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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로 발롱도르-49화 (50/176)

49화

허... 허허... 허허허...

내가 그렇게 좋냐니.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잠깐만요. 우선 술 한 잔 따라줄래요? 자작은 하면 안 되니까.”

“그러죠, 뭐.”

선선히 잔을 채워주는 나연 씨.

어쩐지 표정이 도발적이다.

일단 한 잔 쭉 들이켰다.

거참,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언제부터 알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30%, 동료들 인터뷰 따줬을 때 50%, 회식 따라왔을 때 90%, 모닝콜 해준다고 했을 때 100%요.”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요?”

“네, 엄청 귀엽던데요.”

귀엽다는 말을 들어 본 지가 언제던가.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도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여자한테 들어본 건 처음 같기도 하고...

“다 알고 있었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 거겠죠?”

나연 씨는 대답 대신 술잔을 내밀었다.

“백강 씨, 나도 한 잔 줄래요?”

“그래요.”

“아냐, 가득 따라줘요.”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바로 호쾌하게 원샷 때리는 나연 씨.

“오늘 술이 다네요. 호감 있는 남자랑 같이 마셔서 그런가?”

사실상의 오케이 사인.

“백강 씨는 전혀 눈치 못 챘어요?”

“네, 전혀요. 그럼 나연 씬 언제부터?”

“만나기 전에 20%, 처음 만난 후에 40%, 인터뷰 따줬을 때 70%, 회식 자리에서 99%.”

“만나기 전부터요?”

“제가 인터뷰어였잖아요. 만나기 전에 백강 씨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죠. 어려운 환경에서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것 자체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99%죠?”

“백강 씨는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연애 상대로는 1% 정도 모자란 것 같아요.”

“어째서요?”

설마 외모 때문인가?

“1년에 얼굴도 몇 번 못 보는 남자친구라니, 좀 힘들지 않을까요?”

다행히 외모는 아니었다.

그렇구나.

물론 나연 씨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시작조차 못 해보는 건 너무 아쉽지 않나.

“그게 유일한 결격 사유라면, 한 번 만나 보죠. 막상 해보면 다를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고백하는 건가요?”

“네.”

“자신 있어요?”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음...”

맨유전 승부차기 때와 비견될 만한 긴장감.

선홍빛이 도는 나연 씨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 *

“다들 오랜만이에요!”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굉장히 반가운 기분이다.

특히 이 사람이 제일 반갑다.

“주장!”

이제는 은퇴 선수가 된 루이스 피구 형님의 예언대로, 사네티 주장은 팀에 남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2009-2010 시즌에 함께 트레블에 도전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무게란 무게는 다 잡아놓고 민망하게 됐네. 하여튼 이번 시즌도 잘 부탁해, 백강.”

별일 아닌 해프닝처럼 말하긴 했지만, 후문에 따르면 사네티 주장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구단 관계자들의 정성은 어마어마했단다.

무리뉴 감독 이하 코치진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주장의 집을 찾아 설득에 설득을 거듭.

점점 흔들리던 주장의 마음에 결정타를 날린 건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탁하네. 은퇴는 번복해주게나.”

주장의 손을 잡고 눈물까지 흘렸단다.

예순이 훌쩍 넘은 구단주의 눈물이라니.

아무리 독한 냉혈한이라도 그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리라.

더군다나 사네티 주장은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

피구 형님, 당신이 옳았습니다.

올해부터 호흡을 맞추게 될 새로운 얼굴들도 꽤 많이 보였다.

“백강,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다시 만날 줄이야. 어쨌든 반가워. 이번 시즌 동안 잘해보자고.”

악수를 청하는 사나이는 루시우.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바이에른 뮌헨과의 대결에서 끝없는 트래시 토크(Trash Talk)로 나를 박박 긁었던 주인공이다.

경기 후에는 훈훈하게 화해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

축구판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뮌헨과의 계약 기간이 종료된 루시우는 원래 당연히 재계약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르겐 클린스만의 후임으로 온 루이스 판 할 감독은 루시우와의 재계약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빡친 루시우는 바로 이적을 요청해 버렸다.

결국 땡전 한 푼 안 쓰고 루시우를 데려올 수 있었다.

루시우 같은 선수가 공짜라니.

내가 상대해 봐서 아는데, 이건 정말 대박 영입이 분명하다.

한편 루시우의 가세로 팀 내 입지가 불안해진 니콜라스 부르디소는 로마로 임대 이적을 택하며 리그에서 서로 맞붙게 되었다.

부르디소를 상대로 골을 넣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미안해진다.

디소 형,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정백강. 우린 시발 존나 끝내주는 투톱이 될 거야. 둘이서 아무리 못해도 한 100골은 넣어야지?”

거의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만큼이나 입이 거친 이 상남자.

카메룬에서 온 ‘흑표범’ 사무엘 에투.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의 트레블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핵심 멤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적시장에서 그의 이름은 끝없이 오르내렸다.

결국 즐라탄과의 스왑딜을 통해 인테르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루시우도 그렇고, 에투도 그렇고.

내가 알던 역사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화룡점정을 찍어줄 바로 이 선수.

“잘 부탁해.”

얼굴에 ‘과묵하다’고 쓰여 있는 것 같은 웨슬리 스네이더.

밀란에서 소년 가장 노릇을 하고 있던 히카르두 카카가 레알 마드리드 이적을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 스네이더를 우리 팀에서 전격 영입했다.

아직 여름 이적시장이 끝나진 않았지만, 1800만 유로(약 324억 원)로 이번 시즌 구단이 데려온 선수 중 가장 큰 몸값을 자랑한다.

뭐, 내 몸값인 3900만 유로에 비하면 꽤나 저렴(?)하긴 하지만 말이다.

애니웨이.

이 화려한 면면의 선수들이 모인 이곳은 이탈리아가 아닌 미국 로스앤젤레스다.

무리뉴 감독이 프리시즌 훈련장으로 최종 낙점한 곳이 바로 UCLA이기 때문.

한국에선 ‘우클라’라는 일종의 ‘밈(meme)’으로도 잘 알려진 UCLA는, 공부로도 명문이지만 스포츠로도 아주 유명한 대학이다.

NBA 역대 최고 센터로 꼽히는 카림 압둘자바, MLB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이 모두 UCLA 출신일 정도이며 그 외에도 UCLA를 거쳐 간 스포츠 스타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우리 팀이 유럽과 북미의 명문이 참가하는 친선 컵대회 ‘월드 풋볼 챌린지’에 참가하게 되어 겸사겸사 LA에 자리를 잡았다.

뭐, 말이 친선 대회지 다 돈 벌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디스 이즈 자본주의.

“모두 모였나?”

주세페 바레시 수석코치 이하 코치진을 대동한 채 가장 마지막에 무리뉴 감독이 등장했다.

기분 탓인가.

못 본 사이에 카리스마가 더 강력해진 것 같다.

“네! 감독님! 준비 끝났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사네티 주장.

그런 주장을 향해 씩 웃어 보이는 무리뉴 감독.

“자, 이번 시즌의 첫 번째 훈련이다. 시작하지.”

* * *

“아, 왜! 같이 가자니까!”

“싫어. 발로텔리랑 같이 가면 되겠네.”

“마리오랑은 뭔가 좀 안 맞는단 말이야.”

“걔가 인기가 더 많아서 그런 건 아니고?”

“어... 아... 아냐... 그런 거.”

“근데 왜 목소리가 떨려.”

“에이, 됐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 나 혼자라도 갈 거니까.”

이번에도 같은 방을 쓰게 된 룸메이트 문타리가 입을 샐쭉 내밀며 문을 쾅 닫고 나갔다.

5... 4... 3... 2... 1...

벌컥---

“그래도 옷은 갈아입고 가야지.”

“그럼 그럼. 마음껏 꾸미라고. 누가 알아? 오늘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될지.”

“지금 놀리는 거지?”

“아이고, 그럴 리가. 어서 옷 입어.”

문타리가 나한테 짜증이 난 이유는 같이 클럽에 놀러 가자는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도시에 와서 밤을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나 뭐라나.

어느 나라 예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단 맞춰줄 생각은 전혀 없다.

특유의 귀염뽀짝한 매력을 주위에서 몰라주는 건지, 이상하게 여자친구가 안 생기는 문타리다.

그러면서 밝히긴 또 더럽게...

흠흠...

발로텔리만큼 개망나니는 아니지만, 문타리의 클럽 사랑도 만만치 않다.

차이가 있다면 발로텔리는 훈련에 지장을 줄 정도라는 것.

적어도 문타리는 지각이나 결근은 하지 않는다.

“백강, 나 어때? 괜찮아?”

분명 5분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는데?

풀리는 속도가 장난 아니다.

“음... 아무래도 금목걸이는 좀 빼는 게 좋겠어.”

“왜? 이게 차밍 포인트인데.”

“차밍 포인트고 나발이고, 나를 믿어. 빼는 게 여섯 배는 더 나아.”

문타리가 수긍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지름이 3cm는 될 법한 대형 목걸이를 벗었다.

저런 거 차면 무겁지도 않나?

“이제 됐어?”

“오케이, 완벽해. 잘생겼어. 건투를 비네, 친구.”

“다녀올게. 오늘 늦을지도 모르겠는걸. 후후후.”

들뜬 표정으로 바람처럼 사라지는 문타리.

청바지에 체인도 좀 떼라고 할까 하다가, 건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보냈다.

나도 패션은 잘 모르지만 문타리는 정말...

하체만 보면 거의 보안관 급이다.

겨우 혼자 남았군.

어디 보자, 시차가...

서울은 지금 점심쯤 되겠네.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나연♥

번호 저장된 이름 옆의 하트가 앙증맞기도 하다.

그렇다.

내 고백에 대한 나연의 대답은 ‘예스’.

슈퍼 그레이트 초장거리 연애라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그날 이후로 서울에서 보낸 1주일 남짓한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서로 바빠서 오래는 못 봤지만 매일 얼굴을 보며 데이트를 즐겼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안 받네.

일하는 중인가?

끊을까 싶은 순간 수화기 너머로 나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 나 지금 회사 높은 분들하고 같이 점심 먹으러 왔어. 오늘 훈련 끝났어?”

높은 분들하고의 식사 자리라.

혹시나 했느데 역시 일하는 중이 맞았다.

“응. 지금 숙소에 있어. 그러면 통화 오래 못하겠네?”

“화장실 간다고 하고 잠깐 나왔어. 한 5분 정도는 가능할 거야.”

“높은 분들이면 좋은 거 얻어먹겠네?”

“청국장도 좋다면 좋지. 높은 분 중에서도 제일 높으신 분이 청국장 마니아라서 이분이 끼면 항상 청국장이야. 이적한 선수들하고 인사는 잘 했어? 에투랑, 스네이더랑, 또...”

“루시우. 이제 인테르 전문가 다 됐네?”

“그럼, 누구 여자친군데.”

“보고 싶다.”

“나도.”

막상 떨어져 보니 나연이 뭘 걱정했었는지 이해할 것 같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LA는 지금 밤이겠네. 잘 자. 내일 훈련도 열심히 하고.”

“그래. 점심 맛있게 먹어.”

짧디짧은 통화가 아쉽게 끝났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니 어째 적막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문타리가 없으니 방이 한층 크게 느껴진다.

어차피 별일 없을 거잖아.

얼른 와, 타리 형.

같이 피파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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