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LA 기후가 그렇게 좋다더니 날씨 한 번 기가 막히다.
좀 더운 게 흠이지만, 축구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
물론 골 넣기에도 딱이다.
킥오프.
첼시의 선축으로 운명의 45분이 시작되었다.
경기 초반은 피차 탐색전.
프리시즌 경기라 손발을 처음 맞춰보는 선수도 많고, 바뀐 전술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다.
밀란에서 ‘무(無) 윙어’ 전술로 명성을 떨쳤던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첼시에 와서도 비슷한 실험을 하는 중.
다이아몬드 형태로 세운 4미들이 무려 존 오비 미켈-마이클 에시앙-미하엘 발락-프랭크 램파드.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박이 어마어마하다.
오늘 플레이메이커라는 중책을 맡은 웨슬리 스네이더는 신장이 170cm에 불과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
에스테반 캄비아소나 문타리도 힘이 아주 좋은 선수들은 아니니 피지컬적으로는 엄청난 고전이 예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원의 우위를 앞세워 조금씩 첼시가 주도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콰앙-----
오늘 경기 첫 번째 슈팅은 램파드의 오른발에서 나왔다.
크로스를 끊어낸 왈테르 사무엘 형님의 헤더를 다이렉트 발리슛으로 연결.
살벌하게 날아간 공은 왼쪽 골포스트를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램파드를 프리로 두면 안 돼!”
부상 중인 다비데 산톤을 대신해 왼쪽 풀백으로 출전한 사네티 주장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주의해야 할 건 램파드 뿐만이 아니다.
발락이나 에시앙도 중거리슛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았다간 바로 실점이다.
차분하게 골킥을 준비하는 줄리우 세자르 형님.
스포츠 세계에 ‘만약’은 없다지만, 지난 시즌 세자르 형님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뻐어엉-----
내 머리를 겨냥한 긴 골킥.
중원 힘싸움에서 밀릴 땐 이만큼 효율적인 공격 전개 방식도 없다.
준비해온 필살기를 지금 쓸 타이밍은 아닌 것 같고, 우리 신입 실력 좀 볼까?
“에투!”
헤더로 떨궈준 볼을 향해 동시에 돌진하는 사무엘 에투.
무지무지하게 빠르다.
훈련할 때도 엄청난 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경기에서는 훨씬 더 날렵한 느낌이다.
‘흑표범’이란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겠군.
가속도가 붙은 에투가 공을 몰고 중앙으로 쇄도.
내가 측면 쪽으로 살짝 빠지면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무리뉴 감독에게 눈도장을 받고 싶은 에투는 의욕이 엄청나게 넘치는 상태.
직접 마무리를 지으려는지 슈팅 모션을 취했다.
그러나...
퍼억-----
히카르두 카르발류의 명품 슬라이딩 태클.
섣부른 태클 시도는 위험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타이밍이 정말 완벽했다.
“아오! 시발! 거지 같네!”
너무나도 깨끗한 태클이라 항의조차 못한 에투가 고함을 지르며 애꿎은 잔디만 주먹으로 두드렸다.
“달려!”
어느새 수비 지역까지 내려와 공을 건네받은 발락이 우리 진영으로 장거리 패스를 때려 넣었다.
발락도 벌써 서른셋.
이제 슬슬 쇠퇴할 나이건만 아직까지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발락이 내지른 볼의 행선지는 어느새 오른쪽 측면으로 이동한 스트라이커 니콜라스 아넬카.
안첼로티 감독이 전문 윙어를 두지 않는 대신, 다재다능한 아넬카에게 프리롤을 부여함으로써 공격진에 창조성을 더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가슴 트래핑으로 공을 잡아낸 아넬카가 지체 없이 디디에 드록바를 향해 얼리 크로스를 시도했다.
자비 없는 페이스의 빠른 역습.
이렇게 선이 굵은 축구가 현재 첼시의 선수 구성에는 잘 맞는 듯하다.
이제는 포지셔닝 싸움.
드록바와 루시우가 한 판 제대로 붙었다.
록바 형, 내가 상대해봐서 아는데.
쉽진 않을걸?
터엉-----
내 예상대로 공중 경합의 승자는 루시우였다.
힘에서 완전히 눌린 드록바는 점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수비수들 다 상대해본 나지만 순수 파워만 봤을 때 루시우 이상 가는 선수는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 좀 친해지면 트레이닝 비법 좀 물어봐야겠어.
루시우가 걷어낸 공은 스네이더의 품에 안겼다.
바로 압박 들어가는 첼시의 피지컬 굇수들.
스네이더가 상대의 매서운 등쌀에 밀려 캄비아소에게 공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쪽 측면으로 공을 뿌려 주는 캄비아소.
언제나 든든한 마이콘이 오버래핑하며 폭발적으로 치고 올라갔다.
해당 공간을 커버해줘야 할 에시앙이 조금 늦은 사이 거침없이 전진하는 마이콘.
지난 시즌 ‘팬들이 뽑은 MVP’ 2위에 선정된 선수답게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다.
1위는 누구냐고?
아이, 뭘 또 새삼스럽게...
그냥 한국에서 온 누군가라고 해두자.
애니웨이.
마이콘이 올라오면서 순간적으로 측면에서 2 대 1의 수적 우위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무리 애슐리 콜이 세계적 수준의 풀백이라지만 마이콘과 발로텔리의 협공을 혼자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콜이 침투를 노리는 발로텔리를 붙잡는 사이, 마이콘이 크로스 찬스를 잡았다.
뒤늦게 따라온 에시앙이 저지하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이미 공은 하늘 높이.
퍼엉-----
지금이다.
온몸의 세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주제 무리뉴 한국행’을 결정지을 순간이다.
바람을 가르며 일단 점프.
LA의 윗 공기는 상쾌하다.
같이 뛰어줘, 테리야.
내가 쓰려는 신기술은 수비수가 경합을 해주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제발!!!
“흐얍!”
나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존 테리가 괴상한 기합성을 내지르며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좋았어, 이거 가능성 있다.
테리가 정점에 도달하기 전에, 내 머리가 먼저 공에 닿았다.
툭---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마이크로 나노 컨트롤.
공이 아주 완만한 호를 그리며 테리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뭐야?”
경악으로 커지는 테리의 눈동자.
한발 먼저 착지한 내가 공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페트르 체흐 골키퍼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버렸다.
골문 앞에서 맞은 완벽한 1:1 찬스.
이걸 못 넣으면 축구 접어야지.
감독님, 김치랑 불고기, 연예가 중심 정도는 외워서 가셔야겠습니다.
으앗?
삑삑--- 삐비빅---
리카르도 살라자르 주심이 미친 듯 휘슬을 불며 달려왔다.
의심의 여지 없는 페널티킥.
마음이 너무 급했던지, 카르발류가 앞뒤 안 가리고 내 팔을 잡아채며 쓰러뜨렸다.
거기에 옐로카드까지 보너스.
만약 친선 대회가 아니라 공식 경기였다면 다이렉트 퇴장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문타리가 호다닥, 아니 메다닥 달려와 나를 일으켜주며 물었다.
“뭐? 어떤 거?”
이럴 땐 시치미가 제맛.
“모르는 척할래? 오늘 처음 한 거 아냐?”
“후후. 별거 아냐. 그냥 나의 섬세함을 살린 초특급 필살기라고나 할까?”
- 단, 헤더골은 인정 못 한다. 무조건 발로 마무리해.
무리뉴 감독이 내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나는, 마지막 표현에 집중했다.
‘발로 마무리해.’
바꿔서 이야기하면, 마무리 슈팅만 발로 하면 된다는 뜻 아니겠는가?
찬스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머리를 사용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들은 눈에 딱 보이는 내 헤더의 ‘파워’에 집중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정교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머리 하나로 유럽 최고의 공격수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여기에 착안해서 생각해낸 기술이 바로 방금 시전한 ‘툭탁뻥’이었다.
‘툭’ 넘겨서 ‘탁’ 받고 슈팅 ‘뻥’.
‘툭탁’까지만 하고 ‘뻥’은 파울 때문에 못 했지만 결과적으론 완전히 통한 셈.
앞으로 나를 상대하는 수비수와 골키퍼들은 공중볼 상황에서 지독한 3지선다를 경험하게 될 거다.
1. 직접 헤더슛
2. 동료에게 패스
3. 필살기 툭탁뻥
한마디로 주옥 됐다 이거지.
자, 이제 여유롭게 페널티킥 준비를 해 보실까?
“나! 내가 찰래. 내가 차게 해줘!”
아... 이건 미처 예상치 못한 비상사태다.
앙탈을 부리며 PK를 갈구하는 주인공은 에투.
인테르 유니폼을 입고 얼른 골맛을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듯하다.
전광판을 보니 아직 전반 13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 네가 차라.
나한텐 또 기회가 오겠지...
그러나 거짓말처럼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
* * *
삑--- 삑---
오, 마이, 갓.
내게 주어진 45분이 다 지나가 버렸다.
에투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데 이어, 내가 헤더골까지 하나 넣으면서 전반전은 2-0으로 끝.
내 마크맨인 테리가 한 번 당하더니 공중 경합을 잘 안 해주었다.
덕분에 한 골 넣고 이기고 있는 건 정말 기쁜데 말이지...
“미션 실패다, 백강. 아쉽게 됐네.”
라커룸으로 들어오자 무리뉴 감독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제 말을 좀 들어보시죠. 그게 말입니다, 감독님. 제가 찰 수도 있었는데 팀 케미스트리를 위해 양보를 했다는 말이죠? 우리 에투가 정말 차고 싶어 했거든요. 거기다가 정상적인 수비를 했다면 그 전에 이미 골을 넣지 않았겠습니까? 그 테리랑 카르발류가 꼼짝도 못하고 당하는 거 보셨죠? 하하하.”
“어떤 수식을 붙여도, 실패는 실패지.”
째잇, 안 먹히네.
“그래도 이렇게 멋진 답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 좋아, 이번 시즌이 끝나면 같이 한국에 가자고. 5년 만에 방문하는 셈이 되겠군.”
“아! 한국에 가신 적이 있나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2005년도에 첼시를 이끌고 한 번 간 적이 있지. 아는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습니다.”
에이, 뭔가 김이 샌다.
무리뉴 감독과 동반 입국하면서 나의 위상을 천하에 떨칠 생각이었는데...
“한국행과는 별개로, 실패는 실패니까 킥 훈련 1시간씩 추가다. 불만은 없겠지?”
커욱.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무리뉴 감독은 역시 얄짤없는 사람이다.
“네... 없습니다...”
훈련, 좋죠.
완전 사랑합니다.
망할.
* * *
“뜨허억?”
결국 2-0으로 마무리된 첼시와의 경기 다음 날.
룸메이트 문타리가 아침부터 호들갑이다.
“왜? 돈코르 씨가 이제 보지 말재?”
놀리려다가 하마터면 한 대 맞을 뻔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의 사랑은 굳건하다고.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기사 봤어?”
“무슨 기사?”
“호날두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대.”
아, 그게 뭐 대수라고.
앞으로 세계 축구계에 ‘메날두’ 시대가 열린다는 건 상식...이 아니겠구나.
아는 걸 모르는 척하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호날두가 맨유를 떠나다니!”
내 연기가 썩 나쁘진 않았는지, 문타리도 덩달아 신이 났다.
“더 놀라운 게 뭔 줄 알어? 추정 이적료가 9400만 유로래. 이게 말이나 돼? 호날두가 좋은 선수인 건 맞지만, 이건 오버페이지.”
그게 이 당시에는 그런 평가가 있긴 했는데...
결과적으론 말이지...
아오, 답답해.
“페레즈 회장 인터뷰 좀 봐봐. ‘가장 비싼 선수가 결국 가장 싼 선수다’. 허세도 이런 허세가 어디 있어? 정말 웃기지 않아?”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정말 웃기네.”
맞장구를 쳐주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근데 문타리.”
“응?”
“이게 이렇게까지 성을 낼 일이야?”
“당연하지.”
“어째서?”
문타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 이적료보다 거의 6배나 높단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아오, 자존심 상해.”
와... 미처 생각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비싸긴 비싸다.
어디 가서 쉽게 꿀리지 않는 명문인 인테르의 주전 미드필더보다 6배나 높은 몸값이라니.
가만 있자, 내 이적료가 3900만 유로였으니...
헐... 나랑도 거의 2.5배 차이다.
“확실히 문제가 있긴 하네.”
“그치? 그치? 이건 말이 안 된다니까!”
아무래도 이 정백강 님이 몸값 기강을 좀 잡아줘야 할 것 같다.
기다려라 호날두야, 이 형님이 이적할 때는 기본 1억 유로에서 시작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