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3화 (54/176)

53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는 단판 승부.

그리고 단판 승부의 특징은 미치는 선수가 꼭 한 명쯤은 나온다는 것.

오늘도 어김없이 그런 선수가 등장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팀이 아닌 라치오 쪽에서 나왔다.

회귀한 나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선수, 마투잘렝이 바로 그 ‘엑스팩터(X-Factor)’였다.

라리가 팀인 레알 사라고사에서 뛰다가 지난 시즌에 라치오에 합류했다는데, 우리 팀과의 대결에서 뛰는 건 처음이었다.

말하자면 초면인 셈.

“쟤, 도대체 뭐야? 라치오에 저런 애가 있다고? 저렇게 잘하는데 왜 안 썼었지?”

문타리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마투잘렝이 지금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고 있는 플레이는 어마무시했다.

뭐랄까, 좀 더 역동적인 왼발잡이 버전의 후안 로만 리켈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유럽 대항전에서도 수준급으로 평가받는 우리 미드필더진의 압박이 마투잘렝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가볍게 볼을 키핑하며 전방으로 간담이 서늘한 스루패스를 쭉쭉 뿌려댔다.

4-3-1-2 포메이션의 ‘1’ 자리에 위치하면서 흔히 말하는 ‘옛날 10번’ 스타일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200% 수행하는 중.

투톱인 마우로 사라테와 토마소 로키의 컨디션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이미 라치오가 두 골은 더 넣었을 것이다.

날려 먹은 1:1 찬스만 대체 몇 개인지...

우리 입장에선 천만다행이다.

“한 발짝씩만 더 뛰자!”

라치오의 다비데 발라르디니 감독은 킥오프부터 단 한 번도 앉지 않고 줄곧 일어선 채 선수들을 독려했다.

압도적 강자를 잡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요소.

간절할 것.

흠, 일단 기본은 돼 있으시구만.

“수비! 수비 돌아와!”

내가 거만한 생각을 하는 사이 마이콘 쪽을 본 캄비아소의 느슨한 전진 패스가 허무하게 끊겼다.

뭔가 초반부터 말린 느낌.

볼 점유율 면에서 의외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라치오가 좋은 역습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도 공을 잡은 선수는 마투잘렝.

패스 미스를 범한 캄비아소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몸을 들이밀었으나 ‘알까기’를 당하는 굴욕을 맛보며 허무하게 벗겨졌다.

앞서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워낙 많이 보여줬던 마투잘렝이라, 우리 수비진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뒷공간 커버에 매진했는데, 이게 큰 실수였다.

뻐어엉-----

앞쪽에 공간이 나자마자 호쾌한 왼발 중거리포를 시도하는 마투잘렝.

그와 동시에 세자르 형님이 몸을 날렸다.

툭---

혼신의 힘을 다한 다이빙에 손끝이 공에 닿긴 했지만 공의 궤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철썩-----

전반 16분 만에 터진 라치오의 선제골.

마투잘렝이 기쁨에 몸부림치며 달려간 곳은 자신에게 선발 출전 기회를 준 발라르디니 감독의 품속이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뜨거운 사제(師弟) 상봉의 시간.

거참, 한 대 제대로 얻어맞고 시작하는군.

괜찮아 뭐.

이래야 재밌으니까.

* * *

유럽 무대 경험이 쌓이면서 얻은 게 하나 있다면 ‘여유’다.

예전에는 팀이 뒤지고 있을 때면 조급한 마음에 무리한 플레이를 연발하곤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90분이 엄청나게 긴 시간이라는 걸 안다.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오고, 그걸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나 같은 타깃형 스트라이커는 더더욱 그렇고.

“백강!”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수비형 미드필더 로베르토 바로니오의 거친 태클을 이겨낸 웨슬리 스네이더가 왼발 로빙 패스를 전방으로 때려 넣었다.

태클은 오른발을 노리고 들어갔지만, 스네이더의 양발 사용 능력은 세계적인 수준.

후속 플레이론 어떤 걸 가져간다지?

내 마크맨인 192cm의 장신 센터백 모디보 디아키테가 멈칫하는 느낌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이 귀여운 녀석, 첼시전 분석했구나?

디아키테는 슈팅, 패스, 그리고 ‘툭딱뻥’의 지옥 같은 3지선다에 걸려들어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었다.

어디 보자...

이번엔 새 파트너 실력 한 번 볼까?

투욱---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고 침투하는 카메룬산(産) 흑표범에게 초특급 택배 헤더가 배송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사비 에르난데스한테 꿀패스 받던 에투에게 보내는 ‘대가리 사비’의 선물.

까앙---

드리블 한 번 없이 먼 쪽 포스트로 감아 찬 에투의 슛이 크로스바를 맞혔다.

“아오! 시발 진짜!”

뒤따라 들어와 황급히 공을 걷어내는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동점골 기회가 아쉽게 날아갔다.

“괜찮아, 괜찮아! 흥분하지 마!”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에투의 클래스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

침투부터 마무리 슈팅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아주 깔끔했다.

역시 라리가에서 30골은 아무나 넣는 게 아니네.

굳이 따지면 세리에 A에서 넣은 33골이 더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애니웨이.

선제 실점이 각성제가 되었는지, 우리 팀이 슬슬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왼쪽 풀백으로 나선 사네티 주장이 문타리와의 콤비 플레이를 통해 최전방까지 질주.

크로스 시도를 통해 코너킥 찬스를 만들어냈다.

오른쪽에 마이콘이 있기 때문에, 풀백으로 나설 때는 수비적인 모습을 주로 보여주던 주장이 간만에 공격적인 재능을 뽐낸 장면이었다.

코너킥을 준비하러 달려간 선수는 스네이더.

앞으로 어지간한 데드볼 상황은 스네이더가 전담하지 않을까 싶다.

훈련 때 보여주는 스네이더의 킥력은 좋은 키커가 많은 우리 팀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걸 양발로 뻥뻥 때려대니.

약점이 없는 선수는 아니지만 킥만 놓고 보면 레알 사기캐다.

뻐엉-----

골라인을 벗어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각을 그리며 올라온 코너킥을 크리스티안 키부가 잘라먹으며 헤더슛을 시도했다.

코스 환상에, 파워도 제법 실린 위협적인 슈팅이었다.

그러나...

“나이스 플레이!”

라치오 선수들이 페르난도 무슬레라 골키퍼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기습적인 슈팅에 반응한 것 자체가 대단한데, 공을 쳐 낸 것도 아니고 그냥 잡아 버렸다.

공격엔 마투잘렝, 수비엔 무슬레라인가.

얘네 오늘 왜 이래?

* * *

“감독 하나 바뀐 게 이렇게 큰가? 장난 아니네, 쟤네.”

전반전 종료 후 쉬는 시간.

라커룸에 들어온 문타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45분 동안 합을 맞춘 결과는 0-1.

마투잘렝의 한 골을 지키며 라치오가 리드를 가져갔다.

“축구는 원래 감독 놀음이야. 몰랐나?”

문타리의 말을 들은 무리뉴 감독이 농담을 날리자 다 같이 빵 터졌다.

비록 지고 있긴 하지만 라커룸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끝에 가서는 결국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선수들의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경기력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무리뉴 감독의 말마따나, 실점 이후 주도권은 줄곧 우리 손에 있었다.

에투의 골대 샷이 들어갔다면, 혹은 무슬레라의 컨디션이 절정이 아니었다면, 스코어보드에는 전혀 다른 숫자가 새겨져 있었을지도?

“걱정 붙들어 매십쇼. 후반전엔 확실하게 마무리하겠슴다!”

에투가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외쳤다.

의욕 하나만큼은 정말 엄지척이다.

“기대하도록 하지.”

입장 전 파이팅은 사네티 주장의 몫.

“세리에와 코파. 더블을 달성한 챔피언의 위용을 똑똑히 보여주자!”

“네! 주장!”

심기일전하고 필드로 복귀하려는데 무리뉴 감독이 나를 불렀다.

“백강.”

“네, 감독님.”

“보여주고 와라.”

“알겠습니다.”

에투 형...

정말 미안한데 감독님은 나한테 훨씬 기대하시는 것 같아.

* * *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백강, 즐라탄, 에르난 크레스포에 이은 네 번째 스트라이커로 지난 시즌 함께 했던 훌리오 크루스 형님이 그 주인공.

우리 팀과 만날 땐 늘 안 풀리는 사라테를 대신해 투입되었다.

네 번째 스트라이커란, 세 번째 골키퍼나 네 번째 센터백과 마찬가지로 어지간하면 출전하기 힘든 위치.

크루스 형님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테르에 있을 땐 사실상 의미 있는 경기에 출전한 적이 거의 없었다.

마침 계약 기간도 딱 끝나 이적은 당연한 수순.

많은 팀들이 러브콜을 보냈고 크루스 형님의 선택은 라치오였다.

크루스 형님이 부메랑이 되어 우리 골문을 가격할지, 아니면 친정팀에 대한 의리(?)를 지킬지도 흥미로운 대목.

킥오프.

앞서고 있는 만큼, 라치오가 조심스럽게 경기를 풀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경기도 오산이었다.

발라르디니 감독은 오히려 라인을 쫙 끌어올리며 ‘한 골 더 넣기’ 전략으로 나왔다.

그거 정말 괜찮겠어요?

우리 팀엔 에투가 있는데.

퍼엉-----

상대가 완전 배째라 식으로 나올 땐 참교육을 시켜줘야 제맛.

페널티박스 앞에서 공을 잡은 키부가 상대 뒷공간을 노린 롱패스를 시도했다.

먹잇감을 포착한 흑표범이 행동 개시.

멋지게 라인을 깨며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1:1 찬스.

천하의 무슬레라라도 이건 못 막겠지 싶은 순간.

“이게? 말도 안 돼! 시...ㅂ”

“나이스 런! 움직임 좋았다, 에투!”

에투가 욕설을 하기 전에 황급히 끌어안았다.

한 박자, 아니 거의 두 박자 정도 늦게 부심이 깃발을 들며 오프사이드 선언.

공격수 입장에선 짜증이 확 날 만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판정 자체도 좀...

정확한 건 리플레이를 봐야 알겠지만 느낌으론 오심이었다.

안 그래도 다혈질인 에투는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자 많이 흥분한 상태였다.

약간의 찜찜함을 남긴 채 경기 재개.

무슬레라가 훌리오 크루스 형님의 머리를 겨냥하고 프리킥을 길게 찼다.

옛 동료 키부와의 공중 경합에서 승리하며 쇄도하는 마투잘렝에게 정확한 헤더 패스를 연결하는 크루스 형님.

이미 중거리포로 한 골을 기록했던 마투잘렝의 왼쪽 발등에 공이 제대로 얹혔다.

아찔한 순간.

퍼억-----

공의 이동 경로를 선점하고 있던 루시우가 몸으로 슈팅을 막아냈다.

어휴, 저거 무지하게 아플텐데...

마투잘렝이 루즈볼을 잡기 위해 재차 달려들었으나, 캄비아소가 뒤쪽에서 스탠딩 태클로 공만 쏙 빼내며 전반전에 알까기 당했던 설움을 갚았다.

이번엔 우리의 역습 기회.

스네이더가 내려가서 공을 받자마자 전방을 확인한 후 지체 없이 에투 쪽으로 공을 뿌렸다.

트래핑과 동시에 주심 쪽을 힐끗 바라보는 에투.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투웅--- 투웅---

주력에 자신 있는 선수들이 흔히 그렇듯, 에투가 공을 길게 쭉쭉 치고 나가며 수비수와의 거리를 조금씩 벌려 갔다.

경악스러울 정도의 스피드.

무슬레라가 각을 좁히며 뛰쳐나왔지만 이미 에투의 로빙슛은 텅 빈 골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철썩---

“그라췌! 패스 존나 끝내줬어!”

에투가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해준 스네이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온 에투가 레알 마드리드 출신인 스네이더의 패스를 받아 골을 만들어낸 이색적인 장면.

지난 시즌 엘클라시코에선 서로를 죽일 듯 달려들며 싸웠을 텐데 말이지.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발라르디니 감독의 승부수는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기습적으로 확 몰아붙여서 0-2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이 도박적인 전술엔 에투가 너무나도 완벽한 카운터였던 것.

“인테르에서의 첫 골 축하해, 에투!”

“크하핫, 봤지? 이게 나야. 백강, 너도 빨리 하나 보여주라고! 유러피언 골든 슈 실력 좀 감상하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이적생 두 명이 동점까지는 만들었으니, 이제 터줏대감께서 트로피를 접수할 차례다.

정백강이 어떤 선수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