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54화 (55/176)

54화

동점골이 터진 후 먼저 눈에 띄는 움직임을 가져간 쪽은 오히려 무리뉴 감독이었다.

파트리크 비에이라 형님을 불러들이고 발로텔리를 투입하며 4-3-1-2 포메이션에서 4-4-2로 변화를 꾀했다.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많이 뛴 라치오의 체력적 약점을 빠른 측면 공격을 통해 공략하겠다는 생각이겠지?

꽤나 일리 있어 보인다.

한편 끝날줄 모르고 미쳐 날뛰던 마투잘렝의 활약은 시간이 지날수록 잠잠해졌다.

축구 스타일에 대한 데이터 다운로드가 끝났는지, 캄비아소 형님이 완벽한 대인마크를 선보이며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는 중.

덕분에 중원에서의 창의적 플레이가 실종된 라치오는 단조로운 롱패스 공격으로 일관했으나, 우리 수비진 상대로 그런 게 먹힐 리가 없었다.

센터백 콤비 루시우와 크리스티안 키부가 완벽한 호흡을 과시하며 공이 날아오는 족족 끊어냈다.

경기는 완연한 우리의 페이스.

이제 마지막 방점만 찍어주면 된다.

물론 내가 말이지.

“크로스 올라온다! 정백강 잡아!”

연이은 선방으로 라치오를 지탱 중인 페르난도 무슬레라 골키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 좋은 보양식이라도 잡수셨나.

사네티 주장이 또 최전방까지 올라오며 왼쪽 측면을 거의 박살 내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왼쪽’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전혀 아깝지 않은 활약.

어떻게 막을까 물어보죠?

내 마크맨인 모디보 디아키테가 또 ‘죽음의 3지선다’에 걸렸다.

이번에 녀석이 써낸 답은 함께 점프하며 경합.

안됐지만 땡이다, 이눔아.

툭---

섬세하게 키만 살짝 넘기고,

탁---

침착하게 트래핑한 후에,

뻐-

삑삑삑---

아니, 첼시 때도 이러더니?

슈팅 좀 쏴보자.

진짜 너무들 하네.

* * *

후반 27분 작렬한 필살기 ‘툭탁뻥’ 한 방에 게임이 그냥 터져 버렸다.

뒤쪽에서 내 유니폼을 잡아챈 디아키테는 얄짤없이 다이렉트 퇴장.

거기에 페널티킥까지 주어졌다.

내가 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고, 그런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 하나도 없었지만 그냥 쿨하게 양보해 버렸다.

우리 팀에는 ‘PK 달인’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넣어라.”

“물론이지.”

‘정백강 효과’의 수혜자가 된 발로텔리는, 무슬레라를 완벽히 속이며 역전골의 주인공이 되었다.

상의 탈의해서 경고받은 건 뭐 당연했고.

가뜩이나 전력 차가 나는데 퇴장까지 당한 라치오는 저항할 힘을 완전히 잃었다.

그리고 발로텔리는 은혜를 확실히 갚았다.

역전과 함께 심리적 한계에 봉착하며 다리가 풀려버린 라치오 수비진은, 이 성깔 더러운 축구 천재의 드리블 돌파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측면이 무너지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게 바로 정백강이라는 사나이.

발로텔리의 칼날 크로스 두 방은 그대로 초강력 헤더슛으로 연결되었다.

시즌 첫 공식전부터 깔끔하게 멀티골.

최종 스코어는 4-1.

우리는 이탈리아 최강팀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며 수페르코파를 2년 연속 품에 안았다.

“허허허... 안 되네, 안 돼. 인테르는 여전히 세다. 백강, 너도 그렇고 말이야.”

전 소속팀에 대한 화려한 복수를 꿈꿨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훌리오 크루스 형님이 유니폼 교환을 요청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올해는 트레블 해야죠.”

“너희라면 가능할 거다.”

“작년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랬으면 오히려 내 마음이 아팠을걸? 내가 안 뛰었는데 트레블이라니!”

“하하하,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눈 후 크루스 형님이 터덜터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저 형님도 벌써 서른다섯이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나의 10년 후는 과연 어떤 모습이려나?

에혀, 됐다.

그런 생각 해서 뭐하냐.

일단 현재에 충실하자.

기적적으로 얻은 기회니까.

* * *

- 저거 원래 쓰던 기술인가?

- ㄴㄴ 프리시즌에 첼시랑 붙을 때 처음 썼음

- 인터밀란이랑 첼시랑 언제 붙음?

- 진정한 팬이라면 정백강 경기 중계는 다 챙겨봐야지 ㅡㅡ

- 진정한 팬 이지랄 ㅋㅋㅋ 그냥 할 일 없어서 그런 거겠지 ㅋㅋㅋ

- 그나저나 저 기술 졸라 신박하네 ㅎㄷㄷ

- 별거 아니잖어 나도 할 수 있을 듯??

- 엌ㅋㅋㅋㅋ 넌 머리에 맞추지도 못하고 맞춘다고 해도 컨트롤이 저렇게 안됨 ㅋㅋㅋㅋ

- 근데 정백강은 왜 발기술 안 쓰고 자꾸 머리로만 축구하냐?

- 머리로 득점왕 트레블했는데 뭘 더 바람?

- 메시처럼 다 제끼고 넣는 게 축구지 ㅋㅋㅋ

- 지난 시즌 메시 38골, 정백강 54골 ㅅㄱ

- 포지션이 다른데 골 숫자로 비교를 하고 있네

- 메시 얘기 먼저 꺼낸 게 누군데? ㅋㅋㅋ

- 꾸레 존나 싫다 진짜

- 한국 선수라고 무조건 빠는 게 더 ㅂㅅ같음

한국에도 수페르코파가 정식 중계된 덕분에, 실시간으로 ‘툭탁뻥’을 지켜본 팬들의 반응이 열화와 같이 커뮤니티를 점령했다.

그런데 댓글 흐름은 엉뚱하게도 ‘정백강 VS 리오넬 메시’로 흘러갔다.

그 이유야 뭐...

다름 아닌 4개월 앞으로 다가온 FIFA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 시상식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등 쟁쟁한 후보군들이 버티고 있긴 했지만, 사실상 들러리라는 게 중론.

결국엔 나와 메시의 대결 구도였다.

‘세계 최고의 골잡이’ 대 ‘트레블 팀의 에이스’.

그 누구도 결과를 속단하기 힘든 경쟁이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때문에 엉뚱하게도 기자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된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에투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메시랑 같이 뛰다가 나의 팀메이트가 됐으니 그보다 좋은 인터뷰이가 어디 있겠는가?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곤란해서인지 처음에는 답변을 거부하려던 에투는, 기자들이 자꾸 귀찮게 굴자 두 줄짜리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앞으로 두 사람 얘기 나한테 물어보지 마라. 나도 엄연한 발롱도르 후보니까.”

다소 뻔뻔하지만 아주 허황된 것도 아닌 에투의 답변에 기자들은 데꿀멍.

이 사건을 두고 문타리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놓았다.

“또라이가 다른 종류의 또라이로 바뀌었네.”

타리 형, 그걸 한국에선 이렇게 불러.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 * *

[인테르, 리그 개막전서 바리에게 1-0 신승... 정백강 결승골]

[최약체 상대로 홈에서 졸전... 인테르도 무적은 아니다!]

[팬들에겐 걱정, 라이벌들에겐 희망 안긴 경기]

시즌 개막 전, 더 나아가 수페르코파 때만 하더라도 우리 팀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했던 언론들은 1라운드 종료 이후 태도를 싹 바꿨다.

올해 승격한 바리를 상대로 한 홈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끌려다니다가 종료 직전 터진 나의 헤더골로 간신히 승리했기 때문.

“38게임 중 하나일 뿐. 이겼다는 게 중요하다.”

무리뉴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집중포화는 계속되었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 나왔다.

“인테르의 전력은 엄청나게 과대평가되어 있다. 곧 다가올 더비는 우리가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대담하게 입을 턴 주인공은 카를로 안첼로티의 후임으로 밀란 사령탑 자리에 앉은 레오나르도 감독이었다.

1라운드에서 시에나로 원정을 떠난 밀란은 알레산드로 파투의 멀티골에 힘입어 2-1로 승리.

확실히 첫 경기 내용만 놓고 보면 우리보다 낫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오버한 발언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무리뉴 감독은 이런 도발을 웃고 넘길 위인이 아니었고.

“레오나르도가 ‘감독’이란 직책을 언제부터 맡았더라? 아, 올해가 처음이지? 초보 감독이 첫 승리에 감격하고 흥분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가볍게 잽 한 번 날렸다가 라이트 훅을 카운터로 얻어맞은 레오나르도 감독은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지난 시즌 무리뉴의 성공은 선수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정백강이나 마이콘 같은 선수들을 데리고 우승을 못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게 자기 능력이라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만이다.”

여기서 터지는 무리뉴 감독의 결정타.

“왜 정백강과 마이콘만 언급하나? 나와 함께하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월드클래스다.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선수들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감독의 ‘그릇’이라고 부른다. 비록 레오나르도가 지금은 그릇이 작아서 약한 팀을 감독하고 있지만, 노력해서 그릇을 키운다면 더 좋은 팀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10년 연마하면 되지 않겠는가?”

언론 플레이로 무리뉴 감독을 자극해보려던 레오나르도 감독은 본전도 못 찾고 ‘GG’를 쳐야 했다.

어쨌든 두 감독의 배틀 덕분에 안 그래도 강렬한 밀라노 더비의 열기는 8월의 태양보다도 더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어서 오세요~ 백강 씨가 1등이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백강 얘가 발은 엄청 느린데 약속은 제일 빨리 오는 걸로 유명해요, 달링.”

아아, 그냥 집에 갈까.

달링이라니.

문타리 입에서 나올 소리냐 이게.

이곳은 문타리의 집이고, 현재 문타리는 ‘운명의 여자’ 메나예 돈코르와 동거 중이다.

결혼식만 안 올렸다 뿐이지 사실혼 관계지 뭐.

내가 눈치 없게 남의 신혼집에 왜 왔느냐 하면...

“대진 추첨 때는 피구 형님이 있어야 제맛인데. 조금 아쉽네.”

그렇다.

오늘은 2009-2010 UEFA 챔피언스리그 32강 대진 추첨이 있는 날.

원래 사네티 주장의 집에서 추첨식을 보는 게 관례(?)였는데, 이번엔 문타리가 모두를 초대했다.

돈코르 씨를 모두에게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는 명목이었는데, 사실은 염장 지르려고 부른 것 같기도 하고...

보고 싶다, 나연아.

“내가.. 마지막인가? 미안하게 됐네. 지역 봉사단체 행사가 있어서 거기 참석하느라...”

역시 밀라노 유지답다.

봉사단체 행사라니.

하여간에 사네티 주장을 끝으로 오늘의 멤버가 모두 모였다.

“우리 부부가 둘 다 가나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오늘 음식도 가나 전통 요리로 준비해 봤어요. 입맛에 맞으셔야 할 텐데 조금은 걱정이네요. 하하!”

부지런히 접시를 나르는 문타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부부란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구만 그래.

“먼저 첫 번째 요리. 이건 ‘졸로프’라는 건데요. 쌀이랑 각종 채소, 고기를 같이 익혀서 만든 겁니다. 이게 조금...”

오호, 비주얼은 거의 김치볶음밥인데?

“으악! 매워! 물! 물!”

호스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숟가락 먹더니 비명을 지르는 다비데 산톤.

“맵다고 말하는 중이었는데... 왜 그렇게 급해?”

문타리가 물을 따라주며 혀를 찼다.

산톤에 이어서 도전한 사네티 주장도 삽시간에 얼굴이 시뻘게졌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아예 손댈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거 참, 내가 나설 차례인가?

불닭의 나라, 코리아의 정백강이 말이다.

“그거 아냐, 하지 마!”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한 술 크게 퍼서 입안에 욱여넣었다.

“응? 이게 그렇게 매워요? 그나저나 생각보다 되게 맛있네!”

딱 기분 좋게 매콤한 게 어딘지 한국 음식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세상 맛나게 먹고 있는 나의 모습에 주장과 산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괴... 괴물이야. 이런 걸 어떻게 먹지?”

“그러게요... 믿을 수가 없네요.”

다행히 졸로프 다음에 나오는 요리들은 향이 좀 세긴 했지만 무난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다들 이색적인 식사를 즐겁게 마쳤다.

“곧 시작해요~”

타이밍 좋게 TV를 켠 돈코르 씨가 명랑한 목소리로 손님들을 불렀다.

“어디... 올해는 어떤 팀들을 짓밟게 될지 한 번 보실까?”

그래도 숙녀 앞이라 욕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에투가 소파에 몸을 누이며 중얼거렸다.

“후...”

여유 넘치는 에투와는 상반되게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주장.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아 괜히 가슴이 아린다.

걱정 마세요.

올해는 반드시 우승합니다.

1