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0화 (51/176)

50화

삑- 삐비빅- 쿵쾅쿵쾅-----

“백강! 백강! 일어나!”

문타리의 목소리다.

어우, 지금 몇 시야?

새벽 4시네?

“일찍도 들어왔네. 그런데 자는 사람은 왜 깨우고 그래?”

“내 얘기 좀 들어봐봐. 진짜 만났다니까. 네가 말한 운명의 여자를 말이야.”

무슨 심각한 이야기인가 했더니 여자 얘기다.

“그것 참 축하할 일이네. 그럼 잘 자.”

“아, 좀, 일어나 보라니까. 지금 이 감정을 혼자 주체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친구 얘기도 못 들어주냐?”

문타리를 꽤나 오래 봐 왔지만 이 정도로 호들갑 떠는 건 처음이다.

어휴, 그래.

내가 안 들어주면 누가 들어주겠니?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훈련을 해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별 얘기 아니면 때릴 수도 있어.”

“엄청 대단한 얘기라고. 자, 원래는 클럽에 가려다가 생각을 바꿔서 그냥 바에 들어갔단 말이지. 고독을 즐기면서 딱 한 잔만 마시고 나오려는 생각이었어. 그런데 거기서...”

문타리가 말을 딱 끊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리액션 귀찮아.

“거기서 뭐?”

“나처럼 혼자 술을 마시던 그녀를 만나게 된 거지. 그녀의 이름은 메나예 돈코르.”

“돈코르? 아프리카 쪽 사람인가?”

“응, 가나 사람이야. 뭐, 태어난 곳은 캐나다긴 하지만.”

“그러니까 LA에 있는 바에서 가나 여자를 만났다 이거지? 그것 참 신기한 인연이긴 하네.”

막상 얘기를 듣다 보니 은근히 몰입되네.

확률을 생각해 보면 진짜 보통 일은 아니다.

잠깐, 이 타이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지.

“그 여자 예뻤어?”

“음후하하핫.”

“그 괴상한 웃음소리는 뭐야?”

“예쁜 정도가 아냐. 내 눈에 예쁜 건 둘째치고 말이지. 나도 대화를 나누다가 알게 됐는데 미스 가나 출신이라고! 객관적으로도 미인이라는 뜻 아니겠어?”

호오, 우리 문타리가? 미스 가나를?

이거 점점 흥미로워지는군.

“그래서 어떻게 말을 걸었는데?”

“노노, 그게 아니지. 그쪽에서 나한테 먼저 접근하더라고. 백강, 네가 한국에서 영웅이듯 나도 가나에선 어마어마하거든.”

크흠.

비교당하니까 어쩐지 분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미스 가나가 너한테 먼저 관심을 표했고, 자연스럽게 뜨거운 밤까지 보냈다는 얘기야?”

문타리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백강, 어른이 되세요. 그런 육체적인 것들, 이제 지쳤어. 정말 건전하게 대화만 하다 왔다고.”

“건전하게 대화만 이 시간까지 했다고?”

“내가 말했잖아. 운명의 여자라고. 서로 말이 어찌나 잘 통하던지. 음후하하핫.”

문타리와 이렇게까지 대화가 가능하다니.

정말 운명의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훈련 끝나고 또 만나기로 했어.”

“근데 운명도 좋고 다 좋은데, 우리는 곧 이탈리아로 떠나잖아.”

“그... 그렇긴 하지.”

갑자기 문타리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안쓰러운 녀석.

“짜식, 네 마음 다 이해한다. 나도 비슷한 처지거든.”

“비슷한 처지라니?”

“사실은...”

자칭 대한민국과 가나의 축구 영웅은,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여자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참 유익했다.

* * *

“진짜라니까 그러네.”

“에이, 말도 안 돼. 그게 시발 어떻게 가능해?”

“와, 사람 말을 못 믿네. 내기할래?”

“오케이, 100달러?”

“100달러 콜.”

“백강! 잠깐 이리로 좀 와봐!”

정말 사람 귀찮게 한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이번 시즌 신입생 사무엘 에투, 그리고 운명의 상대와 사랑에 빠진 문타리다.

“어찌나 크게 말하는지 다 들었습니다. 이봐 에투, 지금이라도 취소하는 게 좋을 거야. 100달러 날리고 싶지 않으면.”

“취소는 무슨. 판돈을 올려도 되고.”

“그래? 그럼 500달러 어때?”

“500이든 1000이든 마음대로 해. 난 자신 있으니까.”

바르셀로나에서 돈 좀 만졌나 봐?

화끈하기도 하시지.

콰아아아앙-----

환상의 짝꿍 문타리가 두 손으로 살포시 띄워준 공을 하프라인에서 헤더로 조졌다.

쭉쭉 뻗어 나간 공은 코너 에어리어에 놓아둔 다른 공을 직격.

단 한 번의 기회면 충분했다.

“어? 어? 헐!”

득의만면한 얼굴로 뒤에서 지켜보던 에투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나랑 문타리한테 500달러씩.”

“와... 시발... 너 존나 쩐다. 이게 되네. 돈은 이따가 줄게. 와... 근데... 와...”

후후, 놀랄 만도 하지.

공돈 벌었다.

주급이 2억이라도 공돈은 항상 기쁘다.

“백강! 잠깐 이리 와볼까?”

훈훈한(?) 내기가 끝나자 호출.

무리뉴 감독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가 아니고 또 무슨 일이실까?

벌써부터 긴장된다.

“네, 감독님.”

“모레 있을 첼시와의 경기, 네가 선발이다. 원톱으로 나갈 거고, 전반전만 뛸 거야.”

“네...”

이런 걸 굳이 불러서 알려주시는 이유가 뭐지?

“그리고 네게 과제 하나를 주겠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다.

“무슨 과제입니까?”

“간단하다, 골을 넣어라.”

난 또 뭐라고, 첼시가 만만한 팀은 아니지만 내가 누군가.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죠.”

“단, 헤더골은 인정 못 한다. 무조건 발로 마무리해.”

“네? 발로요?”

이건 좀 대수인걸.

“가능하겠지?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이니.”

감독님 특유의 독심술이 또 발동되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물론이죠. 하하하. 두 골도 가능합니다.”

“그럼 두 골로 할까?”

“아뇨, 일단은 한 골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미국에 있는 동안 매일 1시간씩 킥 훈련 추가.”

음... 이건 좀 세다.

“성공하면요?”

“뭘 원하나?”

“이번 시즌 끝나고 한국 한 번 와주시죠.”

무리뉴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런 조건은 전혀 생각지 못했는걸.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같은데?”

“한국에 감독님 팬이 참 많습니다.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오시면 가이드는 제가 하죠.”

“기대하지.”

* * *

이틀 후라...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짱구를 굴려 보자.

이변이 없는 첼시의 4백 라인은 고정일 것이다.

왼쪽에 애슐리 콜, 오른쪽에 조제 보싱와.

센터백은 존 테리와 히카르두 카르발류.

테리나 카르발류 모두 발이 빠른 스타일은 아니지만, 위치 선정이 워낙 좋고 몸싸움도 잘하는 데다가 태클 실력도 기가 막히니 내가 드리블로 뚫어낸다는 건 어불성설.

결국 패스를 받아서 뭔가를 해내야 한다.

어디 보자... 우리 공격진은 내가 원톱이랬으니.

발로텔리가 오른쪽 윙어, 아마 에투가 왼쪽에 서겠지?

크로스 받아먹기는 힘드니까, 포스트 플레이에 이은 에투와의 연계 플레이가 그나마 가능성 있어 보인다.

- 받아주고, 들어가고, 리턴, 쾅!

옛날 생각나네.

인테르에 처음 왔을 때 무리뉴 감독 지시로 ‘등지고 딱딱’만 엄청 연습했었다.

그때 내 연습 상대가 되어 주었던 포스트 플레이의 대가 에르난 크레스포 형님은, 지난 시즌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 거의 뛰지 못했고, 이번에 제노아로 자유 이적했다.

기술만 쏙 빼먹었다고 생각하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네.

크흠, 이게 다 내 습득력이 너무 뛰어난 탓이지.

스포 형님, 거기선 행복하세요.

가만.

갑자기 머릿속이 번뜩하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닐까?

무리뉴 감독은 아직 내게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 프리시즌 때도 이미 잉글랜드를 씹어먹고 온 내게 끊임없이 발전을 부르짖지 않았던가.

한국행이라는 무리한 조건까지 받아들이면서 굳이 과제를 내건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날 테스트하는 겁니까, 감독님.

뭔가 새로운 플레이를 원하시는 겁니까.

과제를 다시 한 번 상기했다.

- 단, 헤더골은 인정 못 한다. 무조건 발로 마무리해.

문제 속에 답이 있다지 않던가.

뭔가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흠...

* * *

2009년 7월 22일.

LA에 위치한 로즈 볼 스타디움에 8만 명이 넘는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친선 대회 ‘월드 풋볼 챌린지’ 최고의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인테르와 첼시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팀 중 둘이 만났으니 말 다 했지 뭐.

물론 두 팀 모두 결승 진출에 실패한 건 비밀.

“나왔다, 나왔어!”

취재진들이 혈안이 되어 찍어대는 인물은 슈퍼스타 정백강이 아닌 무리뉴 감독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결과적으로는 네 시즌을 채 못 채우고 팀을 떠났지만, 무리뉴 감독이 첼시 재임 기간 동안 보여준 임팩트는 어마어마했다.

맨유랑 아스널이 번갈아 가며 다 해먹던 리그인 EPL에 혜성처럼 등장, 처음 부임한 2004-2005 시즌에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역대 최고 승점인 95점으로 첼시에 우승컵을 안겼다.

1954-1955 시즌 이후 무려 50년 만의 리그 우승이었으니, 이 우승 하나만으로도 첼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대사건이었다.

같은 시즌 달성한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이 보너스처럼 보였을 정도.

그러나 ‘스페셜 원’의 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년 차인 2005-2006 시즌에도 홀로 승점 90점을 넘기며 리그 2연패 달성.

한 시즌 플루크가 아닌가 의심하던 사람들을 ‘셧 더 마우스’ 시켜버리는 결과였다.

비록 운영진과의 마찰로 인해 생각보다 일찍 첼시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하긴 했지만, 업적으로만 보면 첼시 역사상 최고의 감독 자리에 무리뉴를 넣는다고 해도 반박 불가.

몸을 푸는 동안 테리나 프랭크 램파드, 페트르 체흐 같은 옛 제자들이 무리뉴를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갔다.

특히 포르투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카르발류와는 오랜 시간 동안 포옹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보는 기자들은 당연히 신이 나서 셔터를 눌러댔고.

“오랜만입니다, 감독님. 잘 지내셨죠?”

자기 팀 선수들이 자꾸 적장한테 찾아가니, 외로울까 봐 신경 쓰여서 나도 상대 감독에게 인사하러 갔다.

“하하, 오랜만일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직 밀라노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농담도 잘하십니다, 안첼로티 감독님.”

“꼭 농담만은 아니라네. 어쨌든 오늘 좋은 경기 부탁하네.”

첼시의 지휘봉을 잡은 이는 카를로 안첼로티.

지난 시즌 밀란에서 무관에 그친 뒤 부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밀란에서 빅 이어만 두 번 들었던 화려한 경력에 비하면 조금은 쓸쓸한 퇴장이었다.

사실, 밀란의 형편없는 성적은 감독 탓이라기보단 운영진의 삽질에 힘입은 바가 더 컸지만...

어쩌겠는가.

항상 약한 놈이 당하는 게 세상 이치인 것을.

“후욱, 후욱, 후욱.”

“몸을 너무 과하게 푸는 거 아냐?”

“전혀. 체력이라면 존나 자신 있지.”

아직 팀 내 입지가 확고하다고 볼 순 없는 에투는 의욕 만땅이었다.

즐라탄한테 하도 데였던 전적이 있어서 슬쩍 물어봤다.

“윙포워드로 뛰는 건 괜찮아?”

“그게 왜? 나 윙도 개잘해. 옛날 팀에서도 메시랑 계속 스위칭하면서 뛰었잖아. 백강 너랑은... 좀 힘들 것 같지만. 측면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역시 좀 힘들겠지?”

이 녀석, 갑자기 뼈를 때리네.

에투는 바르셀로나를 ‘옛날 팀’이라고 표현했다.

트레블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허무하게 트레이드된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

그나저나 언사가 좀 거칠어서 그렇지, 프로다운 마인드는 갖추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스트라이커 자리 놓고 싸우는 건 이제 싫다.

누구랑 붙어도 내가 이기니까 경쟁 자체가 안 되잖아.

괜히 미안하기만 하고.

“딱 45분이다.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감독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경기장에 나서기 전, 과제를 언급하는 무리뉴 감독에게 약간은 거만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은 제가 끊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100% 확신은 없다.

제발 통해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