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2화 (53/176)

52화

“야, 얼굴 좀 풀어라.”

“내 얼굴이 왜.”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한 거잖냐.”

“...”

미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내일 아침이면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문타리는 아침부터 죽을상.

‘운명의 여자’를 두고 발걸음이 차마 안 떨어지는 모양이다.

“네가 너무 침울해 있으니까 나까지 막 우울해지려고 하잖아. 피파나 할까?”

“그럴 기분 아냐.”

“흥, 그래. 맘대로 해라.”

기분 풀어주려고 나름 노력하는데 호응이 썩 좋지 않다.

침대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불안한 심리 상태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문타리.

저렇게 심성이 여려 가지고 축구는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문타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메나예한테 청혼할래.”

“커헉!”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야, 너 미쳤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무슨 청혼을 해?”

“아냐, 할래. 운명의 여자잖아.”

“애초에 운명 얘길 꺼낸 게 나긴 한데, 세상엔 운명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없어. 이탈리아에도 예쁘고 착하고 좋은 여자 많잖아.”

“그녀가 아니면 안 돼.”

큰일이다.

지금 문타리의 눈동자는 순도 100% 진심이다.

“정신 좀 차려, 문타리!”

“백강, 나 좀 도와줘.”

내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도 않는가 보다.

“도와주긴 뭘 도와줘. 하지 말라니까?”

“필요한 장은 내가 봐 올 테니까... 네가 해줄 일은 말이야...”

“아니, 지금 대체...”

“부탁한다.”

어휴.

그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냐.

나도 참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다.

그런데 타리 형, 그건 기억해줘.

나는 분명히 말렸다.

* * *

띠링-----

- 10분 뒤 도착 예정. 준비는 다 됐지?

문타리의 문자메시지.

- 그래, 얼른 오기나 해.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 정신 나간 청혼극(?)에 핵심 조연으로 위치해 있었다.

UCLA에 연락해서 야간 훈련장 사용 허락받고, 네온사인 설치하고...

난리도 이런 생난리가 없었다.

내 프로포즈도 이렇게까지 화려하겐 안 할 것 같은데...

“문타리 연락이야?”

“네, 주장. 10분 뒤에 온대요.”

여기 이상한 사람 한 명 추가.

사네티 주장이 문타리 사연을 듣더니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밤엔 좀 쌀쌀하네.”

“그러게요. 좀 두껍게 입고 나올걸. 감기라도 걸리면 문타리를 아주 혼내 줘야겠어요. 어어, 저 차 같네요.”

저 멀리 라이트를 번쩍거리며 주차장 쪽으로 접근하는 차가 보였다.

지난 1시간 동안 다른 차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문타리가 분명하다.

이윽고 훈련장 쪽으로 걸어오는 두 개의 그림자.

“와... 여자분 키가 엄청나게 큰데?”

“그러게요. 문타리랑 비슷하거나 더 클 수도 있겠네요. 미스 가나 출신에다가 모델로도 활동했다고 하긴 하던데...”

어두워서 그렇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늘씬하다는 느낌은 확 왔다.

“입장하는 순간에 보조 조명을 켜 달랬지...”

팟---

갑자기 불이 들어오자 돈코르 씨가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실물로 보니 이목구비가 훨씬 뚜렷하다.

조금은 센 인상의 미녀.

물론 얼굴만 보면 문타리에겐 좀 과분...

크흠...

돈코르 씨, 이제부터 시작이랍니다.

문타리가 과장된 모션으로 팔을 휘두르며 일장 연설을 했다.

“뭐라고 하는 걸까?”

“연습하는 거 잠깐 들었는데요. 지금까진 축구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나서 나의 세상이 달라졌다. 블라블라블라, 뭐 그런 내용이에요.”

“축구가 인생인 것치고는 열심히 안 하지 않아?”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주장.”

“엇! 지금 무릎 꿇으려는 것 같은데?”

“어어, 네온사인! 네온사인!”

황급히 스위치를 넣자 사방에 설치해둔 네온사인들에 일제히 불이 들어왔다.

색깔은 제각각이었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동일했다.

- Will you marry me?

으으, 못 보겠다, 못 보겠어.

나는 그만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하도 떼를 써서 성심껏 도와주긴 했다만, 실패할 게 뻔한 친구의 프로포즈를 옆에서 지켜보는 건 참 고역이었다.

“여자분이... 끄덕였는데?”

“네? 뭐라고요? 그럴 리가...”

사네티 주장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급히 상황을 확인했다.

돈코르 씨의 커다란 두 눈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

그러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포옹, 그리고 키...

에욱, 문타리가 키스하는 장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

이게 대체 무슨...

정말 운명의 여자였단 말이야?

“이걸로 문타리도 유부남 대열에 합류했군.”

두 사람의 키스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네티 주장이, 어쩐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 *

오랜만이다, 밀라노.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인근이지만, 밀라노에 도착하자 왠지 모르게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고향 못잖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

차이가 있다면, 나를 못 죽여 안달인 사람들도 다수 포진했다는 것 정도?

밀란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선수 1위가 바로 나였으니.

이것 참, 축구를 너무 잘해도 문제다.

애니웨이.

우리 팀은 제노아에서 미드필더 티아고 모타를 영입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이적은 없을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그렇게 완성된 2009-2010 시즌 스쿼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 38라운드에 걸친 리그 경기는 인테르의 우승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나마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밀란이나 유벤투스, 그리고 로마가 유의미한 전력 보강에 실패한 가운데 우리만 독야청청 빛나는 상태.

그런데 이런 상황이 꼭 신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이번 시즌 우리를 제외한 19개 구단은 ‘타도 인테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리그 5연패 저지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끝까지 방심은 절대 금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에는 신경쓰지 마라. 축구에서 ‘당연한 우승’이란 건 없다.”

무리뉴 감독 역시 이를 의식한 듯, 밀라노에서 진행한 첫 팀 훈련부터 기강을 세게 잡았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가 고작 스쿠데토 하나도 아니지.”

스쿠데토에 ‘고작’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두 번 좌절은 없다, 이번엔 기필코 트레블을 쟁취한다. 알겠나?”

“네! 감독님!”

팀 내에서 기합이 가장 바짝 들어가 있는 이는 사네티 주장이었다.

지난 시즌 승부차기 실축과 챔피언스리그 탈락의 충격 때문에 은퇴까지 고려했던 주장 아니겠는가.

주장도 벌써 서른일곱.

그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완벽하게 관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 꺾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간절함이라는 측면에서 주장을 따라갈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주장, 저만 믿으세요.

역사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 * *

빡세다, 빡세.

이번 프리시즌 일정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밀라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또 중국행 비행기를 타란다.

작년에는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열렸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가, 올해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다.

정말 이 자본주의...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좋게좋게 생각하자.

그렇게 돈 벌어서 내 연봉이 나오는 거라고.

“아오, 시발. 10시간 넘게 걸린다는데. 개짜증나네 정말!”

오늘 내 옆자리에는 문타리 대신 사무엘 에투가 앉아 있다.

문타리 녀석이 결혼을 앞두고 인생 선배인 사네티 주장과 상담을 좀 하고 싶다며 나를 버렸다.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

내가 프로포즈도 도와줬는데.

물론 주장도 도와주긴 했다만...

우리 팀에서 욕쟁이 쌍두마차를 꼽는다면 마르코 마테라치 형님과 에투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마테라치 형님은 과묵한 편인 반면, 에투는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스타일이라는 것.

그 말인즉슨, 10시간 동안 욕으로 점철된 에투의 속사포 래핑을 라이브로 즐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빨리 잠드는 게 상책인데, 이 녀석이 자꾸 말을 걸어온다.

“중국엔 자주 가봤겠지? 백강?”

“음... 청소년대표 시절에 한 번 간 게 전부인 것 같은데?”

“뭐? 시발? 지도 보니까 완전 지척이던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유럽처럼 차 타고 국경을 슝슝 넘는 게 아니라서.”

“그건 또 왜?”

욕 많이 하는 거 말고, 에투의 특징을 새로 한 가지 발견했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엄청나다.

“... 그렇게 분단이 되었단 말이지. 남과 북으로. 그래서 함부로 다닐 수가 없어. 오케이?”

장장 30분에 걸쳐서 우리 역사를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나도 학창 시절에 축구하느라 공부를 많이 못한 처지라... 중간중간 틀린 부분이 있었을지도?

“호오, 존나 개쩌는 스토리인데?”

어디가 개쩌는 지는 모르겠지만 만족했으면 이제 잠 좀 자자.

“내가 답례로 우리 카메룬 이야기를 좀 해줄게.”

아... 아무래도 자긴 글렀다.

‘에투의 카메룬 역사 강의’가 끝났을 때는 이미 6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 *

2009년 8월 8일, 베이징국가체육장.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우리와 맞붙을 상대는 라치오였다.

원래 수페르코파는 세리에 우승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 간의 맞대결인데, 지난 시즌에는 정백강의 맹활약에 힘입어 둘 다 우리가 먹어버려서...

데헷.

하여튼 규정에 따라 코파 준우승팀인 라치오와 다시 한 번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쟤네 좀 봐. 소문이 맞았나 봐.”

경기 시작에 앞서 몸을 푸는 라치오 선수들을 바라보며 발로텔리가 한마디 했다.

“그러게. 저렇게 밝은 애들이 아니었는데.”

문타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지난 시즌까지 라치오를 이끌었던 델리오 로시 감독의 경우 선수들에게 심심찮게 손을 댄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물론 진위 여부를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감독 교체 후 선수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로시에 이어 라치오의 지휘봉을 잡은 다비데 발라르디니 감독은 지난 시즌 리그 10위권 밖으로 평가받았던 팔레르모를 8위에 안착시키며 지휘력을 인정받은 인물.

“인테르는 명실상부한 리그 최강팀이다.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겠다.”

전임자인 로시에 비해 인터뷰는 훨씬 겸손했지만, 절대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말했었지? 우리는 세계 최강의 투톱이 될 거라고 말이야. 오늘 딱 5골만 넣자, 시발.”

인테르 소속으로 첫 우승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에투가 탐욕스럽게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수페르코파에 임하는 우리의 포메이션은 4-3-1-2.

무리뉴 감독은 요즘 경기를 할 때마다 전형을 바꾸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 중이었다.

인테르의 혼(魂) 하비에르 사네티 주장.

수호신 줄리우 세자르 형님.

‘오른쪽’ 마이콘.

그리고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정백강까지.

딱 4명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선수가 주전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라치오 역시 4-3-1-2로 선발 명단을 짰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도 4-4-2 VS 4-4-2로 맞붙어서 우리가 승리를 거뒀었는데 말이지.

과연 오늘은 어떻게 될까.

삑-----

휘슬과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