지만 이 정도면 옆방에서도 놀랐겠는걸?
“자작은 안 돼요. 내가 따라줄게요.”
“너무 크게 소리쳐서 제가 아주 큰 잘못을 한 줄 알았네요.”
“자작은 큰 잘못이 맞죠, 뭐. 자, 짠~”
자, 기억해 두자.
나연 씨는 자작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한다, 와인은 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취를 하는 여자다.
이것 참, 전부 다 마음에 드네.
술이 좀 들어가자 나연 씨의 양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너무 과음하는 거 아니에요?”
“어머, 실례의 말씀을. 두 병까진 거뜬해요.”
“벌써 얼굴이 빨간데요?”
“그래요? 더워서 그런가...”
심지어 귀엽기까지 하다니.
테이블 위에는 어느덧 세 병째의 소주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어요.”
“왜요? 먼저 보자고 한 건 백강 씬데. 한국 온 첫날에 문자 보냈잖아요. 혹시 다른 여자한테 잘못 보낸 건가?”
“네? 어... 아뇨...”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나연 씨.
“농담이에요, 농담.”
‘갓물주’ 남필성을 녹다운시키던 패기의 정백강은 온데간데 없다.
유럽 최정상의 수비수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던 스트라이커 정백강도 여기서는 순한 양일 뿐.
보디블로 연타에 휘청거리던 내게 승부를 결정짓는 묵직한 라이트 훅이 꽂혔다.
“백강 씨는 내가 그렇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